〈 26화 〉25국 - 귀정(歸正)
하윤서의 스승이자 아버지인 하윤진 5단은 그렇게 이름이 알려진 바둑 기사는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어디에나 있는 6단의 벽을 뚫지 못하고 그저 그런 프로 생활을 하며 바둑 보급에 힘쓰던 평범한 프로바둑기사.
누구 하나 어릴 적에 천재 소리를 안 들어본 적 없는 프로바둑기사에게 평범하다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런 비교적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서 인공지능이 나타나 바둑을 정복했을 때 느낀 충격이 작아지지는 않았다.
비록 재능, 혹은 노력이 부족하여 더 멀리 걸을 수는 없었지만, 그 역시 평생 한 길을 걸어온 승부사였으니까.
하윤진 6단뿐만이 아니다, 그 당시에는 프로바둑기사든 아마추어든 바둑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감을 품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중에서는 인공지능이라는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적응하기 시작한 사람도 있었지만, 아예 바둑을 포기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하윤진 6단은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평생 바둑 외길을 걸어온 아버지를 존경하던 하윤서는 그녀의 아버지가 은퇴할 때 그녀의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직도 하윤서는 아버지가 은퇴한 날 서럽게 울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 날부터 하윤서는 인공지능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수가 인공지능이 판단하에 승률을 높이는 좋은 수, 또는 승률을 낮추는 나쁜 수로 분류되는 것을 혐오했다.
결국, 바둑은 확률 싸움이라는 인식을 부정했다.
기계는 찾지 못하는, 사람만이 둘 수 있는 수가 있음을 굳게 믿으며 그녀는 홀로 그녀의 길을 걸어왔다.
주변 사람들이 허울 좋은 소리를 한다, 헛소리다, 결국 사람은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녀를 무시했지만, 그녀의 결심은 한결같았다.
사람의 바둑으로 인공지능을 이긴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끝낸다.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사람들이 하윤서에 대해 자주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그녀가 인공지능의 바둑을 전혀 모르는 트렌드에 뒤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블루스팟 일치율은 단30%, 90년대에나 볼 법한 고풍스러운 바둑을 두는 그녀를 본 사람들이 그런 오해를 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하윤서를 실제로 상대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왜 내가 이런 사람한테 졌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하지만 사실 그들의 패배는 정해져 있는 수순이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하윤서는 인공지능을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인공지능을 연구하면서 칼을 갈았다.
결국, 인공지능을 이기겠다는 한 천재의 집념은 독특한 기풍을 만들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인공지능을 상대하는데 특화된 기풍.
하윤서의 무기는 아직 인공지능에게는 닿지 못할지언정 그녀의 상대가 인공지능과 비슷한 수를 두면 둘수록 상대에게 날카롭게 파고드는 요도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요도는 지금 이 순간 확실하게 정도찬을 위협하고 있었다.
대국의 중반부, 우하귀 흑의 견고함 사이에 외로이 서 있는 백 한 점은 매우 중요한 돌, 즉 요석이다.
저 돌이 죽으면 우하귀 전체가 흑의 손에 들어간다, 대충 가치를 따져보자면 20집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저 요석은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 분명 인공지능이라면 그렇게말할 터였다.
정도찬은 요석을 살리기 위해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손을 뻗었다.
우선 자신의 판단이 맞았음을 믿었고, 혹시 다른 노림수가 있더라도 견고한 행마가 훌륭한 방패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하윤서의 선택은 정도찬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당연히 요석을 향해 뻗은 손으로 날아올 줄 알았던 하윤서의 요도는 방향을 틀어 정도찬의 다리를 노렸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우변이 찔린 것이다.
여기서 손을 한 번 더 빼 요석을 확실히 살리더라도 저 찔러보기가 치명상이 될 수는 없다. 결국, 요석을 살렸으니 정도찬의 이득임은 분명하다.
아니면 저수를 받아서 우변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도 된다.
문제는 우변이 찔린 지금, 우하귀의 요석이 더는 요석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이런 느낌이었다.
중요한 국면에서 한 수 한 수 지나갈 때마다 국면이 확확 뒤집힌다.
악수인 줄만 알았던 수가 어느새 명수가 되어있고, 요석처럼 보이는 돌은 평범한 사석이 된다.
마치 정도찬의 형세판단을 비웃듯,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것이 신기루가 된 것처럼 흩어져 사라지고, 전혀 다른 국면이 눈에 들어온다.
대충 계산해보니 이번 공방도 정도찬의 두 집 손해.
분명 스무 집의 이득을 볼 수 있다고 판단해 뛰어들었으나 오히려 두 집을 손해 보게 된 것이다.
하윤서의 요도는 조금씩 확실하게 정도찬에게 해를 입히고 있었다.
정도찬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느낌이다.’
하윤서가 90년대에나 보일법한 과거의 바둑을 둔다고 방심했던 걸까?
잠시 고민하던 정도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상대가 누구이건 최선을 다한다.
이번 대국도 마찬가지다, 정도찬은 최선을 다했다.
다만 상대가 정도찬 입장에서 끔찍할 정도의 천적이었을 뿐이다.
‘이대로라면 질 것 같은데.’
이미 대세가 하윤서 쪽으로 기울었다.
잠시 돌을 던질까 생각하던 정도찬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생각해보면, 한세빛과의 대국 이후 트라우마를 극복한 후 이렇게까지 큰 위기감을 느껴본 건 처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협회의 입단 대회 결승전에서도 위기감을 느끼긴 했지만, 그 위기감과는 결이다르다.
체력과정신력이 한계에 달해서 질 것 같다는 위기를 느낀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순수한 실력에서 밀리는 느낌이었다.
밀리는 국면을 자주 마주하지 않았을 뿐이지 자신의 멘탈이 생각보다 약함을 알게 된 도찬은 자신의 멘탈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시간이 필요했다.
도찬에게 남은 시간은 30분 남짓. 어느새 주어진 1시간에서 절반이나 사용해버렸다.
지금 만큼은 대국 속도를 올리기 위해 대국 소요시간을 대폭 줄인 연맹과 협회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온전히 대국에 집중하지 못하는 지금 30분의 시간을 온전히 사용한다고 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10분만 쓰자.’
정도찬은 바르게 잡은 자세를 풀고 조금 편한 자세로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 상태에서 눈을 감고 현 국면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때때로 실타래가 복잡하게 꼬였을 때는 그냥 잘라내는 것이 더 빠르고 깔끔할 수도 있는 법이다.
정도찬은 천천히, 이 대국의 첫수부터 지금까지의 수를 복기했다.
삼연성식 포석에서 시작되는 고풍스러워 보이는 바둑.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하윤서는 초반 국면에서 집요할 정도로 인공지능과는 동떨어진 수를 둔다.
마치, 0점짜리 시험지를 보는듯한 느낌.
대충 찍어도 0점이 나오기는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0점을 맞았을까?
답은 간단했다.
‘답을 다 알고 있으니까.’
답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정답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윤서가 인공지능의 영향을 받지 않아 신기하다고 생각했던가.
자신이 틀렸다. 하윤서는 정도찬이 지금까지 본 누구보다 인공지능에게 강한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인공지능을 죽이기 위해 원한과 집념으로 벼르고 벼른 날카로운 요도.
정도찬의 눈에 점점 하윤서가 숨기고 있던 무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정도찬의 마음속에 미묘한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돌이켜보면 정도찬 자신이 진심으로 인공지능을 이기려고 도전한 적이 있긴 하던가.
잠시 고민해보던 그는속으로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정도찬은 항상 인공지능에게 배우려고 했다.
인공지능을 닮고 싶어 했고, 인공지능을 따라 하려고 했다.
실제로 그 과정에서 정도찬의 바둑은 강해졌다, 그렇기에 자신의 길에 아무런 의문도 가지지 않았다.
아니, 이것도 핑계에 불과하다.
그저 인공지능을 이기겠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인공지능이 너무 강한 상대였던 탓이다.
정도찬은 지금까지 ‘감히’ 인공지능을 이기겠다는 생각을 품어본 적이 없다.
인공지능.
각 인공지능의 기력은 천차만별이지만, 최초이자 최고의 인공지능인 베타고는 16만 개의 기보를 바탕으로 초당 10만 개의 수를 읽으며 한 달에 100만 번의 대국을 학습한다.
사람의 속도로는 1000년이 걸리는 일을 단 한 달 만에 해내는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불가해의 영역에 있는 기계장치의 신.
하윤서는 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누구도 이기려고 한 적이 없는 상대를 진심으로 이기려고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존경심마저 느끼며, 정도찬은 자신의 안일함을 반성했다.
인공지능이라는 강철의 벽 앞에서 이건 어차피 넘을 수도, 부술 수도 없는 벽이라며 지레짐작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스스로가 한심했다.
문득 먼 옛날, 자신이 어렸을 적에, 그의 스승인 신창연에게 다섯 점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한점 더 깔고 두는 것을 요청했을 때 그의 스승이 매우 화내며 한 말이 생각났다.
‘앞으로 나아가다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나타난다면, 그 벽에 손톱자국이라도 내고 물러나야지!’
사실 그 말이 다른 전설적인 프로바둑기사가 한 말이었다는 것을 안 사실은 먼 훗날이었지만, 그 당시 그 말을 들은정도찬은 크게 감동하여 기꺼이 그의 스승을 할퀴었다.
‘그리고 엄청 혼났지.‘
잠시 과거의 일을 회상하자 기분이 좋아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인공지능을 무조건 따라 하려고 하는 것부터 잘못된 거였어.’
잘못된 길을 옳은 길이라고 믿고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이건 내가 선택한 길이었던가?’
정도찬은 자신이 인공지능을 맹신하게 된 이유를 떠올렸다.
‘인공지능에는 감정이 없으니까.’
그저 그게 부러워서 닮고 싶었을 뿐이다.
정도찬은 다시 한번 자신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니, 길은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무조건 인공지능을 배척하는 하윤서의 길은 너무 극단적이었다.
마찬가지로 무조건 인공지능만 따라 하는 정도찬의 길 역시 극단적이었다.
그 사이의 어딘가, 그곳에 길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민이 길어지자 근본적인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정도찬은 어떤 바둑을 두던 사람이지?’
그 순간 생각나는 것은, 입단 대회 결승의 마지막 대국.
한계에 다다른 체력과 정신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손이 가던 대로 둔 그 대국이었다.
“하나…. 둘…. 셋….”
어느새 30분이 지나가 버린 걸까?
계시원이 정도찬의 초읽기를 시작했다.
더는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인공지능에 얽매이지 말고 좀 더 자유롭게. 마음이 가는 곳으로, 손이 가는 곳으로.’
정도찬은 자세를 고쳐앉고 돌을 쥐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마음이 가는 곳에 수를 두기 시작했다.
천변만화.
마치 바둑의 무한함을 담은듯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풍.
천재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