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10국 - 상부상조(相扶相助)
“이야기 좀 하죠.”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한소율은 내 말을 듣더니 빙그레 웃었다.
“삼고초려도 할 짓은 못 되는 것 같아요. 매일 이게 무슨 고생인지.”
“연맹장님은 스스로가 유비라고 생각하세요? 안 어울리는데.”
“저도 도찬 씨가 제갈량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녀는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 말을 이었다.
“제갈량은 진 적이 없잖아요. 안 그래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이 인간은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데 천부적인 재주가 있었다.
“제갈량도 아닌 사람한테 왜 그렇게 공을 들여요?”
“난 제갈량은 필요 없어요, 정도찬이 필요하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은 거짓 한 점 없는 올곧은 눈이었다.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무슨 마음의 변화가 있어서 이야기하자고한 거예요?”
“연맹에 입단하겠습니다.”
“오.”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데 이 상태로는 입단 못 해요.”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게 줬다가 뺏는 건데요….”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으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이 상태로 입단하면 평생 다시 도전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나이도 벌써 스물다섯, 평범하게 프로기사 생활을 했다면 벌써 전성기가 꺾일 무렵이다.
기력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버둥을 쳐보고 싶다.
수정이가 누구에게서 바둑을 배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당하게 저는 정도찬 스승님에게 바둑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도록.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스승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그래, 내 스승님이 그랬던 것처럼.
내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한 한소율 연맹장은 이내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저 잘생기고 실력 좋은 바둑기사가 아니라 콘셉트 확실하고 스토리도 있는 스타 바둑기사예요.”
“그런 걸 원하시는거라면 평생 가지지 못하실 겁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입단도 없다. 그게 내 입장이었다.
“그래요, 그럼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있겠죠, 뭘 원하는 거예요?”
“저를 원한다면 저를 도와주세요, 내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게끔.”
“그 말은 내가 정말 원하는 물건을 내 손으로 망가뜨리라는 말로 들리는데요?”
“조금 망가졌을지언정 그물건은 가치가 있을 겁니다.”
“나 참, 뻔뻔하기는.”
그녀의 고민이 깊어졌다.
“왜 나죠?”
“모르겠어요, 그냥 지푸라기라도 잡는심정이라.”
내 말에 그녀는 미간을 찡그렸다.
“난 지푸라기가 아닌데.”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하아…. 좋아요, 최선을 다해 돕죠. 하지만 나도 조건이 있어요. 원래 거래라는 건 서로 원하는 걸 주고받는 거잖아요?”
저렇게까지 말하니까 뭔가…. 뭔가…. 불안한데.
“혹시, 해설자에는 관심 없어요?”
“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요, 그냥 대국 관전하면서 생각하는걸 입 밖으로 내뱉기만 하면 되는 것뿐이니까.”
“아니,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잖아요.”
지금 당장 전국의 해설자들한테 사과해.
“사실 도찬 씨의 해설 실력에는 관심 없어요, 난 그냥 ‘지금의’ 도찬 씨가 카메라 앞에 서면 만족이니까.”
그녀는 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때요? 딜?”
해설자라…. 사실 내가 그런 걸 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이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고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아질 것이라는 점이었다.
“딜.”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
한소율은 도찬의 대답을 듣자마자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바둑연맹 표준 해설자 계약서를 들고 와서 도찬의 계약을 진행하고,
도찬의 트라우마에 관해 상담할 유명한 정신과 의사와의 면담도 예약하고,
해설하러 올 때 입으라고 옷도 잔뜩 사서 보내고
심지어 정도찬이 밖으로 나돌게 되면서 비게 될 기원의 아르바이트생도 대신 구했다.
이러한 깔끔한 일 처리와 엄청난 행동력은 그녀가스물여덟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바둑연맹이라는 단체의 수장을 맡고도 아무런 잡음이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녀의 일 처리에 만족했으니까.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고
드디어 그녀가 고대하던 날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신입 해설자 정도찬입니다.”
그녀는 방송국 스태프들에게 인사하는 정도찬의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몸에 딱 맞는 치수의 수수한 정장은 오히려 도찬의 외모를 빛냈고,
단정하게 세팅한 헤어스타일과 반쯤 강제로 씌운 도수 없는 고급형 금테안경은 그의지적인 모습을 잘 부각해줬다.
평소에 대충 입고 다녀도 어디 가서든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는 도찬을 제대로 꾸미자 외모로 유명한 연예인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모습이 된 것이다.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소율의 작품이었으니 뿌듯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 다 키워놨더니 연예계로 홀랑 떠나버린 어떤 개자식과는 다르게 정도찬은 평생 바둑만 보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니까 기분이 더 좋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던 도찬은 불평했다.
“안경 정도는 벗어도되지 않아요?”
“그게 포인트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진짜 싫은데….”
“안경이 싫으면 귀라도 뚫을래요? 아니면 염색하고 붙임머리라도 붙여드릴까?”
“생각해보니까 안경이 정말 마음에 드네요. 안경 최고.”
왜 저렇게 자신을 꾸미는데 거부감을 보이는 걸까.
최고급 식재료로 라면을 끓여 먹는 사람이 미친놈 소리를 듣는 것처럼.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 꾸미지 않는 것이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한소율로서는 도찬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 작품이지만 상상 이상으로 잘생겼네.’
여기저기서 사고치고 다니던 연구생 시절에 팬덤이 생겼다고 해서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저 외모야말로 완벽한 개연성이었다.
웬만한 사람이 사고치고 다니면 문제아지만 저런 미남이 사고치고 다니면 한때의 일탈이자 ‘누나’ 들이 껌뻑 죽는 와일드한 매력인 법이다.
그 시기의 정도찬을 보지 못한 것에 조금 아쉬움을 느끼던 한소율은 정도찬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해설 준비는 어때요? 잘 했어요?”
“일단 해봐야 알 것 같은데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큰 대국도 아니고.”
프로바둑기사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대국 숫자도 전체적으로 증가했다.
당연히 TV 중계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전체 대국의 절반 이상을 무관중으로 진행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인터넷 방송으로 중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도찬이 해설을 맡게 된 대국 역시 연맹 초단들의 인터넷 방송으로 중계되는 대국이었다.
그런 도찬의 모습이 자신 없어 보였는지 오늘 도찬과 함께하게 된 파트너 해설자가 도찬을 격려했다.
“도찬 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도움 드리겠습니다!”
“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살짝 어설픈 한국어를 하는 이 활기찬 여자는 오늘 도찬과 함께 해설을 맡은 니시카와 나오미.
그녀는 일본에서 바둑을 공부하다 재능의 한계를 느끼고 아이돌이 하고 싶다며 한국으로 건너온 특이한 이력의 해설자였다.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아둔 돈만 들고 한국에 온 그녀는 놀랍게도 소규모의 기획사에서 아이돌로 데뷔하는 데 성공했지만 거기까지가 그녀의 행운이었다.
그녀가 데뷔한 걸그룹은 말 그대로 폭망,
결국, 소속사조차 반쯤 버린 그녀를 한소율이 바둑 두는 아이돌이라니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연맹에 대려온 것이다.
비록 바둑 실력은 기대에 못 미쳐 해설자로 전향시키긴 했지만, 오히려 그게 그녀의 적성에 맞았는지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오히려 잘 풀렸다고 해야 하나.
‘나오미가 분위기를 살리고, 정도찬이 제대로 된 해설을 붙인다, 합이 잘 맞는 미남 미녀 해설자 콤비, 이건 안 먹힐수가 없지.’
한소율은 둘의 성공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 초반 진행은 한소율이 가지고 있던 일말의 걱정을 날려버릴 정도로 매끄러웠다.
카메라에 익숙한 나오미가 도찬을 잘 리드해준 덕분이다.
처음 선보이는 미남 미녀 해설자 콤비의 등장에 채팅창의 반응도 좋았고 커뮤니티도 호평 일색, 시청자 역시 평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몰려들었다.
‘해설자로 데려온 게 오히려 이득이었지.’
한소율이 생각하기에 바둑 중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해설자였다.
바둑 중계는 대국자들의 집중력을 위해 이원생중계로 진행되고, 해설자들이 바둑판 보드로 국면의 설명을 하므로 시청자들은 바둑기사보다 해설자들을 훨씬 더 오래 보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이 상황에 그녀가 상상하지도 못한 폭탄의 도화선이 점점 타들어 가고 있었으니….
수준 이하의 대국을 보며 점점 불편해지는 도찬의 심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도찬은 하수들의 대국을 볼 일이 없었다.
그의 친구들은 협회의 좁은 문을 기어이 통과한 촉망받는재능을 가진 바둑기사들이었고, 그가 항상 두 점 접바둑으로 상대하는 인공지능인 랄라제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외에 그나마 보는 대국은 기원에서 보는 황금시간대의 대국이었는데,
고르고 골라 황금시간대에 방송하는 대국의 수준은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도찬이 본 대국 중에 가장 수준이 낮았던 건 수정이와 루아의 대국.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애들 싸움이었으니 도찬은 그 대국을 보면서도 별생각 없었다.
어쨌든 조금 다른 의미로 우물 밖에 나온 도찬은 연맹 초단들의 대국을 보며 컬쳐쇼크에 빠졌다.
‘이게…. 프로? 지금까지 내가 본 프로들은 대체?’
실착과 실착의 연속.
빤히 보이는 수를 계속 틀리니 도찬의 심기가 점점 불편해졌고.
결국, 흑이 도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수를 둔 순간 임계점에 도달했다.
“저는 이런 수는 상상도 못 했어요.”
“그렇군요, 역시 프로들은 대단하네요.어떤 점이 대단한지 잠시 설명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옆에 있던 나오미까지 헛소리하자 도찬의 이성이 끊어졌다.
도찬은 마른세수를 하려다가 자신이안경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경을 벗었다.
“이런 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도찬의 급발진에 나오미가 놀라든 말든 도찬은 말을 이었다.
“이 수로 이득을 본 걸 계산해보죠, 여기 백 돌 다섯 개를 사석으로 만들었는데 다섯의 배니까 열, 그리고 주변 세력을 고려하면 여기서 여기까지 하나, 둘, 셋, 넷, 다섯, 총 열다섯 집의 이득이란 말입니다.”
“네, 네에….”
“그런데 저 열다섯 집의 이득을 보는데 다섯 수나 사용했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한 수당 고작 세 집 이득을 봤다는 거예요!”
도찬은 대충 흑 돌을 집어 바둑판 화이트보드에 대충 던져서 붙였다.
“이렇게 대충 던져서 붙여도 열 집은 이득을 볼 수 있는 판국인데 지금 흑은 고작 세 집에 집착하고 있는 거라고요!”
재앙의 주둥아리의 봉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