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화 〉9국 - Daily (10/75)



〈 10화 〉9국 - Daily

오늘은 조금 기원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서울 외곽의 2층 건물, 1층은 기원이고 2층은 집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곳은 원래 스승님이 젊었을 적 친구들과  없이 바둑을 두기 위해 마련한 아지트였다.

스승님의 친구들을 잔뜩 초대해서 밤새도록 바둑을 두고, 피곤해지면 2층에서 자는 생활을 했다고….

처음 들었을 때는 인터넷 바둑을 내버려 두고 왜 굳이 그런 일을 하셨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스승님은 ‘너는 왜 남자의 로망을 모르냐’라며 오히려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셨다.

어쨌든 스승님이 바둑 보급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바둑 도장을 차린 이후 이곳은 먼지만 쌓이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내가 바둑을 포기할 때 즈음 40석 규모의 기원으로 리모델링 되었다.

그리고 스승님이 가끔 관리하다가 나한테 넘어왔고.

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냥 귀찮아서 맡긴 거 아닌가?

아니겠지?

어쨌든 입장료는 사람당 5천 원, 입장 후 3시간이 지난 후부터는 시간당 이천 원이라는 기원치고는 비싼 가격이었지만

리모델링 하면서 고오오오급지게 바뀐 인테리어와 널찍한 공간, 그리고 재영이가 자기 집에 상자째로 있다며 여기에 반쯤 버리고 가는 무한으로 제공되는 커피믹스 덕분에 손님들의 만족도는 높은 편이었다.

만족도가 높다 보니 단골들이 많아졌고, 덕분에 지금에 와서는 대부분 손님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요즘 또  명의 단골손님이 생겼으니….

“자리 남은  있나요?”
“없는데요?”
“그럼 저기 가서 앉을게요.”

아니 그냥 가라고….

기원 주소는  어떻게 알았는지 방송국에서의 만남 이후로 계속 기원을 찾아오고 있는 한소율 연맹장이 그 단골손님이었다.

지갑에서 5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은 한소율 연맹장은 적당한 자리에 앉아 바둑 공부를 시작했다.

그냥 와서 딴짓만 하면 내쫓을 텐데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니 내쫓기도 뭐하고

무엇보다 의외인 점은 한소율 연맹장은 거의 매일 이곳을 찾아오지만 단 한 번도 입단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나마 한산한 시간에 찾아와서 한두 시간 정도 공부하고 돌아가는데 좌석을 정리하러 가보면 바둑판 위에는 항상 그녀의 명함이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입단 같은 건 생각 없으니까 이런 짓 그만하라고 했지만 ‘어머, 실수로떨어뜨리고 갔나 보네요.’라고 말하며 뻔뻔하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대답하더라.

차라리 입단이니 띄우니 같은 헛소리를 했으면 쫓아냈을 텐데.

참 골치 아픈 여자다.

어쨌든 피해는 안 주니 적당히 무시하고  일을 하다 보면 수정이의 하교 시간이 다가온다.

기원에 들어와 나에게 인사한 수정이는 2층에 올라가 가방을 두고 내려와 일을 거든다.

심심해 보이는 손님이 있으면 다가가서 바둑 한판 상대해주고

어려운 문제로 고민하는 손님이 있으면 옆에서 가만히 구경하다가 힌트를 좀 주고

기보를 보며 복기를 하는 손님과 머리를 맞대고 수를 고민하기도 한다.

사실 말이 좋아 일을 거드는 거지 수정이에게는 그냥 놀이터에서 노는 거랑 다른 바 없는 일이다.

애초에 수정이가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내버려 두고 있는 거기도 하고.

그렇게 나 혼자  하는  힘들어 보인다며 기원의 일을 거들기 시작한 수정이는 한  만에 기원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가 되었다.

어린애가 착하고 예의도 바르고, 바둑도 잘 둔다.

이런 아이를 싫어할 만한 바둑쟁이는 없었다.

오후 한 시쯤이 되면 한소율 연맹장은 어김없이 바둑판에 명함을 ‘실수로 떨어뜨려 놓고’ 자리에서일어난다.

그리고 나는 자리를 정리하며 ‘손님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바빠진다.

슬슬 손님들이 몰려오는 시간인 것이다.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손님들은 이 시간쯤이 되면 다들 집으로 돌아가고 다른 손님들이 자리를 채운다.

사회부 기자면서 매일바둑 칼럼이나 쓰는 기원 죽돌이,

자기는  죽어도 협회의 바둑 프로가 되겠다며 매일 공부하는 바둑고학생,

자기보다 하수인 상대만 상대해서 푼돈이나 뜯어내는 내기 바둑꾼,

이곳에 오면 내 친구들을   있을까 기대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바둑 기사들의 대국을 복기하는 팬들.

 카운터에 앉아있다 보면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보인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들바둑을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확실히,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바둑을 두러 기원에 온다, 이런 광경은 연맹 출범 이전에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나를 매일 귀찮게 하지만 한소율  여자를 마냥 미워할 수는 없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조금씩 쇠퇴해가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바둑계에 활기를 불어 넣어줬으니까.

귀찮은 건 귀찮은 거지만 고마운  고마운 거다.

오후 5시,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시선을 기원 한쪽에 걸려있는 벽걸이 TV로 돌렸다.

바둑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면서 프로들의 대국 숫자가 전체적으로 많아졌지만, 그중에서도 팬들의 시선이 가는 진짜배기는 있는 법이다.

오후 5시에 시작해서 8시쯤에 끝나는 황금시간대의 대국들이 바로  진짜배기였다.

오후 5시 대국인데 왜 황금시간대냐고?

오후 5시에 대국을 시작하면 오후 6시쯤에는 중반부에 접어든다.

일반 회사원의 퇴근 시간에 방송을 켜면 대국에서 가장 재미있는 국면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물론 회사에서 몰래 관전하는 월급도둑도 있겠지만….

어쨌든 오늘의 황금시간대 대국은 신세연 협회 6단과 한채연 연맹 8단의 대국이었다.

눈에보이는 단급은 세연이가 낮았지만, 승단이 더럽게 힘든 협회의 특성을 고려하면 사실상 둘은 비슷한 실력이었다.

나는 속으로 세연이 이기기를 빌었다.

친구니까 응원하는 거냐고?

뭐…. 그런 이유도 있긴 한데 애초에 신세연은 비슷한 실력의 상대에게 지면 굉장히 분해한다.

그것만이라면 괜찮은데 분풀이를나한테 하니까….

혹시 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기원에 찾아와서 복기를 요구한다.

심지어 그 대국이 황금시간대 대국이어서 많은 사람이 보고 있었다?

그 날 제대로 잠 잘 생각은 안 하는 게 좋다.

제발…. 제발…. 이겨라.

TV 화면 속의 수순이 이어지고 기원의 손님들도 각자 자신 앞의 바둑판에 수순을 따라 둬 보면서 관전한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어? 이 수보다 이게 나은 거 아냐?’ 같은 말을하기 시작하면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

이 시점에서 지정 좌석은 의미를 잃는다.

두세 무리로 나뉘어서 이 수는 맞느니 틀리느니 말싸움하다 그나마  둔다는 사람들이 정리해서 나름의 결론을 내고,

다시 관전하다가 다시  시비가 붙고.

사실 저런 논란은 당장 인공지능을 켜서 확인하면 바로 답을 확인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그러면 대체 무슨 재미인가.

답지를 보면서 문제집을 푸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도 없는 법이다.

결국, 대국은 세연이의 패배로 끝났다.

오늘 잠은  잤다.

망할.

대국이 끝나면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기원을 나선다.

원래 영업시간은 오후 8시까지인데, 언제부터인가 황금시간대의 대국이 끝나면 기원 문을 닫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이 되었다.

빨리 끝나면 빨리 닫는 거고, 늦게 끝나면 늦게 닫는 거고.

대부분이 늦게 끝나긴 하지만 나도 한참 관전 중인 사람들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마지막 손님을 내보내고, 수정이와 함께 정리와 청소 등의 마감을 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신세연이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게 뻔하니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적당히 저녁밥을 해서 수정이와 함께 먹고 세연이 몫의 간단한 간식을 따로 만들었다.

분명 밥도  먹고 올 거니까 이거라도 챙겨 먹여야지.

수정이에게 오늘  대국들을 복기하고 자라고 말해두고 아까 만들어둔 간식을 들고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으로 내려오자 아니나 다를까 눈시울이 붉어진 세연이 바둑판 앞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 건물은 우리 아빠 거니까 여긴 내 집이기도 하다’

라는 논리로 예전에 강탈해간 여벌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온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세연이의 반대편에 앉아 돌을 쥐었다.

이 상태의 세연이와는 대화할 수가 없었다.

세연이는 화가 나면 극단적으로 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바둑쟁이 둘이 만났는데 입으로 이야기할 것까지도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밤이 새도록 수담(手談)을 나눴다.

새벽 4시.

드디어 만족할 만큼 복기를 한 것일까.

세연이는 고맙다고 말하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누가 보면 아주 자기네 집인 줄 알겠다.

사실 자기네집이 맞지만….

어휴…. 이게 바로 얹혀사는 사람의 서러움이다.

방은 많으니까…. 알아서 자겠지.

이렇게 하루가 끝났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원을 열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함께 프로기사들의 대국을 관전하고,
세연이와 복기를 하고.

원래라면 별 감상 없이 보냈을 평범한 하루였다.

오늘은 평소보다 힘들었다~ 라며 조금 불평하고 잠드는 그런 하루

하지만 요즘 따라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매끈한 감촉,

코팅된 종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방송국에서 받은 한소율 연맹장의 명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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