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화 〉8국 - 한소율 (9/75)



〈 9화 〉8국 - 한소율

내 인생에 또 이런 일이 있을까 싶은, 폭풍 같았던 하루가 지나가고.

나의 일상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정말 아름다운 날이었다.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이런 날엔….

“너만 없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이걸 갑자기 날 때린다고?”

나는 수정이와 함께 휘운이 운전하는 차에 타 있었다.

정휘운 협회 7단.

나와 함께 창연 바둑도장에서 동문수학 한 오랜 친구 중 한 명이었다.

사실 워낙 오래 알고 지내서 친구처럼 지내고 있긴 하지만 나보다 두 살 연상이기도 한  녀석은 협회 출신 프로치고는 드물게 방송일을 열심히 했다.

아무리 한국바둑연맹이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후로 인기 바둑기사가 연예인의 동의어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연맹 출신들의 이야기다.

보통 협회 출신들은 방송을 아주 싫어하는 편인데….

이 인간이 워낙 붙임성도 좋고 넉살이 좋아야지.

협회 연맹 가리지 않고 친목질을 하더니 어느 날부터 방송에 나오기 시작하더라.

이젠 아예 미튜브까지 하던데,

스승님은 아주 이러다가 드라마 영화 찍고 할리우드 스타 되겠다며 타박했지만, 딱히 말리시지는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제자들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스승이셨으니까.

그런데  인간은 스승님이 보자 보자 하니까 기어이 가만히 있던 재영이까지끌어들이더라.

덕분에 요즘 재영이도 간간이 방송에 출연하는 꼴을 보시고는 스승님이 뒷목을 잡으며 몽둥이를 찾으셨다고 하는데….

그 뒤의 이야기는 나도 못 들었다.

뭐, 아직 살아있는  보면 별일 없었나 보지.

신세연? 그 애는 입단 전부터 스타였으니 말할 것도 없다.

전에 말했듯 그 애는 그냥 신이 바둑계에 내려준 스타니까.

“야 그래도 이 형님 덕분에 방송국도 가보고 좋지 않냐?”
“지랄 멈춰~!”

재영이로도 모자랐는지 이 인간은 항상 나에게도 마수를 뻗어오고는했다.

원래는 그때마다 나 같은 일반인을  그런 데를 데려가려고 하냐면서 거절했는데

이제 이야기가 좀 바뀌었다.

“아저씨 앞 보세요.”
“난 아저씨가 아니야약!!”

인기 바둑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수정이에게 좋은 기회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 조기 교육이 인기라던데 나도 한번 해 봐야지.

“수정아 이 오빠는 이제 스물일곱이에요~”
“스물일곱이면 아저씨지 추하게 왜 그러냐.”
“그럼 니도 2년 후에 아저씨임?”
“생각해보니까 스물일곱이면 오빠 맞네.”

서른까지는 오빠지.

수정이의 시선이 따가웠다.

미안해 이 스승님은 아직 오빠로 남고 싶어.

“그런데 무슨 프로그램이길래 나 같은 일반인을 데려가는 거야?”
“나 홀로 산다.”
“......?”
“아 참고로 지금 차 안에 카메라 달려있음.”
“그걸 먼저 이야기했어야지 등신아!”

빨간 신호에 걸려 잠시 차를 멈춘 휘운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미리 말하면 리얼리티가 안 살잖냐 리얼리티가.”
“미친놈인가.”
“욕 너무 많이 하면 통편집임.”
“정신나갈것같아….”

지금까지 별 생각 없이 하던 말이 방송에 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졌다.

“그런데 방송국 간다고 하지 않았냐?”
“좀 있다 스케쥴 있어서 방송국은 갈 거임 난 거짓말한 적 없음.”
“어휴….”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단순 견학보다는 직접 출연해보는 것이 수정이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그래도 딱 한 대만 때리고 싶다!

미리  정도는 해줬어야지 화상이.

“그래서 내가  하면 되는데?”
“그냥 우리 집에서 바둑 몇 판 두다가 방송국 갈 시간 되면 같이 가서 견학하면 됨.”
“생각보다 간단하네.”
“그럼 내가 일반인한테 웃기라고 강요라도 하겠냐?”

솔직히 말하면 그럴 줄 알았다.

닥치고 있어야지.

“이제 진지한 모습을 보여줄 타이밍이라고 하더라고. 맨날 주접떠는 인간이 진지한 모습 보여주면 차이 때문에 팬이 좋아한다네.”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듣고 다니는 거야?”
“한소율 연맹장.”
“......?”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람의 이름이 나와서 말문이 턱 막혔다.

한소율 한국바둑 연맹장.

 사람에 대한 바둑계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었다.

일단 이 사람이 바둑협회와의 첫 면담 당시  말을 보자.

‘어차피 현행 바둑리그들은 인공지능에 밀린 2군 싸움 아닌가요?’

‘실력이 안 되면 다른 요소로 어필해야죠’

‘프로의 문턱이 쓸데없이 높을 필요는 없습니다.’

‘젊고 멋지고 예쁜 프로바둑기사들이 필요합니다.’

‘얼빠는 팬 아닌가요?’

 마디 한 마디가 정신이 어질어질해지는 폭언이었다.

원래 한소율을 바둑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팅이었지만. 첫 만남에 한 말이 저런 말들이었으니 협회의 늙은이들이 ‘사문난적이다!!!’ 라며 뒷목을 잡는 건 당연한 순서였지.

문제는 그녀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것이다.

발언의 수위가 강했을지언정 그녀의 발언 본질은 바둑계의 문제점을 꿰뚫고 있었다.

바둑을 즐기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바둑팬 역시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인공지능과의 대결에서 진 이후 달라진 여러 환경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충분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바둑 보급을 포기하지 않던 프로들이 한소율을 지지하고 나섰다.

극약이지만 먹지 않아 죽는 것보다는 일단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는 프로들이 합류했다.

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결국 연맹은 바둑 엔터테인먼트의 기치를 내걸고 출범했고.

낮아진 프로의 문턱 덕분에 바둑을 포기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연맹의 프로로서 입단하기 시작하며 갈등이 일시적으로 봉합되었다.

어째서 갈등이 멈춘 거냐고?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바둑을 포기했었지만, 연맹의 출범 덕분에 입단하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협회 소속 프로기사들의 제자였으니까….

원래 제자 사랑이 나라 사랑인 법이다.

협회와 연맹은 지금도 서로 싫어하는 티는 팍팍 내지만 서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협회는 연맹이 바둑계에 끌어오는 인기가 필요했고

연맹은 협회의 권위와 전통, 그리고 실력이 필요했다.

서로서로 지탱하는 미묘한 공생 관계가된 것이다.

내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휘운이 물어왔다.

“왜, 너도 그 여자 싫어하냐?”
“아니, 난 별생각 없어.”

애초에 난 프로바둑기사도 아니니 한소율 연맹장과 만날 일은 없을 거다.

----------*---------

일정은 예정대로였다.

우리는 일단 휘운의 집에서 3시간 정도 바둑공부를 했다.

괜찮은 그림을 건진 것 같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녀석을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사방이 카메라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죽빵마렵네.

나중에…. 나중에 갚아주자.

그나저나 이렇게 오래 촬영해도 실제 방송에는 3분 정도 나가면 다행이라는데.

3시간이 3분이 되다니, 참 그쪽 세계도 힘들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슬슬 방송국으로 출발할 시간이 되어 휘운의 차를 타고 방송국에 와서 견학한다….

여기까지는 예정대로였다.

“저기…. 혹시 바둑에 관심 있으세요?”

라고 수줍게 말하며 나에게 명함을 건네는 이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잠시 재영이에게 수정이를 맡겨두고 화장실에 오는 길에 이 사람을 만날 줄이야.

커리어우먼 이라는 단어를 의인화하면 이런 모습일까.

몸에 딱 맞는 치수의 정장, 거슬렸던 건지 대충 아무렇게나 묶어 조금 흐트러진 포니테일

틀림없다 이 사람은….

한소율 한국바둑 연맹장.

TV나 신문에서 보던 항상 당당해 보이던 커리어우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수줍은 모습을보이는 그녀를 보며 난 혼란에 빠졌다.

‘뭐지 쌍둥이인가?’

혼란에 빠진 내가 그저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저…. 그게…. 혹시 뭐 하시는 분이신지….”
“아, 저는 그냥 작은 기원 하나 하고 있습니다.”

 말을 들은 순간 한소율 연맹장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수줍다는  배배 꼬던 몸은 올곧아졌고 부끄럽다는  얼굴을 물들이던 홍조는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개신기하네

어떻게 사람 분위기가 저렇게 확확 바뀌지.

“뭐야, 업계인 이였어요? 괜히 힘 뺐네, 그럼  알죠?”
“네, 아는데요.”
“프로바둑기사 할 생각 있어요?”
“없어요.”
“거 참, 고민이라도 좀 해보시지.”
“그 고민을 10년 동안했거든요.”
“흐음….”

그녀는 팔짱을 낀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씨익 미소지었다.

“당신이 정도찬이구나?”
“......?”

어떻게 알았지?

“20대, 바둑 경력 10년 이상, 기원 사장, 잘생김. 이런 사람이 둘이나 있겠어요? 애초에 한 명 더 있었으면 진작 연맹으로 캐스팅해서 입단시켰지.”

마치 날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이었다.

아무리 내가 유명한 스승님 아래에서 오래 있었다고 해도 결국 입단조차 못  기원 사장이다.

연맹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나를 알고 있는 이유가 뭘까.

“난 내 앞에서  굴리는 거 안 좋아해요. 정도찬 씨,  그냥 도찬 씨라고 부를게요. 이상하게 나는 성하고 이름 같이 부르면 거리감 느껴지더라.”

좀 거리를  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도찬 씨, 당신 당신이 생각하는것보다 유명해요. 나름대로 팬층도 있고.”
“제가요?”
“음…. 뭐랄까. 아직 데뷔 안 한 연습생한테도 팬이 있잖아요? 대충 그런 느낌.”
“프로바둑기사가 연예인입니까?”
“다를 건 뭐죠? 아예 우리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연예인으로 데뷔해버리는 사람도있는 판에. 아 다시 생각하니까 아깝네…. 열심히 키워놨더니 홀랑 가버리고.”

나는 그 모습에 조금 위화감을 느꼈다.

캐스팅, 연습생, 키운다, 우리 소속, 데뷔.

그래 마치 이 사람의 모습은.

“연맹장님은 마치 연예 기획사 사장처럼 행동하네요.”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래서 바둑 두는 사람을 좋아한다니까?”
“왜요?”
“다들 머리가 좋아서 그런가, 말이  통하거든요.”

그녀는 그때까지 들고 있던 명함을 내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한 번쯤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네요. 그럼 난 바빠서 이만….”
“잠깐만요.”
“난 질척이는 남자 싫어하는데….”
“저도 미ㅊ, 이상한 여자는 싫어요.”
“흐흫, 생각보다 유머 감각이 있으시네요.”
“......?”
“......?”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한소율 연맹장의 명함을 꺼내 다시 건넸다.

“저는 어릴  생긴 트라우마 때문에 누구와 대국을 해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가져가세요.”

내 말을 들은 한소율 연맹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뭐야 그거, 방금 생각해낸 설정이에요? 좋은데?”

진짜 한 대 치고 싶네.

“설정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나중에 휘운이한테 물어봐요.”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입을 열었다.

“...... 오히려좋아.”

나는 드디어 재영이가 이 여자를 두고  말에 공감할  있게 되었다.

미친 여자 중에 가장 예쁜 여자.

처음에 들었을 땐 그저 웃어넘겼지만, 그 말보다  여자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으리라.

“얼굴 잘생겼어, 실력도 좋아, 콘셉트도 확실해, 스토리도 좋아. 연구생 시절부터 팬이 붙은 이유가 있었네”
“네?”
“하긴, 상처 입은 맹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영문 모를 말은 이제 됐습니다, 이 명함 가져가세요.”
“누구도 못 이긴다고 하셨죠? 내가 고작 그거 하나 때문에 당신을  띄울 것 같아요?”
“고작? 지금 고작이라고 하셨습니까?”
“아, 미안해요. 너무 쉽게 말했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나름의 사과 표시인 듯했다.

“난 어려운 걸 요구할 생각은 없어요. 도찬 씨는 지금까지 하던 대로만 하면 돼요.”

그녀는 다시 나에게서 떨어지며 말했다.

“생각 바뀌면 연락해요!”

그렇게 그녀는 떠나갔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태풍이 지나간 느낌이었다.

내 손에는 아직 한소율 연맹장의 명함이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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