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화 〉5국 - 평수상봉(萍水相逢) (6/75)



〈 6화 〉5국 - 평수상봉(萍水相逢)

기원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한세빛 연맹 9단이 헤어지기 전에 한 말을 곱씹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길을 걸을 때, 뒤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는 사람을 조급하게 만드는 법입니다. 하물며 그게 뛰는 소리라면 사람을 미치게 하겠죠.’
‘흔들리지 마세요.’

사실 지금도 수정이와 지도대국을 둘 때마다 지고 있긴하지만.

언젠가, 수정이가 나를 뛰어넘어 내가 진짜로 지는 날이 찾아온다면 나는 무슨 기분일까.

아직은 조금 먼 일로 느껴져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슬쩍 곁눈질로 수정이가 뭘 하나 살펴보니 바둑 미튜브에 빠져있는 듯했다.

-여기에 두는 순간  승률이 38퍼센트에서 53퍼센트로 떡상하는거 보여? 승률이 복사가 된다니까?

-그러니까 이건 사실 창하오 9단이 대처를 잘못한 거고 묘수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는 거지.

-그런데 사실 이 수보다 중요한 건 정금감 9단이 다음에 둔 수가……

이창한 협회 9단의 전성기 시절 묘수들을 인공지능은어떻게 판단하는지 설명해주는 콘텐츠였는데 꽤 들을 만했다.

요즘 저런 콘텐츠들이 인기라는데, 연맹의 출범 이후로 유입된 라이트 팬들의 입맛에 딱 떨어지는 콘텐츠라서 다시금 인기를 끌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저런 걸 볼 때마다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드는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어릴 적 책을 보면서, 혹은 대국을 보면서 감탄한 묘수들을  인공지능은 가차 없이 말한다.

‘그 수는 묘수가 아닌데?’
‘이건 오히려 이상한 수야’
‘상대방이 실수한 거지여기 보여? 여기 뒀으면 오히려 역으로 당했다니까?’
‘이게 신의 한 수라고? 이건 그냥 꼼수야 바보들아!’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기계장치의  앞에서 기사들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추억과 동경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다.

‘그때는 정말 바둑계가 망하는  알았지’

실제로도 숨이 간당간당했다.

연맹이 출범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바둑계는 조금씩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기원에 도착해 있었다.

‘뭐지?’

기원 앞에 이상한 검은 인영이 보였다.

그런데 좀… 많이 작았다.

뭐지 헛것인가?

“스승님, 저기……”

수정이도 같은 것을 본 것 같으니 헛것은 아닌 것 같은데.

이런 기원에 도둑이 들 리도 없고 저렇게  앞에서 얌전히 있는 도둑이 있을 리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도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인영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누구세요?”

다리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검은 인영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수정이 또래의 어린아이였다.

“늦어!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갑자기 고음이 귀에 파고들어 깜짝 놀랐다.

아니 근데 얘는 누구길래 남의 집 앞에서 이러는 거야?

“그… 누구니? 혹시 길을 잃은 거면부모님께 연락해줄까?”

“누굴 미아 취급하는 거야! 나는 내 사매가  아이를 보러  거라고!”

아니 그러니까 네가 누구느냐고…

말이 헛도는 게 살짝 답답했다.

내가 수정이만 보고 착각하고 있는 건가? 원래  나이대 애들은 다 이런 건가?

나는 답답함을 삼키며 같은 질문을 세 번째로 던졌다.

“그러니까 네가 누구냐니까?”

“너도 바둑을 두는 사람이면서 날 모르는 거야?”

꽤나 자의식 과잉의 꼬맹이인 듯했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가 움직이며 조명의 감지 센서가 작동한  주변이 밝아지고 나는 그제야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웨이브 진 갈색 머리. 대찬 성격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 한껏 치켜뜬 눈매.

나이는 역시 아까 예상했던 대로 수정이 또래로 보였다.

“난 한국에서 바둑을 가장잘 두는 사람의 제자, 이루아야.”
“……?”

한국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사람?

그건 국수잖아?

그러고 보니까 아까 이야기할 때 제자를 받았다고 했었지.

나는 설마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혹시 한세빛 국수님의 제자니?”
“그렇다고 말했잖아!”
“어휴……”

미치겠네.

나한테 아무런 연락이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분명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온 것이다.

애가 사라졌다고 발칵 뒤집혔을 저쪽을 생각하니벌써 골치가 아파져 왔다.

하지만 내가 골치가 아프든지 말든지 이루아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는  말을 이었다.

“잠깐 사매 얼굴만 보고 가려고 왔는데 당신 때문에 늦었잖아!”
“그게 왜 나 때문… 아니다, 국수님한테 연락할테니까 기다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아까 받아둔 한세빛 연맹 9단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아까 번호를 받아둬서 다행이다 정말.

“잠깐!”
“왜 그러니?”
“저… 그게…”

당당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루아의 눈에는 어느 세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고 있었다.

“스승님… 많이 화낼 텐데… 혼날 것 같은데… 히잉…”

애도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자각은 하는 듯했다.

“혼날  알면서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온 거야?”
“아침에는 일해야 하니까… 방해되잖아…”

알고 보니 손해를 끼치기 싫어 휴대전화로 기원을 검색해보고 영업시간이 끝난 후에 찾아온 모양이다.

잠깐 와서 수정이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내가 수정이랑 도장에 가버려서 일이 꼬인 것이다.

한세빛 연맹 9단이 어딜 같이 가자고  것을 거절하고 잠시 자리를비웠을  몰래 나왔다고 하는데

아이러니한 건 그 시각 나와 수정이는 한세빛 연맹 9단을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냥 따라나왔으면 이렇게 꼬일 일도 없었을 텐데.

어쩜 이리 운이 나쁠 수가 있을까.

어휴…

어쨌든 울락 말락 하는 아이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세 수정이는 이루아에게 다가가서 울지 말라며 토닥여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대견하긴 한데,원래 울고 싶은 사람한테 울지 말라고 하면  우는 법이다.

“알았어, 국수님한테는 내가 잘 말해볼게.”
“훌쩍, 정말?”
“그래, 그러니까 일단 들어가자.”

걱정이 조금 가셨는지 이루아는 수정이가 건넨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았다.

아 저거 손빨래해야 하는데.

빨래거리가 늘었다. 귀찮아라……

----------*----------

정도찬은 이루아와 김수정을  방에 밀어 넣고 한세빛 연맹 9단에게 연락을 위해 나가버렸다.

덕분에 방 안에는 루아와 수정 둘만 남게 되었고 당연히 둘 사이에는 미묘한 어색함이 감돌았다.

먼저 말문을 튼 건 이루아였다.

“네가 김수정이니?”
“응 맞아, 너는 이루아 맞지?”
“맞아, 그런데 너는 이제 내 사매가  거니까 날 이루아라고 부르면 안 돼.”
“그런데 사매가 뭐야?”
“같은 스승님을 모신 사람 중에 늦게 들어온 사람이래.”
“그럼 난 사매가 아니야. 내 스승님은 정도찬…”

도찬을 항상 스승님이라고만 부르던 수정은 도찬의 이름 뒤에 붙일 수식어를 한참 고민했다.

오빠는… 나이가 너무 많이 차이 나니까 어색했다.

단급을 붙이자니 도찬은 프로바둑기사가 아니라 붙일만한 단급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정도찬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예의가 없어 보였다.

“… 아저씨야.”

결국 수정은 가장 무난해 보이는 아저씨를 골랐다.

도찬이 알면 난 스물다섯이야! 아저씨가 아니라고! 라며 질색을 했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수정의 생각에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오빠, 자기보다 나이가 엄청나게 많은 사람은 아저씨인걸.

“이상하네, 우리 스승님이 네가 제자로 들어올 수도 있다고 한걸?”
“난 그런 말  들었는데…”
“아직 말 안 한 거겠지. 좀 더 기뻐하라고 한국에서제일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우리를 인정한 거니까.”
“난 싫은데…”

수정은 충분히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기원은 학교에서 가까워서 등교하기도 좋고, 기원의 손님들은 그녀를 예뻐해 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정도찬이라는 스승이 좋았다.

그녀의 스승은 포석 공부를 제외하면 무언가를 강제하지 않았다, 하루에 무슨 문제를 몇  풀어라, 대국을 번 하고 기보를 쓴 것을 가져와라. 이런 식의 교육은 전혀 없었다.

그저 비슷한 수준의 상대와 바둑을 두게 하고, 이겼으면 왜 이겼는지 졌으면 왜 졌는지를 고민하라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정도찬의 이러한 교육 방식이 그녀에게 딱 맞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자신의 실력이 그것을 증명하기도 했고.

반대로 루아는 그런 수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한세빛 연맹 9단은 무려 나라를 대표하는 바둑기사, 국수이다.

그런 사람이 제자로 받아주겠다는데 왜 싫다는 거지?

그녀는 한세빛 연맹 9단이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승낙했을 때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다.

다른 사람들은 어린 꼬맹이가 아버지를 잘 둔 덕분에 국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헐뜯기도 했지만.

루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비록 그녀에게 기회를 준  아빠의 인맥일지 몰라도, 한세빛 연맹 9단에게 선택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재능을 가지고 노력해왔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렵게 얻은 것을, 눈앞의 소녀는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두 소녀는 서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념의 대립.

시빌 워.

자존심 강한 두 소녀의 긴 전쟁의 시작이었다.

“우리 스승님은 매일 TV에 나와! 팬도 엄~청 많아!”
“그게 뭐? 우리 스승님은너~무 잘생겨서 매일 기원이 꽉 찰 정도로 손님이 온다고!”

루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

짜증나지만 정도찬이 잘생긴 건 그녀도 내심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우리 스승님은 한국에서 바둑을 제일 잘 두거든!”

이번에는 수정의 말문이 막혔다.

 치사한 년이 치트키를!

“그, 그래도 우리 스승님은 인공지능이랑 두  접바둑으로 반집 승부를 하셔!”

도찬이 들었다면 내가? 언제? 라며 되물을 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반 집 승부를 한다는 것이 수정의 과장이라고 해도 루아가  길은 없었다.

루아는 도찬의 예상외로 뛰어난 실력에 흠칫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봤자 그 사람은 그냥 기원 사장이잖아!”
“뭐라고?  다했어?”

두 아이의 말싸움은 그 나이 또래 어린아이들의 말싸움 결말이 항상 그렇듯, 말싸움은 점점 유치해져 갔다.

그리고…

‘미치겠네……’


국수의 제자라면 수정의 좋은 인맥이  것으로생각해서 방 안에 들어가지 않고 몰래 두 아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도찬의 속이 타들어 갔다.


만남의 밤이 점점 깊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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