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6국 - 라이벌
시간을 조금 뒤로 돌려서.
방에서 나온 나는 바로 한세빛 연맹 9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쪽도 걱정하고 있을 게 분명하니이루아가 여기 있다는 걸 최대한 빨리 알려줘야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전화는 계속 통화 중이었다.
아마 저 쪽도 이루아가 없어진 걸 알고 갔을만한 곳에 전화를 돌리고 있는 거겠지.
‘루아를 데리고 있습니다.”
나는 메시지를 하나 보내놓았다. 메시지 확인하면 전화 주시겠지 뭐.
역시 내 예상대로 얼마 있지 않아 단조로운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보세요?”
-당신 누굽니까.
“네?”
아까 만났을 때 들은 온화한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아니 루아를 데리고 있다고 메시지를 보낸 것뿐인데 왜 이러시지?
몬가… 몬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을 수습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뇨, 국수님 저 정도찬입니다.”
-도찬 군? 아, 그러고 보니까 번호 저장하는 걸 잊었네요. 미안해요루아가 사라졌다는 연락이 와서 정신이 없었어요.
그제야한세빛 연맹 9단의 날 선 반응이 이해가 갔다.
그야 모르는 번호로 ‘아이를 데리고 있습니다’ 같은 메시지가 오면 경계하겠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일단 루아는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수정이가 국수님 제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저희 기원에 찾아왔더라고요.”
내 말을 듣자 한세빛 연맹 9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말 고마워요.
“일단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여기서 재우고 내일 제가 데려다 주겠습니다.”
-정말 괜찮겠어요?
“네 하루 정도는 상관없습니다.”
-정말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역시 저쪽도 발칵 뒤집혀서 백방으로 이루아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나저나 이왕 루아가 하루 자고 가게 된 거 둘이 좀 친해졌으면 좋으련만.
오늘은 여기서 재우고 내일 대려다 준다고 한 것은 수정이 에게도 인맥이 생겼으면 해서였다.
암 인맥은 중대사지…
나만 봐도 스승님 인맥으로 밥벌이는 해먹고 살지 않는가?
그리고 원래 인맥은 어릴 때 만든 인맥이 최고인 법이다.
내가 해봐서 안다.
둘은 둘이 나이대도 비슷하고, 바둑 입문 시기도 비슷하니 좋은 친구가 되겠지.
라고 생각한 적이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야! 이 바보야!”
“너가 더 바보야!”
“응~ 너가 더 바보야~”
“응~ 너가 진짜 바보야~”
정신나갈것같애….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어쩌다가 싸우게 된 것 같다.
그래, 그래도 바보 정도로 끝나는 게 어디냐…
요즘은 초등학생들이 욕을 더 잘한다던데. 저 정도면 그냥 친해지는 과정이지.
어디서 행복회로가 타는 냄새가 나지만 착각이다.
일단 나는 저 상황을 수습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문에서 조금 떨어져 일부러 발걸음 소리를 크게 내며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을 준 뒤 문을 열었다.
둘은 언제 싸웠느냐는 서로 떨어져서 얌전히 앉아있었다.
이왕 안 싸울 척할 거면 서로 노려보는 것도 그만둬 줬으면 좋겠는데…
둘 사이에 생각보다 불편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 상황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지.
“우리 자기 전에 바둑이나 둘까?”
“네!”
수정이 기다렸다는듯 바로 대답했고 루아는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루아도 같이 바둑 둘레?”
“그 그게, 두고 싶긴 한데…”
“그럼 잘 됐네, 둘이 같이 두면 되겠다.”
수정이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물어왔다.
“다면기 말씀하시는 거에요?”
“아니 너희 둘이 두라는 건데?”
이왕 싸울 거 바둑으로 싸우라고.
라는 뒷말은 필사적으로 삼켰다.
수정이와 루아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게 만화였으면 저 사이에서 스파크가 튀지 않았을까?
둘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옳게 된 바둑쟁이는 이런거지
나는 속으로 웃으며 바둑판과 바둑돌을 세팅했다.
원래 어릴 때는 다 싸우면서 크는 거다.
프로바둑기사를 노리는 아이들이라면 바둑으로 싸우는 거고.
내가 어릴 때 해봐서 다 안다.
“그런데 스승님, 누가 흑이고 누가 백이에요?”
“엥?”
내가 아직 수정이에게 돌가리기를 안 가르쳐 줬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안 가르쳐 줬던 것같기도 하고.
아니 그런데 기원에서 그렇게 대국을 많이 해봤는데 돌가리기를 한 번도 안 해봤다고?
이게 말이 되나?
아무래도 우리 기원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바둑을 설렁설렁 두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바둑을 둔 것 같았다.
수정이와 마주앉은 루아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쉽게 말하면 홀짝으로 흑백을 가리는 거야, 넌어떻게 된 애가 그것도 모르니?”
“모, 모를 수도 있지!”
빌미를 주니까 그새 싸우고 있다.
애들 앞에서 한숨 쉬면 안 좋다는데 계속 한숨이 나오려고 한다.
“돌 가리기는 백이 돌을 한 움큼 쥐어서 바둑판 위에 올려놓으면 흑이 홀 짝을 맞추는 거야.”
나는 예시를 들기 위해 백돌 한 움큼과 흑돌 하나를 바둑판 위에올려놓았다.
“이 상황에는 백 돌이 16개고흑돌이 1개니까 흑이 홀짝을 못 맞췄지? 이 경우에는 흑돌을 올린 쪽이 백을 잡게 되는 거야 이해됐어?”
“네 이해했어요!”
사실 이건 한국과 일본의 규칙이고, 중국에서는 홀 짝을 맞추는 데 성공했다면 어떤 돌을 잡을지 선택권을 가지게 된다.
운도 실력이라는 것일까?
한국과 일본은 규칙이 거의 비슷한데 중국에는 참 묘한 규칙이 많았다.
루아는 백 돌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더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돌가리기도 모르는 초보인데 선택권 정도는 너한테 줄게”
그렇게 말한 루아는 바둑통 안에서 백돌 두 개를 꺼내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너가 백 돌을 잡든 흑돌을 잡든 내가 이길 테니까.”
‘애가 영악한 구석이 있네’
도발을 위한 행동이었다면 정말 훌륭한 도발이었다.
타악-
“필요 없어! 너가 흑 해!”
그 말을 들은 수정이가 이를 악물고 흑돌 하나를 바둑판 위에 올려놨으니까.
흑 이루아 백 김수정 호선 덤 6집 반
제한시간 무제한.
두 사람의 첫 대국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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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아는 눈앞의 꼬맹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승님이 제자로 받을 수도 있다고 하길래 짜증 나지만 그래도 실력은 좀 있는 꼬맹이인 줄 알았는데 돌가리기도 모르는 초보라니.
하지만 손대중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아주 박살을 내야 속이 풀릴 것 같았으니까!
대국 초반, 우세는 확실히 이루아에게 있었다.
이제 겨우 바둑에 입문한 지 6주 정도밖에 되지 않는 수정에 비하면 1년 먼저 입문한 그녀의 기본기가 더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 대국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도찬은 살짝 감탄했다.
‘확실히 한세빛 국수의 느낌이 전혀 없네.’
그가 대면한 한세빛 국수는 차분한 성격의 사람이었지만, 사실 반상 위의 그는 타협을 모르는 싸움꾼이었다.
한세빛 연맹 9단은 자신의 세력권에 들어오는 상대방의 돌을 그냥 두지 않는다.
살짝 찔러보면 매우 화내고, 깊게 침투하면 바로 응징한다.
그것보다 더 깊게 들어온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전투가 시작된다.
그래서 한세빛 연맹 9단과의 대국을 경험한 바둑 기사들은 말하고는 한다.
‘그와 대국을 하면매 국면이 사활이다.’ 라고.
하지만 그의 제자인 이루아는 스승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대국을 구경하던 도찬은 그녀의 성향을 단어 두 개로 정리했다.
‘두터움, 정밀함.’
대국 초반이 진행되는 내내 루아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좋아, 여기까지는 양보해 줄게 대신 여기는 내 거야!!’
그에 수정이 강력히 반발하며 대답한다.
‘시끄러우니까 이것도 내놔’
그 대국을 관전하고 있던 도찬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찬의 제자인 수정은 한세빛 국수의 기풍을 닮아있었고,
반대로 한세빛 국수의 제자인 루아는 도찬의 기풍을 닮아있었던 것이다.
도찬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대국은 중반전에 접어들었다.
루아는 드디어 만족할 만한 세력을 구축한 건지 지금까지 당한 것을되갚아 주겠다는 듯 수정의 세력권에 침투했다.
수정 역시 그것을 반겼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기다리고 있던 듯했다.
중원에서 시작된 전투는 마치 불이 번지듯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제대로 전쟁을 시작하면서지금까지 적당히 타협하며 금을 그어둔 국경이 전혀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뭐지 세계 3차 대전인가.’
반상 위의 전쟁이 점점 격렬해졌다.
여러 곳에서 동시에 전투가 벌어지며 국면이 점점 복잡해졌다.
이런 국면이면 조금이라도 더 수읽기가 빠르고 가치판단이 정확한 쪽이 유리하다.
그래.
반격의 시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