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4국 - 스승들
현세대 국수(國手)인 한세빛 연맹 9단을 키워낸 이철윤 전 프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아니라 우리 집 개가 가르쳤어도 그 아이는 국수가 되었을 거다’
사람들은 그저 이철윤 전프로가 겸양의 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의 겸손함을 찬양했다.
하지만… 비슷한 처지가 되어 보니 이철윤 전 프로가 어째서 그런 자조 섞인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수정이의 성장 폭이 상상 이상이다.
흔히들 바둑을 반상 위의 전쟁이라고 표현하는데, 바둑이 전쟁이라면 포석은 진지 구축이다.
상대보다 뛰어난 진지를 구축하고 높은 성을 쌓아 상대보다 유리한 국면에서 싸우는 것.
이것이 포석을 공부하는 이유였고, 내가 포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이다.
내가 처음 상대한 수정이는 포석이라는 개념이 거의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그저 처음에 바둑돌을 놓는 곳은 중원보다 변이 좋다, 변보다 귀가 좋다. 그 정도의 인식을 하고 두고 있었다.
전쟁으로 치면 진지도, 목책도, 성벽도, 전략도 없이 그저 공격, 공격만을 외칠 뿐이었던 거다.
물론 수정이의 타고난 감각과 공격성은 저돌맹진(猪突猛進)하는 것만으로상대 지휘관의 목에 칼을 들이밀 수 있게끔 하였지만, 이는 오히려 수정이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힘 싸움만으로도 이기는데 과연 포석이 필요한 것인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끔 하였으니까.
요즘도 포석 공부는 엄청나게 싫어하더라…
그래도 이게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것들이니 포석은 지루하다는 티를 팍 팍 내고 있는 수정이에게 제갈량이 눈물을 머금고 마속을 참한 심정으로 반쯤 강제로 포석을 주입하게 시키고 있었는데. 이것 만으로 수정이의 바둑의 결이 바뀌었다.
돌진만을 외치던 맹장이 겉핥기식으로나마 육도삼략을 배운 것이다.
적토를 얻은 여포의 파괴력이 이런 것이었을까?
일주일 전에는 여섯 점을 깔았는데, 이제 다섯 점을 깔아도 반집 승부이다.
문제는 수정이가 이렇게까지 성장하면서 내가 해 준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수정이에게 해주는 것은 반쯤 강제로 시키는 인공지능 포석 공부와 다양한 바둑을 경험시켜주는 것 그리고 지도 대국 정도인데, 이는 내가 아닌 누가 와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수정이가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어가는데 스승님은 무슨 생각인 걸까.
스승님의 인맥과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아직 수정이의 스승을 찾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스승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는 오랜만에 도장을 방문할 필요성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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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바로 지금 벌어지는 사자면담의 전말이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고?
뭐긴 뭐야, 운 나쁜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지.
나는 그저 스승님을 만나 뵐 필요성을 느꼈고, 수정이를 혼자 남겨 두고 오는 것은 불안했기에 도장에 함께 왔을 뿐이다.
그런데 하필 내가 온 날이 스승님과 수정이의 스승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서로 만나 의사를 타진하는 날이었을 줄이야.
누군가의 농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그 수정이의 스승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누구냐면.
한세빛 연맹 9단.
그래, 벌써 10년 넘게 국수(國手)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현세대의 국수였다.
한 달 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을 만했다.
무려 국수를 데려오려고 했으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하지만 의외였다.
스승님은 협회의 중요 인사로서 연맹 사람들과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
한세빛 국수도 마찬가지다.
한세빛 국수가 아니었다면연맹이 자리 잡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할 정도로 연맹의 핵심 인사 중의 한 명이니 말이다.
이 둘이 한자리에 모여 대화하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실제로도 나로서는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다.
바둑 계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수정이만 태연하게 초코우유를 빨아먹고 있었다.
휘운이형이 가져다준 건가…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냐, 애까지 데리고.”
“스승님 얼굴 까먹을 것 같아서 왔는데요?”
스승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군 전역하고 3년 동안얼굴 한 번 안 비추던녀석이…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라 이놈아!”
“아니 그래도 나름 자주 연락 드렸잖아요, 도장에 안 왔을 뿐이지.”
“뭐? 그깟 메시지 몇 번 보내고 자주 연락?나 때는 매일 밤낮으로 안부 전화를 걸어도 모자랐어!“
“지금이 무슨 쌍팔년도에요? 언제 적 이야기를… 아! 왜 때려요!”
“맞을만 하니까 때리지 이놈아!”
스승님의 등짝 스매시는 여전히 아팠다.
나이도 잡수실 만큼 잡수신 양반이 아직도 손이 맵네.
애들이 요즘 스승님이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고 하길래 걱정했는데 아직 정정하신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미리 말해두겠지만, 난 네놈한테 지기 전에는 은퇴할 생각 없다. 질 생각도 없고!”
“누가 물어보기나 했어요?”
한대 더 맞았다.
“사제지간이 사이가 좋아 보여서 참 부럽군요, 저는 스승님이랑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요.”
“이게 사이가 좋은 것으로 보이다니, 천하의 국수도 세월 앞에서는 장사 없군.”
“하하하, 전 아직 창창한 삼십 대인걸요 국수도 십 년은 더 해먹을 거고 죽을 때도 반상 앞에서 죽을 겁니다.”
“다 늙은 것들이 오래 버티고 있으면 추해, 비켜줄 땐 비켜줄 줄 알아야지.”
그렇게 말하며 스승님은 몸을 일으켰다.
“난 추해지기 싫으니 자리를 비켜주겠네, 어차피 나와 할 이야기는 다 하지 않았는가.”
“저도 도찬 군과는 조용히 이야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애 너무 괴롭히지 마라!”
“괴롭히다니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스승님은 콧방귀를 뀌고는 수정이를 대리고 방 밖으로 나가셨다.
아니, 이렇게 그냥 가버린다고? 실화인가.
졸지에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국수와의 일대일 면담을 하게 생겨버렸다.
“그… 정도찬이라고 합니다, 국수를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너무 어려워하지 마요, 그리고 우리 만난 적 있잖아요, 기억 안 나나요?”
“제가 연구생일 때 한 번 뵌 적이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역시 기억하고 있네요,저도 인상 깊어서 아직 기억하고 있답니다.”
그야… 기억할 만하다.
자기가 보고 있는 앞에서 바둑판을 엎은 놈을 기억 못 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심지어 이 사람은 그 당시에도 국수였다.
국수 앞에서 바둑판을 엎는다?
내가 장담하건대 세상에 그런 미친놈은 나 하나뿐이었을 거다.
정말 잊고 싶은 질풍노도 시기의 흑 역사였다..
내가 그저 난처한 미소를 짓고 있자 한세빛 국수는 말을 이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명인께서 저에게 수정이를 맡는 건 어떠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그리고 전 방금 그 제안을 거절한 참입니다.”
“네?”
“수정이에게는 이미 훌륭한 스승이 있더군요. 그래서 거절했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머리가 굳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그릇입니다.”
“도찬 군은 훌륭한 스승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훌륭한 스승은 뛰어나야 합니다, 제자보다 뒤떨어진다면 그것은 스승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산을 키워낸 조칠현 명사는 스승의 자격이 없는 걸까요?”
신산(神算), 신산이란 신에 달한 계산 능력이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신들린 수싸움와 끝내기를 보여주던 이창한 협회 9단의 별명이었다.
그리고, 이창한 협회 9단이 열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의 스승인 조칠현 전 프로를 꺾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건…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의 대국을 보은 전이라고 하죠, 제자가 스승을 넘어서는 것은 스승에게 은혜를 갚는 것이라는 말도 있고요.”
“하지만 이건 제 상황과는 다릅니다. 조칠현 명사는 당대 최고의 바둑 기사이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저의 스승님도 그렇게 뛰어난 바둑기사는 아니었지요.”
“생각해보니까 실력은 상관없는 것 같습니다, 잘 가르치는 것이 좋은 스승 아니겠습니까.”
하…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걸 탈룰라를 시전한다고?
“제 스승님께서는 저에게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배움은 스승이 주는 지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저에게 항상 자신감을가지고 자유로워지라고 하셨죠. 그게 제 스승님이 저에게 준 것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제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저는 그것 만으로도 재능을 만개시켰죠.”
“그건 국수님에게 뛰어난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묻지요, 스승 정도찬이 보는 수정 양의 재능은 저의 아래인가요?”
한세빛 연맹 9단은 열두 살에 프로에 입단하고 열여섯 살에 스승에게 보은했다.그리고 만 스물넷이 되기 전에 국수전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렇다면 수정이의 재능은 이것보다 밑인가?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싸움 실력이다.
바둑의 싸움이라 함은 수상전이며 수상전은 곧 수 싸움이다.
그리고 수정이는 바로 그 수를 읽는 것을 타고난 아이였다.
어렸을 적의 한세빛 연맹 9단이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확신 할 수 있었다.
“아니요, 죄송하지만 저는 수정이의 재능은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을 들은 그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아이들은 길만 잡아주면 스스로 성장합니다, 사실 명인께서 보내주신 수정이의 기보를 몇 장 읽었습니다. 한 달 전이랑 비교하면 몰라볼 정도로 성장했더군요.”
“저는 그 아이에게 해준 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한 달간 어떻게 아이를 가르쳤나요?”
“포석은 공부 부족이니 인공지능 포석을 매일 공부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기풍의 비슷한 수준의 상대와 대국을시키고 스스로 복기하게끔 했습니다. 그 것 외에는 지도 대국 정도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가르쳤나요?”
“제가 감당할 재능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잘못 건들면 망가질 것 같아 기초를 제외한 무엇인가를 가르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스승 정도찬의 훌륭한 점이에요. 그리고 제 스승님과 신창연 명인이 훌륭한 스승인 이유이기도 하죠. 대부분 사람은 재능 있는 아이들을 보면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너보다 아는 게 더 많으니 가르쳐주겠다.’ 그런데 사실 이건 흔한 착각이자 교만입니다.”
한참 열변을 토한 그는 목이 탄 것인지 차 한 모금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잘난 스승들은 자신의 길에 확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무슨 재능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방식을주입하죠, 그리고 그 방식에 익숙해진 아이는 스스로 가지고 있던 장점을 잃고 스승의 열화 카피가 되거나, 스승의 상위 호환이 됩니다.”
끔찍할 정도의 폭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내 스승님도 나에게 단 한 번도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저 스승님은 나에게 항상 이런 말을 했다.
‘정수정도(正手定道)’
바둑에 임함에 항상 올바른 수를 찾고 다른 사람의 길이 아닌 너의 길을 정하라.
“말씀하신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수정이는 국수님이 가르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게... 사실 저도 최근 제자를 한 명 들였거든요. 그런데 그 아이가 성격이 좀 지ㄹ,, 크흠, 대찹니다.”
그는 상상만 해도 골치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명은 어찌 저 찌… 그런데 두 명은 도저히… 대충 그렇다고 이해해 주세요.”
“고생하십니다……”
천하의 국수가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수정이가 얌전한편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애 딸린 아버지들의 대화 같은데 착각이겠지.
착각일거다.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