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화 〉3국 - 수정의 일기 (4/75)



〈 4화 〉3국 - 수정의 일기

4월 12일 월요일 날씨 맑음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창연 기원에 신세를 지기 시작한 김수정입니다.

갑자기 왜 일기장에 인사를 쓰냐고요?

사실 이건 일기장이에요, 원래 사용하던 일기장을 챙겨 오지 못해서 새로운 일기장을 샀어요.

그래서 새로운 친구를 만났으니 인사를 한 거예요.

원장님이 그랬거든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사라고.


사실 지금 제 인사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저에게 새로운 스승님이 생겼거든요.

벌써 다섯 번째 스승님이에요.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원래이렇게스승님이 자주 바뀌는 걸까요?

저는  모르겠어요. 바둑은재미있지만 어려운  같아요.

이번 스승님은 다른 분들이랑은 다른 점이 많은 것 같아요.

스승님은 자고 일어난 저에게 많은 것들을 물어보셨어요.

바둑은 재미있냐,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이 있냐, 학교는 어떻게 할 거냐, 등등.

이런  물어보는 스승님은 처음이었어요.

다른 분들은 제가 바둑을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저 역시 어느새 제가 바둑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어요.

그래서 스승님이 물어보셨을 때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역시 바둑이 하고 싶어요.

단순히 바둑이재미있어서, 바둑에 재능이 있으니까,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에요.

보육원에서 TV를 볼 때 가끔씩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TV에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아이들은다 프로바둑기사래요.

대단하지 않나요? 저와 별로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데 TV에 나오다니.

그리고 그렇게 TV에 나오면 적으면 수십만 원 많으면 수백만 원을 출연료로 받는데요.

지금까지 제가 가져 본 가장 큰돈은 만원이었는데…… 원한다면 당장 사용 가능한 수백만 원이 있다는 건 대체 무슨 기분일까요?

십만 원이 있으면 언니들하고 동생들이 아무 걱정 없이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있어요.

백만 원이 있으면 동생들이 더 이상  옷을 물려받아 입지 않아도 될 거예요.

천만 원이 있으면 원장님이 매일매일 장부를 보며 한숨을 쉬지 않아도 돼요.

 돈이 많이 필요해요.

그리고 스승님들이 말한 것처럼 정말 저에게 뛰어난 재능이 있다면, 바둑은 어린 제가 가장 빠르게 돈을 벌  있는 수단이에요.

그래서 저는 바둑을 배우고 싶어요.

스승님들처럼 인기 있는 프로기사가 되고 싶어요.

제 말을 들은 스승님은 가만히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어요.

‘너는 벌써 너의 정도(定道)를 찾았으니 정수(正手)만 찾으면 좋은 프로기사가 될 거야’

어려운 말은 몰라요.

무슨 뜻인지 물었더니저는 올바른 길로 걸어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래요.

정수는 올바른 수, 정도는 정해진 길이라고 하는데.

올바른 수는 무엇이고 정해진 길은 무엇일까요?

어른들이 하는 말은 어려워요.


4월 20일 화요일 날씨 맑음

기원에서 살기 시작한 후 가장 좋은 점을 하나 골라보라고 하면 학교가 가깝다는 점이에요.

보육원에서 살 때는 학교가 멀어서 힘들었어요.

바둑 도장에서는 더 멀었어요, 세연이 언니가 대려다 주지 않았다면 매일 지각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학교가 가까워졌다고 아침잠을 더 길게 잘 수 있는  아니에요.

기상시간은 언제나 아침 7시.

스승님과의 포석 공부로 아침을 시작해요.

아, 포석은 대국의 전체적인 판을 이끌어나가기 위한 초반에 돌을 배치하는 방법이라고 해요.

다른 건 몰라도 포석만큼은 많이 공부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하는데……

사실 너무 재미가 없어요.

1시간의 포석 공부를 마치면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요.

솔직히 말하면 학교에  있을 시간 동안 바둑 공부를 하고 싶은데 스승님은 제가 무조건 고등학교까지는 졸업해야 한다고 했어요.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빼먹는 한이 있더라도 꼭 학교는 다니라고 해요.

어째서일까요, 시간낭비 같은데.


학교에서 돌아오면 기원의 일을 도와요.

스승님은 처음에는 그런 거 할 필요 없다며 말렸지만 아무리 봐도 너무 바빠 보였는걸요.

처음에는 일이 조금 어려웠지만 금방 적응할수 있었어요.

스승님은 가끔씩 시간이 남으면 저와 비슷한 실력의 사람과 바둑을 둘  있도록 해주셨는데 역시 바둑은 실제로 하는 것이 재미있어요, 포석 공부는 싫어요.

기원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요.

손녀딸을 보는  같다며 항상 용돈을 쥐어주시는 할아버지부터 볼 때마다 사탕 같은 간식을 쥐어주는 언니, 살림에 도움이 되는 각종선물들을 들고 방문하는 스승님의 친구분들, 등등.

하지만 손님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스승님을 보러 온 사람들이에요.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스승님은 잘생겼어요.

스승님을 보기 위해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을 정도로요.

잘 꾸미면 요즘 인기 있는 남자 바둑기사들은 명함도 못 내미는 건 아닐까요?

혹시라도 스승님이 일기장을 볼까 봐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저 손님들은 스승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어요.

알고 보니 스승님은 어렸을 때 엄청 유명했대요.

그리고 연구생이 된 이후에는 다른 방향으로 유명해졌다고 해요.

어떻게 유명했냐고 물어보니 언니들은 그냥 쓰게 웃었어요.

좋은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요.


참고로 연구생은 예비 프로들이라고 생각하면 편해요.

지금은 프로가 되는 것이 쉬워져서 바둑연맹 이 시행하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입단 시험도 생기고, 바둑연맹의 공식 바둑 대회에서 우승하면 입단할 수 있다고 하는데 예전에는 120명의 연구생 중 최상위권을 유지해야 입단 시험을  수 있었다고 해요.

그보다 더 전에는 1년에 딱 한 번, 3명만 입단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스승님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어요.

세연이 언니는 착한 언니, 재영이 오빠는 조용한 오빠, 휘운 아저씨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시끄러운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충격이에요.

아 참고로 휘운 아저씨는 제가 아저씨라고 부르면 엄청 싫어해요, 제가 오늘아저씨라고 쓴 건 비밀이에요!

4월 30일 금요일 날씨 흐림

스승님이랑 바둑을 둘 때마다 신기한 경험을 해요.

제가 가장 자신 있는 수 싸움에서는 항상 지는데 결과를 보면 항상 제가 이겨있어요.

기보(참고로 기보는 대국의 행마를 기록해둔 종이예요 바둑의 리플레이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편해요.)를  세연 언니는 전투는 졌는데 전쟁은 이겼구나? 라며  칭찬해줬어요.

하지만 제가 스승님보다 잘 둔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요.

스승님은 괴물이에요, 대체 저보다 몇 수 앞을 읽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아요.

하지만 어째서 매번 지려고 하는 걸까요?

왜 바둑을  때마다 괴로운 표정을 지으시는 걸까요.

세연 언니에게 물어보니 그건 스승님이 너무 착해서 그런 거라는 대답을 해 줬어요.

아직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사람과 대국을 할 때마다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스승님이 유일하게 편하게 바둑을 두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AI와 바둑을 둘 때에요.

AI인 랄라제로와 두  접바둑을 두는 스승님은 정말 즐거워 보여요.

어쩌면 제가 스승님을 많이 힘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무거워졌어요.


5월 3일 월요일 날씨 비

재영 오빠가 기원에 왔어요.

당연히 기원에 있던 손님들이 난리가 났고 스승님은 골치 아프다며 쫓아내려고 했지만 손님들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했어요.

즉석 팬사인회가 열리고, 손님 중 다섯 분을 추첨해서 다면기를 두는 이벤트도 열었어요.

다면기는  명이 여러 명을 상대로 동시에 대국을 두는 것이라고 해요.

처음에는 단순히 한 명과 다섯 명이 바둑을 두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다섯 개의 대국을 동시에 두는 거였어요.

그런 건 처음 봤어요 대단해요.

저는 하나에만 집중하는 것도 힘이 드는걸요.

손님 중에서 강한 사람만 뽑았는데도 재영 오빠는 여유로워 보였어요.

다면기 대국을 마친 재영 오빠는 스승님과 일색 대국을 뒀어요.

흑돌과 백 돌을 사용하는 기존의 대국과는 달리  가지 색의 돌로 대국을 두는 것을 일색 대국이라고 한대요.

사실 재영 오빠는 이벤트전으로 누군가와 일색 대국을 둬야하는데 연습 상대가 없어서 스승님을 찾아왔다고 해요.

저도 옆에서 구경했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온통 같은 색의 돌뿐인데 어떻게 구분을 하고 있는 걸까요?

스승님은 위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순서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게  힘든 것 같아요.

저도 언젠가는 저런 신기한 바둑들을  수 있을까요?

재영 오빠가 가기 전 잠깐 재영 오빠에게 스승님에 대해 물어봤어요.

재영 오빠는 스승님 본인이 직접 말하지 않는 것을 자기가 말해줄 수는 없다며 스승님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을 권했어요.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조금 아쉽기도 했어요.

휘운 아저씨라면그냥 다 말해줬을 것 같은데!

그래도 스승님이 AI와의 대국을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유는 말해줬어요.

스승님이 AI와의 대국을 좋아하는 건 분명 사람은 절대로 AI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이 편해서 그런 거라고 해요.

스승님이 두 점이나 깔고 두는데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거냐고 물어보니 재영 오빠가 깜짝 놀랐어요.

알고 보니까 세계에서 가장 잘 두는 바둑 기사들도 인공지능을 상대로는 석 점을 깔고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해요.

인공지능 대단해!

스승님이매일 인공지능 인공지능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이거였군요!

재영 오빠가 돌아가고 저는 인공지능이 얼마나 잘 두는지 궁금해서 다섯 점을 깔고 뒀는데 완전히 져버렸어요.

기보를  스승님의 표정이 굳었는데, 역시 제가 너무 못 둬서 그런 거겠죠?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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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아닌데……”

나는 청소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수정이의 일기를 덮었다.

원래 읽을 생각은 없었는데, 너무 궁금해서 그만 끝까지 읽어버리고 말았다.

수정이한테는 비밀로 해야지……

딸의 일기장을 훔쳐본 아빠의 심정이 이런 걸까.

마음속 삼각형이 조금 뭉툭해진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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