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2국 - 트라우마와 재능
내가 이기고 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과거의트라우마가 나를 괴롭혔다.
내 스승 신창연 협회 9단이 운영하는 바둑 도장에서는 가끔씩 특별한 대국을 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와 가장 나이가 어린아이의 대국.
그리고 만약 나이가 많은 아이 쪽이 진다면 스승님은 그 아이에게 바둑을 그만두는 것을 권했다.
바둑을 그만두는 것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너는 이 어린아이에게 질 정도로 재능이 없다는말을 듣고 더 이상 도장에 남아있을 수 있는 아이는 많지 않았다.
잔인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는 스승님 나름의 배려였다.
그 당시의 바둑계는 승자독식의 지독한 승부의 세계. 최상위의 몇 명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
애매한 재능을 부여잡고 실낱 같은 희망을 잡고 있는 것이야말로 더한 고통이었을 테니까.
스승님께서는 그저 조금의 도움을 주신 것뿐이다.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게끔.
그저 아주 약간 등을 떠 밀어주신 것뿐이었다.
나는 스승님의 훌륭한 망나니였고, 나와의 대국은 곧 처형이었다.
한 명이 울며 짐을 쌌다,
또 한 명이 다음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또 한 명이 더 이상 바둑을 두는 것이 즐겁지 않다며 울었고,
또 한 명이 나를 원망하며 도장을 떠났다.
또 한 명이,
또한 명이,
또 한 명이……
그리고 또 한 명이 사라진 어느 날.
‘그럼 져 주면 되잖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악마의 속삭임이 들렸다.
내가 지면 모두가 좋아하고, 내가 이기면 모두가 슬퍼했다.
나는 더 이상 이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이길 수 없게 되었다.
---*-----
이길 수 있는 수가 보이면 바둑판으로 돌을 옮기는 손이 조금씩떨린다.
판세가 유리하면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마치 누군가가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마저 들린다.
한 수만 두면 되잖아,
‘그런데 어떻게 둬야 하지?’
맥을 끊으면 지려야 질 수가 없는 대국이잖아,
‘맥은 어떻게 끊는 거더라?’
그냥 돌을 들어서 옮기는 것뿐이야.
‘돌이 너무 무거워……’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정말 말이 되지 않는 곳에 착수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야! 정도찬! 괜찮아?”
“아니, 죽을 것 같아.”
세연이는 물론 수정이도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평소보다 증상이 심한 느낌이었다.
쪽팔리게.
“계속 두자, 괜찮아졌어.”
어쨌든 방금 덕수 덕분에 판세가 묘해졌다.
뜬금없이 좌 하단에서 손을 떼고 우변의 실리를 취하는 수를 뒀기에 좌 하단 대마의 행보가 막혀버린 것이다.
중원을 휘저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허무하게 놓치고 말았다.
심지어 선수도 다시 빼앗긴 상황.
과연 이 아이는 다음 수를 어디에 둘까?
묘한 기대감이 들었다.
타악-
수정이의 선택은 의외였다.
‘대마를 잡으러 들어왔다고?’
유럽의 바둑꾼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돈다.
‘대마는 걱정 마라. 동양의 고수들이 말하기를 대마는 불사라 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바둑에 문외한인 사람이더라도 ‘대마불사’라는 말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대마는 강 근처의 토지와 같아서 어느 구석엔가 생명의 기운이 숨어있다.
아무리 잡으러 달려들어도 기어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마 사냥은 고수들 사이에서는 금기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절묘해, 까다롭다.’
하지만 문제는, 이 아이의 한 수는 수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럴듯한 한 수라는 점이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칼날이 목에 닿아있는 듯 한 느낌.
고수와의 대결에서나 가끔 느낄만한 위기감이 조금 흐릿해졌던 내 정신을 일깨웠다.
정말 노리고 둔 수일까? 그냥 단순히 좌 하단에 미련을 버리지못하고 둔 수는 아닐까?
수순이 이어지고,나는 이 아이가 나와 같은 것을 봤다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정제 되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공격성이다.’
대마 사냥이 금기라고는 하지만, 어느 시대에 던가 그 금기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있었다.
공격 일변도의 전투 바둑의 대가라고 불린 이 한돌 전 프로, 그리고 그보다 윗세대에서는 최철윤 전 프로.
그리고 현세대에 와서는 국수(國手) 한세빛 연맹 9단.
그들 모두가 한 시대를 풍미한 강자들이었다.
언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냐는 듯 착 가라앉은 굳어진 표정, 금방이라도 대마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는 서늘한 눈빛. 수 읽기에 너무 집중한 듯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쥔 주먹.
어째서인지이 아이에게서 한 시대를 풍미한 강자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나 역시, 점점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
2시간에 걸친 대국이 끝났다.
결과는 역시 내 패배.
수정이는 체력이 다 한 건지 대국이 끝나고 바로 잠들어 버렸다.
하긴 벌써 날을 새 버렸다, 저 나이 때의 아이라면 잘 시간이겠지.
“괜찮아?”
아직도 내 상태가 신경 쓰이는 듯 세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내 표정이 좀 굳어있었던 걸까?
“어, 사실 한참 전에 괜찮아졌어. 대마가 물리니까 정신이 확 들더라.”
내 말에 그녀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긴, 그런 걸 당하고도 정신 못 차리면 바둑꾼이 아니지, 그래서 어땠어?”
“신기하네, 제대로 배운 것 같진 않은데 본능적으로 어디가 취약한지 읽는 것 같았어. 그것보다 인공지능이 뭔지 아직 모르는 것 같던데 입문한지는 얼마나 된 거야?”
“아버지가 저 아이를 데려온 게 일주일 전이고, 그 전에는 저번 달부터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으로 바둑을 시작했데, 웃긴 건 그 바둑반 담당 교사가 아마 1급 수준이라는 거야. 얼마 가르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자기보다 잘 두는 것 같으니 심상치가 않아서 아버지한테 연락을 했더라고.”
“그럼 길어봤자 한 달 정도 배웠다는 거야?”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재능이라는 말인가.
“이게 말이 되는 건가?”
“글쎄, 난 비슷한 사람을 하나 알고 있어서 그렇게 놀랍지는 않던데?”
“이런괴물이 한 명 더 있다는 거야?”
이런 괴물이 둘이라고?
한국 바둑의 미래가 밝은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적당히 밝아줬으면 한다.
이런 애들이 많으면 이 아저씨가 낄 자리가 없어진다고……
내 나이도 벌써 스물다섯이다, 평범하게 프로기사 생활을 했다면 전성기가 맞이할 시점이었다.
마음이 꺾일 것만 같은 기분이다. 아, 우울해라……
“어휴 됐다, 말을 말자.”
세연이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뭐, 왜, 뭐.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욕심이 안 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나보다 훨씬 좋은 선택지가 있지 않을까?”
수많은 제자를 키워오신 스승님만 해도 나 보다는 훨씬 잘 지도해주실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도 다 생각이 있겠지.”
“그런가?”
“다른 분들한테 연락은 하고 있는 것 같던데… 너한테 전화하기 전에도 한참 고민하시더라고.”
“그런 거라면 난 그냥 거쳐가는 스승이 될 가능성이 높겠네.”
좋은 스승이라는 것은 하루 이틀 만에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맡길 스승을 찾기 전에 잠깐 거쳐가는 용도로 나한테 맡기는 것은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다.
무엇보다 도장의 정형화된 대국만 접하는 것보다는 기원의 자유분방한 대국을 경험하는 것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
“알았어, 제대로 된 스승이 정해지기 전 까지는 내가 데리고 있을게.”
“그래, 잘 부탁해.”
제자라…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제자가 생길 거라고는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든데 제자라니. 웃기는 일이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아니, 아니다. 어차피 난 거쳐가는 스승이다. 너무 열심히 가르치다가 이 재능 덩어리한테 나쁜 영향을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인 인공지능식 포석을 가르치고 이 기원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대국 경험을 가지도록 도와주는 것 정도이다.
저 아이는 그 정도만으로도 쑥쑥 자랄 거다.
저 재능은 그런 재능이었다.
“그러면 애는 언제부터 여기 오는 거야?”
“무슨 소리야 오늘부터 여기서 살게 할 건데.”
“……?”
뭐? 누가 살아? 여기서?
“애가 내 집에서 산다고?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어차피 방 많잖아. 그리고 네 집이 아니라 우리 아빠 집이지.”
“아니 여기가 스승님 건물이긴 한데 그래도 이건 좀…… 내가 애를 어떻게 돌봐? 애초에 그냥 집에서 지내게 하고 수업할 때만 오면 되잖아.”
“이 애 고아야.”
“뭐?”
예상하지 못한 말에 놀랐지만 그래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살던 곳은 있었을 거 아냐.”
“애초에 보육원에 돌아가기 싫다고 우리 도장에 눌러앉은 아이인걸?”
“뭐?”
“보육원이 많이 힘든가 봐, 자기가 돌아가면 다른 애들 먹을게 줄어든다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던데? 기특하지 않아?”
기특하네! 기특해서 미쳐버리겠네!
아무리 나라도 그런 말을 듣고 내치기에는 양심에 찔리는 부분이 있었다.
오랜만이야 내 삼각형아, 아직 남아있었구나.
애초에 여긴 스승님의 건물이니 처음부터 내게 좋다 싫다 말할 권한 따위는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하… 알았어. 대신 스승이 정해질 때 까지다?”
“그건 내가 아니라 아버지한테 말하시고요.”
“시발련…”
꼴좋다는 표정을 짓는 게 뭔가… 뭔가… 짜증 난다.
아니, 엄청 짜증 난다!
한 대만 치고 싶어!
“그럼 난 간다 다음에 봐~”
“야! 그냥 이렇게 가면어떻…”
나에게 수정이를 떠넘긴 세연이는 말 그대로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저, 저 도망가는 거 봐.
결국 남은 건 자취경험 5년의 25세청년과 바둑 한 판 두고 뻗어버린 10살짜리 꼬맹이였다.
내 인생 실화냐? 진짜 내 인생은 전설이다. 앞날이 깜깜해진다……
그렇게. 아무런 징조도 없이 다가온 인연은 조용히 내 일상에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