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화 〉1국 (2/75)



〈 2화 〉1국

계속 밖에 세워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선 기원 안으로 둘을 안내했다.

자신을 김수정이라고 소개한 소녀는 기원을 보는 것은 처음인지 신기한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도장이랑 별로 다를 거 없을 텐데 뭐가 그렇게 신기한 걸까?

“난 커피 아메리카노로.”
“아메리카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여기카페 아니고 기원이야 정신 차려.”
“나 같은 여자한테 커피 대접하는 게 쉬운 일인  알아?”

아 죽빵마렵다.

“됐고 아무거나 처드셔, 수정이는  마시고 싶은 거 있니?”
“저, 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ㄴ, 아니 세연이 음료수 가지러 가는 김에 가져오는 거니까 편하게 말해도 돼.”
“그럼 저는 초코민트 자바칩 프라푸치노 자바칩 듬뿍에 휘핑크림 잔뜩이요.”
“……?”

솔직히 말하면 뭐라고 말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저런 해괴한 이름의 음료가 있다고?

살면서 마셔본 커피라고는 차가운 아메리카노와 뜨거운 아메리카노, 그리고 같은 도장의 바둑기사가 자기가 광고 찍었다며 보내준 믹스커피뿐인 나에게는 허들이 너무 높았다.

요즘 애들은 저런  마시는구나……

세월이 무상하다……라고 생각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 나는 틀딱이 아니야! 이제 스물다섯이라고!

“그런 음료수는 없는데, 혹시 초콜릿 우유로 괜찮겠니?”
“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옆의 누구누구와는 다르게 염치는 있는 모양이었다.

대충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예전에 다른 녀석이 광고를 찍었다는 초콜릿 우유 빨대를 꽂았다.
그냥  우유도 저 빨대로 빨아먹으면 초콜릿 우유가 된다는데 참 신기하다.
과학의 발전이란……

물이 끓는 동안 나는 저 둘을 어떻게 설득시켜 돌려보낼까 고민했다.
제자로 받아들인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바둑협회의 프로들도 줄줄이 포기한 재능이다. 내가 가르치기에는 과분한 재능인 것이다.

나는 자격도 없고 의지도 없었다.

물은 야속할 정도로 빨리 끓었고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나는 양 손에 커피와 우유를 들고 자리로 돌아와 둘에게 음료를 건네며 말했다.

“커피 다 마시고 돌아가.”
“애는 두고 가면 되지?”
“내 상태 너도 알잖아.”
그 당시 도장에서 같이 동문수학 하던 녀석들은  트라우마에 대해 다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는  사람이 신세연이었고.

“잘 알지, 등신, 겁쟁이, 쪼다 새끼.”
“애 듣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미친년아!”
“아저씨 요즘 애들은 다 욕 잘해요.”
“……?”

열 살이라며?
라때는 말이야! 열 살 때는 말이야 으이? 무슨무슨 놈이라는 말도 제대로 못 말했다 이 말이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쯧쯧.”
“어휴, 젊은 꼰대 여전하네.”
“나 이제 스물다섯이야 이 양반아.”
“틀.”
“난 틀딱이 아니야악!!!!”

요즘 여러모로 세상이 바뀌면서 별 이상한 줄임말도 나오고. 해괴망측한 야민정음인지 뭔지도 생기고. 어린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만 난 젊디 젊은 스물다섯 신세대 청년이다.
진짜다.
진짜라고.

“심정은 알겠는데 우선 한번 바둑이라도 둬보고 정하는  어때?”
“어차피 내가 져.”
“내가 그걸 몰라서 말했겠니?”
"어, 몰라서 말한 것 같은데?"
"뭐?"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는 게 여기서 더 개겼다간 정말  대 맞을  같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결국 카운터에서 바둑돌을 가져왔다.

사실 대국  번으로 돌려보낼  있다면 싸게 먹히는 장사이다.
저 아이도 자기한테 지는 사람에게 배우고 싶진 않겠지.

“수정이는  단이야?”
"잘 모르겠어요."

스승님이 발견한 재능이지만 아직 10살이고 제대로 된 스승도 없는 아이이니까 기력은 잘 쳐줘봐야 아마 1단 정도이겠지.
문제는 나도 내 실력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누굴 이겨  적이 있어야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감이 잡히는데 맨날 지기만 하니 어떻게 내 실력을 파악할  있겠는가?

AI랑 둘 때는 대충 두 점 깔고 두는데 내가 두 점 깔고 둔다고 석  깔고 두는 다른 사람들보다 강하다고 말  수는 없는 것이다.


"몇 점 깔고싶어?"
“그냥 둘래요.”
“괜찮겠어?”
“지면 그때 한 점씩 늘릴게요.”

나쁘지 않은 방식이었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실제로 이런 식으로 실력 테스트를 하기도 했고.

정말 까마득한 옛날 일이지만.

결국 나와 수정이의 첫 대국은 호선으로 시작되었다.

호선, 동등한 실력의 사람끼리 바둑을  때 사용하는 룰이다.

흑이 선수를 두지만 백은 여섯 집 반의 어드벤티지를 받기 때문에 흑이 심적으로 쫓기는 싸움을 하게 된다.

선수의 이점을 살려 여섯 집 반 이상의 이득을 보지 못하면 지는 거니까.

나는 사이좋게 화점을 나눠가지는 것으로 시작한 대국이 조금씩 진행될수록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수정이의 바둑이 주는 첫인상은 조잡함, 그리고 투박함.

바둑을 처음 접한 사람 정도의 실력이었다.  까놓고 말하면 공부 부족이었다.

대체 스승님은, 세연이는, 다른 녀석들은 이 아이에게서 무엇을  것일까?

이렇게 투박한 바둑을 두는 아이인데 어째서 사범이 셋이나 붙고, 셋이 줄줄이 포기를 한 걸까?

아직은 이렇다 할 번뜩임이 보이지 않았다.

좌하단 화점의 삼삼으로 침투하니 포석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인다.

인공지능 이후 가장 보편적인 수가 된 삼삼 침투에 제대로 된 대응을 못 하는 것을 보면 현대 바둑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화점에 걸치지 않고 변을 차지하려는 모습이나, 중원에 집착하지 않는 모습, 마치 90년대의 바둑을 보는 느낌이다.

“인공지능으로 공부한 적은 없어?”
“인공지능? 그게 뭐예요?”
“베타고라고 들어  적 있니?”
“배를 타요? 왜요?”:
“아니다…… 그냥 두자.”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사범이 셋이나 붙었는데 인공지능을 모른다고? 이게 말이 되나?
나는 세연에게 해명하라고 눈짓을 보냈지만 무시당했다.
화나네.
아니 뭘 가르쳤길레 애가 인공지능을 모르는 걸까
바둑의 신은 존재하고 그건 인공지능이거늘.

지금이라도 당장 ‘너 직무유기한 거 아냐 어? 애가 어떻게 인공지능을 몰라!’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애 앞이라 참았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신세연.

바둑은 계속 진행됐고, 판세는 무난하게  쪽으로 기울어졌다.

삼삼에 침투한 것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해 중원을 너무 쉽게 내어준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이대로 가면 무난한 백의 승리다.

백의 승리……

 돌을  것은 나였다.

그래, 이대로 가면 내가 이긴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나를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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