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69화 (169/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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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사건

제임스 윌리스 감독의 기대어린 시선을 받은 이도원은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제아무리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다지만 상대가 상대다보니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쟁쟁한 할리우드 스타군단을 기용해온 감독의 상상을 뛰어넘으려면 대체 어떤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 거야?’

고민을 해봐도 마땅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눈짓을 했다. 그러자 앤 로버츠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오디션 대본을 건넸다.

“단어가 꽤 어려울 수도 있어요. 의학용어거든요.”

대본을 받은 이도원이 당황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건 왜……?”

대부분 오디션 대분은 앞으로 촬영하게 될 영화의 쪽대본을 인용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지금 받은 대본은 미국 HBO 채널의 매디컬 드라마인 것이다.

그 질문에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대답했다.

“아, 내가 아직 말을 안했군요. 영화 대본은 아직 안 나왔습니다. 해서 내가 지금 연출하고 있는 드라마의 대본을 드린 겁니다.”

이 드라마가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란 사실은 이도원도 알고 있었다. 의외인 점은 앞으로 들어갈 영화와 전혀 다른 장르의 대본이란 것이었다. 또한 의학용어가 버무려져 있기 때문에 별다른 연습 없이 즉석에서 볼 오디션 대본으로는 부적합했다.

그럼에도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눈을 반짝이며 별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도원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말한 이도원은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물론 앤 로버츠 역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도원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편 옆에서 대본을 힐끔 보았던 이상백은 마음 한구석에 기대감이 소용돌이치는 걸 느꼈다.

‘전문용어가 있다. 대본을 한 번 읽고, 이해할 시간도 없이 연기를 할 수 있을까? 그동안 얼마나 발전했는지 볼 수 있겠어.’

세 사람의 달뜬 눈빛을 받은 이도원이 눈을 뜨며 응축된 호흡을 내뱉었다.

침묵 속에 앙다문 입술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무표정이 분위기를 냉각시켰다. 등장만으로 무시무시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이다.

‘이건, 화면 너머로 봐도…….’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생각을 잇지 못했다. 말 한마디 없이 숨 막힐 듯 중압감을 더하며 장내를 장악하는 배우를 마주한 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관객이나 시청자가 눈 돌릴 틈도 주지 않는 흡인력이었다.

이도원은 완전히 몰입한 상태로 대사를 쳤다.

“어째서 그게 두려움이지? 이성적인 거야. 정서적으로 성숙한 인간들은 직장 동료와 데이트하지 않네. 이별이 보장돼 있고, 그 후 지저분한 상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앞뒤 대사를 듣지 않아도 냉철한 의사임을 알 수 있었다. 대본상 내용 때문이 아니라 이도원이 캐릭터를 살려낸 덕분이었다. 그는 호흡, 말투, 표정 하나까지 놓치지 않았다.

‘역시. 마치 대본을 수백 번 보고 연습해 온 사람 같아.’

앤 로버츠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제임스 윌리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반복된 연습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이미 완성된 배우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야.’

별처럼 빛나는 두 사람의 눈빛을 의식한 이상백은 내심 흐뭇한 미소를 그렸다.

‘날 놀라게 하더니, 세계를 놀래게 만드는 배우가 됐구나.’

그 시선을 개의치 않고 이도원은 다음 대사를 보았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나열돼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읽을 수는 있었다. 이 대사를 어떻게 소화할지, 고민은 짧고 결단은 빨랐다.

‘확실한 건 이 부분이 의학적인 내용이라는 것.’

공과 사가 확실하고 본연의 성격이 냉철할수록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사리에 맞을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철저하고 상사에게 인정받는 면모를 보일 터였다.

찰나 만에 분석을 끝낸 이도원은 이전 대사와 다른 분위기로 입을 열었다.

“부원장님. 환자의 심장판막은 정상입니다. 심내막염이 아니에요. 그런데, 심막이 두꺼워져있습니다. 이건 말이 안 돼요. 심장 문제가 있긴 한데…….”

이도원이 말끝을 흐리자 맞은편에서 앤 로버츠가 대사를 쳐주었다.

“일과성 허혈 발작.”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사적인 모습과 달리 흥미롭게 반짝이는 눈이 마음속 뜨거운 열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예. 케이지의 말대로 매독성 혈관염은 일과성 허혈 발작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심장 염증도요. 하지만 이상한 건 매독검사결과 음성이 나왔다는 거죠. 환자 역시 한 번도 성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앤 로버츠는 고개를 갸웃했다.

“케이지가 틀렸다? 그럼?”

이도원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환자는 고조된 면역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쇼그렌 증후군이 만성심막염과 뇌동맥염을 줬을 수 있어요. VI 면역억제제로 치료를 해보죠. 면역체계가 안정된다면 일주일 내에 환자를 퇴원시킬 수 있을 겁니다.”

세 사람이 침묵했다.

이도원은 캐릭터를 정확히 이해한 채 연기를 했다. 인물의 사적인 단면만 보고도 공적으로 어떤 모습일지, 나머지 반쪽을 완성시킨 것이다. 그 두 가지 모습이 너무나 극명해서 캐릭터의 매력을 수직상승 시켰다.

제임스 윌리스가 입가를 손으로 쥐며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숨기고 말했다.

“이거 미국으로 좀 더 일찍 와줘야 할 것 같은데요.”

말한 그는 앤 로버츠를 보았다.

앤 로버츠 역시 빙그레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같아요.”

영문을 모르는 이상백이 물었다.

“실례지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도원 씨를 방금 연기해 본 배역으로 섭외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제임스 윌리스의 대답에 이도원이 절로 물었다.

“예?”

“우리는 지난 몇 달 간 이 배역에 맞는 배우를 찾고 있었습니다. 적은 분량으로 드라마 후반부에 등장하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키가 되는 인물이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카메오 출연만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배우는 드무니까요.”

빙그레 웃은 제임스 윌리스가 말을 이었다.

“원래는 오디션이었을 뿐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이도원 씨가 이 역할을 누구보다 잘 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도원으로서는 곤란한 제안이었다. 중영극단 공연이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난처한 표정을 놓치지 않은 이상백이 제임스 윌리스와 앤 로버츠, 두 사람에게 말했다.

“시간을 좀 주십시오. 한국에서의 스케줄과 조율을 해보고 결정을 해야 합니다.”

“일주일 내로 연락 주십시오. 드라마 촬영 일정은 오늘 내에 메일로 보내두라고 하겠습니다.”

말미를 준 제임스 윌리스가 덧붙였다.

“함께 영화 작업을 하기 전에 드라마로 호흡을 맞춰볼 수 있다는 건 좋은 기회입니다. 미리 관객에게 얼굴을 알릴 수 있는 계기도 될 거고요. <아스라이>는 도원 씨를 널리 알리기에는 힘이 조금 부족했습니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그 후 앞으로 들어갈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미팅이 모두 끝나자 앤 로버츠가 친히 엘리베이터까지 두 사람을 배웅해 주었다.

“언제까지 있을 계획이죠?”

그녀가 묻자 이도원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주 정도 있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덕분에 최고의 감독님과 작품을 함께 할 수 있게 됐어요.”

“모두 도원 씨의 연기력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에요. 아까 연기 보고- 역시 내가 만난 최고의 배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찬사를 아끼지 않은 앤 로버츠가 물었다.

“점심 먹을 기회 정도는 주겠죠? 이번 영화 조연출이 아닌, 팬으로서 부탁하는 거예요.”

“좋습니다.”

대화를 마친 앤 로버츠는 이상백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곧, 또 봬요.”

이상백 역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기회를 만들어줘서 고맙습니다.”

“도원에게 보답한 것뿐인걸요. 도원이 없었다면 전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아마 영국의 집에서 뒹굴고 있었겠죠.”

앤 로버츠는 이도원에게 입은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다. 전날 미국에서 성과를 못 내고 영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이도원에게 전화가 왔었다. 그 덕분에 <아스라이> 연출자리를 맡을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짧은 순간 그녀는 지난 일을 회상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어.’

이후 앤 로버츠의 실력을 높이 산 배급사 <웨스트 마운틴>의 부사장 데니스 알렌은 마침 공석이었던 제임스 윌리스 감독 팀을 소개해 주었다. 그 결과 세계 최고에게 일을 배우며 생활할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쥐게 된 것이다. 제임스 윌리스의 조연출 자리는 감독을 꿈꾸는 모든 연출전공 학생들의 꿈의 직장이었다.

*

“어떻게 할 생각이냐?”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상백이 물어왔다.

그에 곰곰이 생각하던 이도원이 되물었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건 무리겠죠?”

“스케줄 문제를 떠나서 거리가 너무 멀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야 돼.”

드라마 일정이 규칙적인 것도 아니고, 촬영기간과 공연준비기간이 겹친다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신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역시 그렇겠죠. 일단 드라마 촬영 계획표가 도착하면 다시 얘기 나누시죠.”

“그래.”

이상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지사 공사는 완료가 되었는데, 바로 엔터 사업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

“예. 백 프로덕션 창립 초기와 비슷한 패턴으로 가야될 것 같습니다. 프로덕션으로 투자사업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유투브 출신 배우들을 섭외하는 방식으로요. 유능한 이쪽 전문가들을 스태프로 두고 천천히 꾸려나가야죠. 가수면 모를까, 배우 쪽은 아직 황무지입니다.”

이도원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하자 이상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빴을 텐데 공부 꽤나 했나보구나.”

“공부는요. 앞이 깜깜한데요.”

빙그레 웃은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초석은 정해놨습니다.”

“음? 초석이라고?”

그 물음에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우리의 첫 수는 김진우입니다.”

“김진우는 레드 엔터 소속 아니냐. 얼마 전까지 궁지에 몰렸었다지만, 잘 무마된 것 같던데?”

이상백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그에 이도원은 마치 모든 걸 훤히 꿰고 있는 사람처럼 답했다.

“김진우는 망명하게 될 겁니다.”

“망명?”

“예. 김진우가 김봉민 의원의 사생아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겁니다. 더불어 김봉민 의원이 자신의 정치이미지를 위해 레드엔터테인먼트를 이용했던 것, 차기열 회장으로부터 선거자금을 확보한 경위가 폭로될 될 거예요. 김봉민 의원이 사실을 부인하고 잘 막는다고 해도, 그렇게 되면 정치생명은 끝입니다.”

이상백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상상도 못한 말들이 이도원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대체 이런 일을 언제, 어떻게 계획했단 말이냐?”

이도원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정도로 가지 않고 편도를 걸으면, 언젠가는 자멸하게 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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