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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사건
김진우는 이도원을 살인교사한 후 한국을 뜨라는 레드엔터테인먼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두 달 만에 풀려났다. 마약 투약만 인정되고 판매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김봉민 의원이 손을 썼기에 결국 집행유예라는 솜방망이 처분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공사판에 와있었다.
“크, 먼지가 많아.”
손을 휘휘 내저은 김진우가 선글라스 너머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허우대가 떡 벌어진 남자는 담배꽁초를 버리고 물었다.
“누군데 날 찾아온 거요?”
“그건 알 것 없고. 그쪽 같은 사람한테 적합한 일거리가 생겨서 찾아왔습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삼을 수 있을 정도의 보상이 기다리고 있는 일입니다.”
“하, 내가 누군 줄 알고?”
김진우는 깊게 눌러 쓴 모자챙을 살짝 들었다. 이어서 그는 종이 한 장을 펼쳐들고 술술 읽기 시작했다.
“이름 한태양, 나이 서른. 소년원 출소 후 나쁜 짓을 꽤 하셨군. 한참 강원랜드에서 의사나 법조인들에게 뽀찌(경기나 도박 등에서 많은 돈을 획득한 사람이 주위 사람들에게 사례를 하는 것)를 받으면서 지내셨고, 뽀찌를 안 주면 회사로 찾아가겠다며 협박을 해서 받아냈다고. 그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도박장 내에서 빌려주고 이자는 곱으로 받으며 지내다가, 밑천이 마련되자 불법 사채업을 시작. 마침내 인생 좀 풀리나 싶었더니 협박죄로 검거돼서 형을 살고 나왔단 말이지. 결국 그쪽 일에서 손을 떼고 노가다 꾼으로 살아가는 중. 맞습니까?”
“내 뒷조사까지 한 걸 보니 심심한 일은 아닐 것 같소.”
한태양은 안전모를 벗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에 김진우가 한태양의 신상정보가 적힌 종이를 구기며 대답했다.
“실수를 좀 해줘야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한 실수로 인해 사람 하나가 죽어야 합니다.”
“사람을 죽이라고? 내가 응할 것 같소? 내가 아무리 쓰레기같이 살았어도, 살인을 할 만큼 바닥은 아닙니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려거든 돌아가시오.”
“말은 똑바로 합시다.”
김진우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발각돼서 인생을 조질까 봐 못하는 것뿐이지, 그쪽은 큰돈이 되는 일이라면 살인도 불사할 사람이 아닙니까?”
한태양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험악하게 으르렁거렸다.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끌려가서 처맞기 싫으면 적당히 하고 돌아가쇼.”
“글쎄, 나도 유단자라. 여하튼 간에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도록 처리할 수 있다면 어쩌겠습니까?”
“사람을 죽이는데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고? 그 말을 믿으란 말이오?”
“사고사 처리가 될 테고, 그래도 불안하면 외국에 나가 살면 되지 않습니까? 이 일을 수락만 한다면, 그쪽은 평생 써도 다 못 쓸 돈을 선불로 받게 될 겁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한태양이 말했다.
“어디 한 번 얘기나 들어봅시다.”
미소를 띤 김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좀 그렇고… 대화할 만한 곳으로 가시죠. 반가워 할 사실을 하나 더 말해주자면 내가 의뢰하는 대상의 이름이 그쪽을 처음 소년원에 처넣고도 잘 먹고 잘 사는 이도원이란 겁니다.”
*
김진우가 구치소에 있던 세 달간 이도원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자신의 일정을 소화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줄곧 백 엔터테인먼트 대표로서 이상백과 함께 제임스 윌리스 감독의 차기작을 전담하는 배급사나 제작사 대표들과 직접 미팅을 가졌는데, 2년 넘는 미국 생활이 의사소통이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옆자리에 앉은 이상백이 말을 걸어왔다.
“드디어 제임스 윌리스 감독을 만나겠구나.”
“세계적인 거장을 만나게 되다니, 믿기지 않네요.”
“<아스라이>로 네 인지도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제임스 윌리스 감독의 제안은 뜻밖에 일이야. 더구나 이번 영화의 주연으로 쓰고 싶다니… 오죽하면 팔십이 넘는 고령이라 정신이 온전치 못한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하하. 설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황스럽기는 이도원도 마찬가지였다. 할리우드 톱스타에 비하면 무명에 가까운 배우를 주연으로 삼겠다니.
‘정말 노망이 든 건가?’
배급사와 투자사에서도 분명 의심해 보았을 것이다.
물론 면전에서야 내색하지 못했겠지만.
이상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워낙 인맥과 명예가 있는 감독이라 배급사나 제작사도 꼼짝 못하고 있는 게다. 그래서 우리도 협상하기가 편한 거고. 너도 들어서 알겠다만, 웬만한 조건은 다 수용하라고 말했다는구나.”
“제가 아들도 아닌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이도원은 제임스 윌리스 감독의 파격적인 대우를 농을 곁들여 표현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상백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번에 중영극단에서 공연을 한다지?”
“예, 두 달 정도만 준비하면 공연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빨리?”
“저랑 차지은을 제외하면 그동안 쭉 합을 맞춰왔던 배우들이니까요. 물론 저희도 ‘영웅’때 함께 했고요.”
“꼭 해야겠냐? 아무리 시간이 있다고 해도 제임스 윌리스 감독 작품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겠어?”
“시나리오 자체가 공연이 끝날 때쯤 나오잖아요. 공연이든 촬영이든, 쉬고 싶지 않습니다. 감각이 녹스는 게 끔찍해요.”
그 말을 들은 이상백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경고했다.
“오버페이스는 슬럼프를 초래하게 마련이다. 기계도 매끄럽게 굴러가려면 기름칠을 해줘야 하는 것처럼, 사람인 이상 휴식이 필요한 법이야.”
“분명 슬럼프가 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느 정도가 제 한계점인지 알고 싶습니다. 어디까지가 제 페이스인지 아직은 알 수 없으니까요.”
이도원의 대쪽 같은 모습을 본 이상백이 한숨을 쉬었다.
“어른 말 안 듣는 놈 치고 잘 되는 놈 못 봤는데, 넌 예외라서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없구나. 그저 걱정하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으니, 원…….”
“저 괜찮아요. 교수님.”
이도원이 이상백의 팔을 잡고 덧붙였다.
“긍정적인 마음만 잃지 않는다면 부딪치고 깨져도, 언젠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은 인천 공항에서 대한항공 A380의 퍼스트클래스 좌석에 탑승해 14시간여 만에 뉴욕 JFK(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아무리 일등석을 이용했더라도 장장 열 시간이 넘는 비행은 고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피로감은 젊은 이도원보다 오십이 넘은 이상백이 더 컸다.
“올 때마다 죽겠다, 아주.”
이상백이 엄살을 부렸다.
이도원은 그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꾸준히 운동을 하셔서 그런지, 우리랑 함께 탑승한 어르신들 보다 훨씬 여유로우시던데요?”
“겉만 그런 거야. 속은 똑같아.”
두 사람이 여행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가자 고급스러운 흰색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정말 대접받을 때마다 소름 끼치네요.”
이도원이 차에 타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웨스트마운틴>과 쌍벽을 이루는 배급사 <라이온 킹>에서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귀빈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 이상백이 간단히 설명했다.
“세계 최고의 거장이 초대했으니 대우가 다를 수밖에 없지.”
운전수가 출발했다.
<라이온 킹> 배급사의 으리으리한 빌딩 앞에 도착하자 그들을 지금껏 가이드 했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차에서 내리는 두 사람을 반기며 유쾌하게 악수를 청했다.
“한 달 만이군요! 두 분을 만날 생각에 오늘 아침잠을 설쳤습니다.”
“매번 감사합니다.”
이도원이 빙긋 웃으며 따라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가이드가 일정을 설명했다.
“두 분은 오늘 처음으로 연출부를 만나게 되실 겁니다. 제임스 윌리스 감독님과 조감독님께서 와계십니다.”
“떨리네요.”
이도원은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이상백 역시 긴장으로 굳은 표정이었다.
“영화인으로서 존경하던 위인을 직접 만나게 되다니.”
그는 한국말로 감탄했다.
가이드가 궁금한 시선을 보내자 이도원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 모두 감격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가이드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다시 앞장서서 안내했다. 미팅 룸 문을 열어젖힌 그는 밖에 남으며 말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이상백과 이도원은 미팅 룸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화면이나 사진으로만 보던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있었다.
그러나 이도언은 감개무량한 기분을 만끽할 새도 없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임스 윌리스 감독 옆에 <아스라이>의 감독을 맡았던 앤 로버츠가 앉아서 웃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그때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이상백과 이도원에게 자리를 권하며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난 제임스 윌리스 감독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 친구는 연출부의 앤 로버츠 조연출이죠. 바로 이 친구의 추천으로 이도원 씨를 알게 됐습니다.”
그때서야 이도원은 자신이 섭외된 경위를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착석하자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그 짐작을 확인시켜 주었다.
“앤의 추천으로 <아스라이>를 보게 됐습니다. 하지만 난 확실한 게 필요했고 추가적으로 원본 필름을 요청했죠. 그리고 그 필름을 모두 본 순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난 아내와 모든 일을 상의하는데, 내 아내는 도원 씨를 보고 그러더군요. 눈빛만으로 여자 옷을 벗길 수 있는 배우라고요.”
앤 로버츠는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내 속을 다 읽히는 느낌이죠.”
정작 이도원이 머쓱해졌다. 면전에 대고 이런 칭찬을 받는 일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대는 세기의 거장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었다.
“감사합니다.”
찰나 동안 고민했던 이도원은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감격스러운 감정도, 부끄러운 감정도 절제했다.
고개를 끄덕인 제임스 윌리스가 이상백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내가 처음 한국에 좋은 이미지를 가진 건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했던 유태일 감독 덕분이었습니다. 저예산으로도 그런 훌륭한 영화를 만든 걸 보고 재능에 감탄했었죠. 또 독립영화에 과감한 투자를 해서 상업화시키고, 베니스 영화제까지 갈 수 있도록 만들 만큼 안목을 지닌 사람이 누굴까 궁금했습니다. 바로 백 프로더션의 이상백 대표님이더군요.”
그동안 말없이 앉아있던 이상백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모두 유태일 감독의 작품이 훌륭했기에 이룰 수 있었던 결과입니다. 전 숟가락만 얹은 격이지요.”
“하하! 표현이 재밌군요.”
제임스 윌리스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과연 한국은 겸손이 미덕인 나라입니다.”
이후에도 제임스 윌리스는 한국 문화에 대하여, 정작 한국인인 이도원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애정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한국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정작 영화만 보고 왔습니다. 함께 갔던 가족들이 불평을 했죠. 한국의 상영관은 최곱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끝에 그가 슬슬 본론을 꺼냈다.
“계약 조항 등, 대부분 제작사 측과 합의를 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오늘 미팅 자리를 만든 건 인사치레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최종적으로 이도원 씨의 연기를 제가 직접 보고 싶기 때문이죠. 다 보고 만족감을 느낀다면 이 자리에서 개런티를 두 배로 올릴 생각입니다. 그래서 투자단 대표인 이상백 이사께서 동행해주길 요청한 거고요.”
눈을 빛낸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덧붙여 말했다.
“이미 주연은 결정이 난 사항이지만, 나는 내 상상을 뛰어넘는 배우를 보고 싶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