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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사건
영화 투자사 관계자들을 만난 후 로스앤젤레스에 호텔을 잡은 이도원과 이상백은 백 엔터테인먼트 미국지사로 향했다. 아메리칸 항공을 통해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직항으로 6시간이 좀 안 되는 시간이 걸렸다. 지사에 도착했을 때, 이상백은 이미 파 김치가 돼 있었다.
“일정이 너무 빡빡한 것 아니냐?”
“일주일 안에 모든 일을 다 처리해야 하잖아요.”
젊은데다 단련된 체력을 가진 이도원도 힘든 일정이었다. 대수롭게 대답하면서도 눈빛에 걱정이 묻어났다.
낌새를 채고 희미하게 웃은 이상백이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라. 녹초가 됐긴 해도 아직 무리는 아니다.”
“많이 힘드시면 말씀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이상백에게서 시선을 뗀 이도원은 지사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높이는 삼 층, 제법 넓은 부지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다만 도심과 떨어져 있어 대중교통의 접근성이 떨어지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정도면 훌륭하네요.”
“갈 길이 멀다. 네 말대로 머지않아 김진우가 오게 된다면, 준비를 서둘러야 하지 않겠냐?”
“크게 신경 쓰실 건 없습니다. 아마 미국에서 활동을 재개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겁니다. 또, 그때가 되면 한국에서부터 매니저를 붙인 채로 파견할 거예요. 미국 생활에 적응하게 될 때까지 백 유랑극단에서 공연하게 할 생각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미국에서 살다 왔다고 하지 않았나? 금방 적응할 텐데…….”
말끝을 흐리던 이상백이 화제를 돌려서 물었다.
“그나저나 예언가처럼 말하는데…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냐? 내가 모르는 일이 너무 많은 것 같구나.”
“이렇게 서서 말씀드릴 게 아니라, 화면을 보면서 대화하시죠.”
“화면?”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은 사무실에 있는 노트북을 부팅했다. 또한 한국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어 순위 상위권을 모조리 독차지하고 있는 김진우에 대한 키워드를 클릭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상백이 놀란 표정으로 신음처럼 물었다.
“이건?”
“예, 김진우가 드디어 터트렸습니다. 자신이 바로 김봉민 의원의 서자라고요.”
인터넷이 관련 기사들로 떠들썩했다.
-마약 사건이 가라앉기도 전에… 트러블메이커 ‘김진우’ 폭로
-김봉민 의원 측, 사실무근… 명예훼손,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 준비 중
찬찬히 읽은 이상백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김봉민 의원이 고소 작전으로 나온다는 건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야. 친자확인검사만 피한다면 진실을 밝힐 방법이 없어진다. 그마저 조작할지도 모르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 참 편리하게 산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도원의 대답을 들은 이상백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쩔 수 없지. 그걸 보고, 잘 적응하고 똑똑하게 산다고 평하는 세상이니까.”
이도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인지 항상 스스로를 과신하더군요. 이로빈도 그 자만심 때문에 곤경에 빠졌듯이, 김봉민 의원도 지금까지 행해왔던 악행이 부메랑처럼 돌아가 제 무덤을 판 꼴이 될 겁니다.”
“이 기사들 외에도 무언가 더 있는 게냐?”
“예, 그걸 밝혀내기 위해 중영극단이 공연하는 무대에 꼭 서야겠습니다.”
이상백은 대답 대신 휴대폰을 꺼내 메일함을 확인했다. 그 결과 메일 한 통이 도착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비행기에 있을 때 제임스 윌리스 감독에게 드라마 스케줄이 왔다. 자료를 오픈하기 전에 먼저 말해봐라. 만약 중영극단과 일정이 겹치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드라마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이상백이 눈을 질끈 감고 물었다.
“현재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미드 출연 기회보다, 대학 동문 공연이 중요하다?”
“예, 그래야 한국에서 있었던 소란을 완전히 해결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미국에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지?”
선문답을 주고받는 것만큼이나 답답해진 이상백이 물었다.
그에 이도원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이로빈이 제 목숨을 노리고 있어요.”
충격적인 내용 치고 너무도 담담한 목소리였다.
이상백은 입을 열었지만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야?’
이윽고,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그가 물었다.
“네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게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 절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중영극단 공연 때 실행될 예정이죠.”
이상백은 선뜻 믿지 못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공연에 참가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
“제가 내빼면 또 다른 기회를 노리겠죠. 더구나 김봉민 의원은 제가 이로빈을 궁지로 몰아넣는 과정을 봤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접점이 있는 이상, 김봉민 의원도 제 존재 때문에 뒤통수가 간지러울 겁니다. 상대는 이로빈만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도원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김봉민 의원과 맞서는 건 너무 위험했다. 이상백이 무어라 말을 해야 하나 갈등하는 사이 이도원이 치고 들어갔다.
“어차피 치킨게임이 된 겁니다. 어느 한쪽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까지 끝나지 않을 싸움입니다.”
한참을 고심하던 끝에 나직한 한숨을 내쉰 이상백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런 정보를 미리 알고 있는 게야?”
이도원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김진우에게 들었습니다.”
“김진우에게?”
이상백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김진우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고?”
“이로빈이 푼 사냥개가 김진우입니다. 물론 김진우 역시 사람을 썼죠.”
“대한민국에서 살인청부라도 했다는 게야?”
“믿기 힘드시겠지만 진실입니다. 저를 죽이고 싶어 할 만한 사람을 제가 직접 추천했으니까요.”
대답한 이도원이 자신의 메일함으로 들어가서 자료 하나를 보여주었다. 사람 뒷조사를 전문적으로 하는 업체에 의뢰했던 내용에 대한 답신이었다. 흡사 이력서처럼 생긴 파일 안에는 사진, 신장, 몸무게부터 가족사항, 전과 기록 등 상세한 정보가 나타나 있었다.
“이직률이 잦은 일용직 특성상 이력서도 다양합니다. 그중 가장 사실과 밀접한 정보를 알아봤습니다.”
“하. 이게 무슨 일…….”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이상백이 이어 물었다.
“이렇게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것을, 백 프로덕션 인수 건 때 차기열 회장은 왜 그리 허술하게 당했을까? 이 정보들은 모두 믿을 만한 게냐?”
그에 이도원이 선선히 대답했다.
“예. 이번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제 어머니는 철저한 보안 시스템을 갖춘 회사에 다니셨고 저와 주소도 달랐습니다. 차기열 회장으로서는 굳이 깊게 파 볼 만한 점을 찾지 못했던 거죠. 그저 대표님과 미리 결탁한 흔적이 있는지, 그 사실에 주력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한태양이란 자는 생각보다 조사가 쉬웠어요. 비용도 많이 들지 않았고요. 조사 내용의 진실 여부는 전과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손가락을 튕겨 전과 기록이 적힌 부분을 툭 치며 덧붙였다.
“폭행죄로 소년원 수감. 첫 전과를 만들어준 장본인이 바로 저니까요.”
그러자 이상백이 의심 가는 눈치로 물었다.
“고작 그것 때문에 사람을 죽인단 말이냐?”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태양은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이 없고 현재와 미래를 비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희망 없는 삶을 걸고 평생 꿈도 꾸지 못할 거금을 딸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기꺼이 도박을 할 겁니다. 타인을 때릴 수 있는 이기심이 있다면, 경우에 따라서 타인을 죽일 수도 있다는 법이죠. 우리가 봤을 땐 그냥 미친 짓이지만 한태양에게는 이번 기회가 인생을 바꿀 극적인 상황인 셈입니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사실 그가 단정 짓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운명은 돌고 돈다. 인연도, 악연도…….’
이도원은 한태양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마주했던 소름 돋는 현실을 떠올렸다.
기억 속 저편의 자신을 죽였던 일용직 반장과 한태양의 외모가 일치했던 것이다.
비록 타임 슬립 전에는 일용직 반장과 삼십 대가 될 때까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이번 생에서는 고등학교 때부터 악연으로 얽히게 됐다. 아마도 이 사실을 모르는 한태양은 고등학교 시절 폭행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꼬였다고 여기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당시 신고했던 이도원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이 살해 동기를 격려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도원은 한태양이 이번에도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이런 정황을 구구절절 말할 수 없는 이도원을 빤히 바라보던 이상백이 주름진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한 번 정리해 보자. 여기 화면 속에 있는 자가 돈과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서 널 노리고 있다. 김진우를 통해 이로빈의 사주를 받았기 때문이지. 그리고 김진우는 스파이처럼 이 같은 정황을 모두 네게 보고했다. 여기까지 맞느냐?”
“예. 맞습니다.”
“그럼 그다음은? 어쩔 셈이지?”
기다렸던 질문이 떨어지자 이도원이 대답했다.
“미리 정보를 입수한 이상 제가 위험에 처할 일은 없을 겁니다. 한태양의 소행은 미수로 그치겠죠. 이 사실을 미리 제보받은 경찰은 도주로를 차단하고 그를 체포할 겁니다. 제보자는 김진우, 다른 말로 해서 자수를 하게 되는 거죠.”
“김진우가 순순히 자수를 한다고?”
“예, 마약 건이 크게 터지는 바람에 이로빈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이상 한국에서 활동하는 건 힘들어진 상태입니다. 이로빈은 이런 상황을 담보로 김진우를 믿고 있지만,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죠.”
“간과한 점?”
“네. 김진우의 목적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김진우는 배우로서의 성공을 꿈꾸는 게 아니에요.”
이상백이 눈을 치뜨며 되물었다.
“그럼?”
“저는 김진우가 구치소에 있던 세 달 간, 틈틈이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로서 알게 된 사실은 김진우가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돈으로 해결한 아버지를 극도로 혐오한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연예인이 되려고 한 이유도 하루빨리 아버지에 맞설 수 있는 위치에 서고 싶어서였더군요. 최대한 빨리 김봉민 의원의 부정한 부분을 폭로할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곳이 연예계였을 겁니다. 더구나 연기에 대한 재능까지 넘치니, 안성맞춤이었겠죠. 그런데 이로빈이 궁지에 몰리면서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결정적인 기회가 생긴 겁니다.”
“배우로서의 성공보다 복수가 중요하다? 아버지와 함께 자폭을 할 생각이라는 건가?”
“예. 저는 김진우가 용단을 내린 대가로, 벌을 다 받은 후 미국에서의 새 삶을 보장했습니다.”
두 눈을 짧게 빛낸 이도원이 이어 말했다.
“김진우는 제 편에 섰습니다. 계획대로 된다면 사건이 미수로 그친데다, 양심상 가책을 느끼고 자수한 부분이 인정될 겁니다. 저 역시 처벌을 원하지 않을 테고요. 이어서 김진우가 이로빈이 살인을 사주한 사실을 폭로할 테고, 그와 함께 한태양도 이구동성으로 거들게 될 겁니다. 한태양으로서는 자신에게 사주한 사람의 외압이 크면 클수록 감형에 유리할 테니까요.”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본 이상백이 거들었다.
“네 말대로 된다면 이로빈은 빠져나올 수 없겠구나.”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은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렇게 되면 아마도 푹 썩어야 할 겁니다. 본격적으로 레드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수사가 시작될 테고, 김진우가 조금만 거들어준다면 김봉민 의원과의 유착관계도 드러날 겁니다.”
완벽한 그물망이었다.
이상백이 팔을 걷어보니 닭살이 올라와 있었다. 자신을 보는 이도원의 혜성과 같은 눈빛을 보고 있노라니 모골이 송연했다.
“중영극단 공연 때 물의가 빚어질 걸 알면서, 함정으로 이용하는 건 옳지 않다.”
그 부분에 대해 고민이 컸던 이도원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일정이야 변경되겠지만 공연에는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대표님. 저는 그 사람들을 성인군자처럼 상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를 죽이려 하는 상대를 살려둔다면, 결국에는 제가 당하고 말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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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한 편도 오늘 내 올라갈 예정입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