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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사건
회식 다음 날, 이도원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전날 소속 배우들에게 붙들려 진탕 과음을 한 탓이었다.
“후.”
짧게 심호흡을 한 이도원은 거실의 냉장고 문을 열고 물통을 꺼내 사정없이 들이켰다. 단번에 물을 반 통쯤 비워낸 그는 역류하려는 위액을 억누르며 리모컨으로 TV를 틀었다.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을 뜨겁게 달구었던 한류스타 K씨가 신종마약 블루매직을 투약 및 판매했다는 혐의를 받고 조사 중인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블루매직은 고순도 마약으로 세계적으로 금하고 있는 마약이며…….
이도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한류스타 K씨?”
비록 TV에선 이니셜로 처리했지만 한류스타에, 부정한 일을 저지르는 K 이니셜.
이도원은 그 즉시 김진우가 떠올랐다. 그가 느끼는 김진우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이었다. 타임 슬립 전에는 살인교사, 이번에는 스폰서까지.
‘설마 마약까지 손을 댄 건가?’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기에, 이도원은 이상백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원이냐? 이 새벽에 무슨 일로?
이상백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도원의 입장에서는 급한 마음에 일단 통화 버튼을 누르고 보니 아직 새벽 다섯 시였다.
“죄송합니다.”
-그래, 무슨 일이니?
“한류스타 K씨가 마약 투약 및 판매했다는 혐의를 받고 조사 중이랍니다.”
-뭐?
이상백은 잠이 싹 달아난 듯 놀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잠깐 기다려 봐라.
수화기 너머에서 컴퓨터 부팅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침묵하던 이상백이 설명을 덧붙였다.
-어제 밤늦게 터진 기사구나. 나도 모처럼 일찍 잠들어서 못 봤어. 우리 회사에 비공식 라인으로 보내주는 보도 자료에 의하면 연예인 K는 김진우가 맞는 것 같다.
그 말에 이도원은 입을 딱 벌렸다.
이 사건은 김진우 일신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연배우가 이런 물의를 빚게 되면 <서커스> 역시 개봉일이 늦춰지거나 아예 엎어질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도원은 침착한 목소리로 소감을 전했다.
“공교로운 시점에 골치 아픈 일이 생겼네요.”
-그래. 아직 사건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네 말대로 시기가 너무 공교롭다.
“레드엔터가 개입됐을까요?”
그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이상백이 대답했다.
-아마도. 김진우의 실명이 거론되지 않는 걸로 봐선 아직 혐의가 확정되지 않았다는 뜻이야. 통상 그런 경우에는 시끄럽게 기사를 내지 않는다. 즉, 혐의는 확실한데 일부러 공개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지.
“왜 그럴까요? 김진우가 표적이었다면 물고기를 다 잡은 셈인데 말입니다.”
-혐의를 증명할 증거가 부족하거나, 혐의를 더 키우고 싶거나… 그것도 아니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게야.
이도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김진우의 마약 혐의가 진실인지, 아니면 조작된 것인지. 그것부터 확실히 알아봐야겠군요.”
-그래. 넌 일단 김진우를 만나서 진위 여부부터 파악해 보도록 해라. 순순히 말해줄지 모르겠다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니까 지푸라기라도 잡을 게야.
“예, 대표님은요?”
-나는 일단 유 감독을 좀 만나봐야겠다. 백 엔터 배우들이 대거 투입된 작품이니만큼 <서커스>는 반드시 개봉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해.
“알겠습니다.”
이도원은 전화를 끊은 후 바로 자가용을 타고 김진우로 추정되는 연예인 K가 구속된 검찰청 바로 옆 성동구치소로 갔다. 구치소 맞은편의 해장국집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린 이도원은 선글라스를 쓴 채 안으로 들어가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TV에선 아침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유치장에서 기소를 받고 구치소로 이감되는 데까지 하이패스로 반나절이 채 안 걸렸어. 더구나 언론이 이렇게 떠들썩한데, 어디서도 혐의를 확증하지 못하고 있다.’
말인즉슨, 조작으로 의심되는 점이 많다.
해장국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이도원은 시계를 보았다. 드디어 구치소의 면회가 시작되는 8시 30분이었다. 한참을 죽 때리다가 나온 그는 면회 신청을 하고, 곧 김진우를 유리 창문 너머로 만날 수 있었다.
“쪽팔린데, 너무 뜻밖의 손님이라 나와 봤다.”
“긴긴밤이었겠어.”
이도원이 덧붙여 물었다.
“마약 투약 및 판매 혐의. 어디까지가 진실이지?”
김진우는 그를 빤히 응시하며 되물었다.
“누구보다 내 도덕성을 의심하고 있어야 할 너한테 이런 질문을 받으니까 조금 의왼데. 날 놀리는 건가?”
이도원이 고개를 젓고는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의심 가는 점이 한두 가지라야지.”
“의심 가는 점?”
김진우가 묻자 이도원이 대답했다.
“첫째, 혐의가 진실이라면 지금까지 불법행위가 이어져 왔을 텐데 하필이면 딱 <서커스> 개봉을 앞두고 사건이 터졌다. 둘째, 아무리 현행범이라지만 체포된 지 반나절 만에 기소가 떨어졌어. 더구나 공무원이 모두 퇴근했을 시간에 유치장에서 구치소로 이감됐다. 별도의 지시가 있었다는 뜻이지. 마지막 셋째, 기소를 했다는 건 그만한 확증이 있었다는 건데 언론에는 아무것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건 이 사건을 만든 누군가가 네 간을 보려는 속셈 같은데?”
김진우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전부터 느낀 건데 넌 두뇌회전이 참 빠르단 말이야. 하지만 넌 변호사가 아니고, 날 돕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런 너한테 모든 걸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지?”
“말해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말하라는 거야.”
이도원은 느긋하게 상체를 기대고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김진우가 한숨을 푹 내쉬고 입을 열었다.
“좋아. 내가 마약을 투약했던 적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최근은 아니다. 내 명의가 아니었던 집, 차, 그리고 내가 마신 와인에서 모두 마약이 나오거나 성분이 검출됐지. 거기다 현행범으로 몰렸으니 진퇴양난의 상황인데- 이런 규모의 사건을 조작할 만한 배후가 누굴까?”
이도원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레드엔터테인먼트 이로빈 대표.”
“그리고… 내 아버지, 김봉민 의원의 합작품이지.”
덧붙인 김진우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않는 부류가 자꾸 접촉을 하게 되면 양쪽 다 말라붙기 마련이야. 너와 저들은 완전히 다른 부류의 인간이다.”
“혼자 어쩔 셈이지?”
이도원이 묻자 김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혼자 죽을 수는 없지. 이런 순간을 위해 내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해왔고.”
그 말을 듣고 나직이 한숨을 쉰 이도원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준비한 일, 열심히 해봐라.”
“잠깐.”
김진우가 이도원을 돌려세웠다.
“언론에 내 이름이 공개되지 않은 이유를 말해주마. 얼마 전 이로빈 대표의 비서실장이 찾아와서 내게 제안을 하더군. 일 하나 도와주면 마약 투약만 인정하고 초범으로 최대한 감형해서 집행유예를 때려 줄 테니 해외로 나가 살라고 말이야.”
“그래서?”
“거절했지. 그랬더니 이미 레드엔터테인먼트 연습생 여럿을 매수해서 증인을 준비해 놨다고, 이대로 마약 투약 및 판매로 들어가면 앞이 깜깜할 거라고 하더라고. 하긴, 증인으로서 신원 보장이 되는 상태에서 말 몇 마디만 해주면 밀어 주겠다고 했을 테니 연습생 몇 꾀는 건 어렵지 않았을 거야.”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막혔다.
그럼에도 이도원은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그쪽에서 제안한 일이 뭐였지?”
“널 제거하는 일이다.”
김진우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가 날 도와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네가 위험을 감수하고 나와 함께 레드엔터테인먼트를 박살내 준다면, 나는 보답으로 내 아버지- 김봉민 의원을 무너트려주지. 네가 그 양반의 눈에 찍힌 이상 그대로 두면 앞으로 계속 귀찮은 일이 생길 거다.”
이도원은 심장이 찌릿했다. 타임 슬립 전 겪었던 죽음이 재현되는 느낌이 든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커스>, 그리고 김진우와 관계된 일이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리고 복수를 선택하겠다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간다고? 난 이미 마약사범이 됐다. 신뢰가 깨진 이상 돌아가는 건 절대 불가능해. 믿든 안 믿든 그건 자유지만 난,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놈들에게 복수하고 누명만 벗으면 만족한다.”
이도원은 생각에 잠겼다.
‘날 죽이려 한 원수와 이제는 한 팀이 돼야 한다고?’
따지고 보면 꼭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진우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거대한 적을 물리칠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때 교도관이 면회시간 종료를 알려왔다.
“십오 분 다 됐습니다.”
이도원은 고민 끝에 가장 중요한 사실을 물었다.
“날 어떻게 제거하라고 하든?”
김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널 죽여 달라더군.”
“뭐?”
“그런데 내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겠어? 돈이라면 사람도 죽여줄 사람을 시켜서 널 해치려는 거지. 혹시라도 똥물이 튀는 게 싫으니까 날 이용해 일을 치르는 걸 테고.”
그 말인즉슨 타임 슬립 전에도 김진우의 독단적인 범행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미 사라져 버린 일들에 대해 조사할 수 없는 답답함이 이도원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윽고,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지?”
“글쎄… 왜 네게 집착하는지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이로빈으로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평생 이룬 것들을 네 폭로로 인해 위협받게 됐으니까.”
김진우는 자리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넌 잘 모르겠지만 그런 성향의 인간들은 자신이 한 일을 뉘우치지 않아. 나 역시도 마찬가지고. 아무튼 내 제안은 잘 한 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이도원은 구치소를 떠나기 전, 이로빈에게 면회 신청을 했다.
이로빈은 윤세라 사건에 대한 주변인들의 증언으로 인해 구치소에 수감된 채 공판을 치르는 중이었다. 그는 이도원의 면회 요청을 받아들이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 누추한 곳까지 웬일이지? 내 모습을 확인하러 왔나?”
이로빈이 묻자 이도원은 유리창을 사이에 둔 채 수화기에 대고 답했다.
“곧 교도소로 가게 될 텐데, 그 안에 생활은 잘 맞는지 모르겠네.”
“싸가지 없는 새끼.”
욕지거리를 뱉은 이로빈은 희번덕 눈을 빛냈다.
“앞으로 일을 알려주지. 난 무혐의 처분을 받을 거다. 그리고 넌 나를 겨냥했던 걸 크게 후회하며 절망하게 될 거야.”
“후회는 당신이 해야 할 것 같은데? 모두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잘못을 하면 언젠가는 탄로가 나는 법이고, 부정하게 지어올린 탑은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사실을 몰랐나?”
“고작 이런 일로 날 무너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허세 부리지 말지.”
이도원이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부수지 않았어도 당신은 무너졌다.”
“그 이야길 하러 여기까지 온 건가?”
“아니.”
고개를 저은 이도원은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김봉민 의원과 차기열 회장에게도 안부 전해달라고 말하러 왔다. 워낙 높으신 분들이라 직접 뵙기가 힘들 것 같아서 말이지. 당신은 그 안에서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 걸로 아는데?”
“선전포고라도 하는 건가?”
이로빈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반면 이도원은 미소를 띠었다.
“그런 거창한 건 아니고. 무고한 사람들을 도구로 이용했던 죗값은 받아야 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