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인 배우, 기술적인 배우 (4)
[한국예술대학교 청소년독백연기경연대회]
대회예선 89번 참가자 이도원 군의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다음 본선은 4월 25일 토요일 오후 4시입니다.
참가번호 : 20번.
장소 : 한국예술대학교 내 이말수 예술극장.
이도원은 합격 문자를 받고도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는 휴대폰 화면을 끄고 하던 연습을 계속하려 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이도원 학생 휴대폰이죠?
“그런데, 누구시죠?”
-아, 나는 드라마 <만신전>을 담당하고 있는 캐스팅디렉터 정윤복 대리라고 하는데.
정윤복은 이도원이란 것을 확인하자마자 대뜸 반말을 했다. 두세 번의 방송경험이 있는 학생들이라면 이런 고자세를 보고도 그러려니 했겠지만, 이도원은 타임 슬립 전, 그리고 사고로 목소리를 잃기 전 섭외가 줄을 서던 배우였다. 그 역시 활동 초반에는 이런 푸대접을 당연하게 여기고 일했지만 과거로 돌아온 지금은 탐탁찮았다.
저절로 목소리가 까칠하게 나왔다.
“지금 통화가 곤란해서요. 시간이랑 장소만 말씀해 주시죠.”
곱지 않은 말투가 들려오자 캐스팅디렉터 정윤복은 잠시 말을 잃었다.
보통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반응이 줄을 잇는데 이런 시원찮은 대답이라니. 괘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카메라 감독과 잘 아는 사이라고 하니 평소처럼 욕부터 싸지르고 볼 수는 없었다.
마침내 고민하던 그가 말했다.
-5월 13일 수요일 오후 여섯 시 KAS 별관 1층으로 오면 되고 늦지 마라. 주소는 문자로 보내줄게. 학교 공문 필요해?
정윤복은 랩 하듯이 빠르게 말했지만 이도원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공문 보내주세요.”
오디션을 보거나 방송출연을 하게 될 땐 보통 방송국이나 캐스팅 회사 직인이 찍힌 공문을 학교로 보내게 된다. 하지만 공문을 접수할지 말지는 학교 측의 몫이라서, 시험기간과 같은 때는 빠지기가 힘들었다.
정윤복은 다시 성격을 죽이며 말했다.
-오디션 쪽 대본은 메일로 보내야 하니까 문자로 주소 보내. 앞으로 많이 남았으니까 연습 열심히 해서 와라.
“네. 고정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죠?”
-그건 어떻게 될지 몰라. 넌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고정출연은 특정 장소나 상황에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단역이라도 연결 신이 생긴다. 남들은 이런 고정출연을 바라지만 이도원은 그 반대였다.
“알겠습니다.”
그 대답을 듣기 무섭게 전화가 끊어졌다.
이도원은 휴대폰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대본연습에 매진했다. 그는 <리처드3세>를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발성과 호흡, 작은 동선까지 고민하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
독백대회 날 아침, 이도원은 인터넷 주문한 의상들을 큰 가방에 곱게 포개어 넣었다.
리처드3세는 1400년대 중후반에 활동한 영국의 왕이다. 또한 그가 연기할 장면은 리처드3세가 악몽을 꾸고 막 잠에서 깨어난 뒤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도원은 중세시대 잠옷으로 입던 튜닉(tunic)을 구입한 것이다.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거실로 나가자 어머니와 누나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오올~ 머리는 산발을 하고서, 그러고 가게? 목발은?”
이다원의 태클에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내가 연기할 장면이 자다 일어난 장면이거든. 다친 발도 걸을 수 있을 정도고.”
“꼭 실력 없는 애들이 소품발로 밀어붙이려고 한다더라.”
이다원은 이도원이 연습하는 과정에서, 소음에 종종 시달렸기 때문에 심사가 단단히 꼬여있었다. 중간고사를 앞두고 적잖이 방해가 됐던 것이다.
이도원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 구태여 맞서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의 편을 들었다.
“얘는! 동생이 공연한다는데 응원은 못해줄 망정! 다리가 다쳐도 잘생겼네, 아들.”
“엄만 아들이 최고죠?”
이다원이 툴툴거리며 밥술을 떴다.
이도원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20년 전의 가족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뭉클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감상이었다.
“아무튼, 저 다녀올게요. 누나도 응원해줘.”
가족들에게 인사한 그는 집밖으로 나섰다.
이도원은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머릿속으로 이미지트레이닝을 했다. 대사와 동선을 떠올리며 끊임없이 무대에 오를 준비를 했다.
예선에서 대부분이 탈락하고 본선 진출자는 딱 스무 명이었다. 거품이 빠졌으니 분명 한 명, 한 명 만만찮은 상대들만 남았을 터였다. 따라서 심사위원들도 전 보다 까다롭게 점수를 매길 것이다.
‘리처드는 악몽에서 깨어나 횡설수설을 한다. 그리고 점차 자신을 비웃기에 이른다. 그건 후회의 감정이 아니다. 속죄의 감정도 아니다. 남들을 해치고 비웃듯이, 그 자신을 보면서도 악랄하게 냉소하는 것이다.’
이도원은 관객들의 기분을 섬뜩하게 만들 각오였다. 강렬하게 그들의 시선을 빨아먹고 무대를 집어삼켜야 한다. 그것이 그가 연기할 리처드3세였다.
*
한예대에 도착한 이도원은 곧장 이말수 예술극장으로 갔다. 길가마다 [독백대회 대회장] 회살표가 붙어있기도 했지만, 한 번 왔던 적이 있는 곳이라 길이 눈에 익었다.
극장 안의 풍경은 전과 다름없었다. 다만 지난번에는 백 명이 넘는 인원으로 객석이 바글바글 했던 반면, 이번에는 딱 스무 명만 초대되었다는 점이 달랐다. 그리고 스무 명 모두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얼굴이었다.
이도원이 앉자 옆자리의 여학생이 말을 붙였다.
“저번에 이상백 교수님이 질문했던 분 맞죠?”
“네.”
이도원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반대편 자리의 친구에게 자신이 맞췄다고 자랑하더니 그에게 재차 물어왔다.
“연기 엄청 잘하던데. 몇 살이에요?”
“열일곱 살이요.”
“어! 나돈데!”
여학생은 신기하다는 듯 반가워했다. 생존자 대부분이 입시생인 열아홉 살이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이도원이었나? 그랬죠? 전 박아현이에요.”
그녀는 기억력이 아주 좋거나 오지랖이 넓은 성격이 틀림없었다.
확신한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원래 그렇게 없나? 그리고 절뚝거리던데 다리는 왜 그래요?”
“남이사, 연습이나 하시죠.”
이도원의 말은 진심이었다. 대부분 학생들이 열띤 얼굴로 대본에 코를 박고 있는데, 떠드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반면 일침을 듣고도 박아현은 무사태평이었다. 지난 번, 이도원 다음으로 심사위원들에게 연기를 오래 보여주었다는 자신감이 한 몫 했다.
“되게 딱딱하네. 보나마나 우리가 1등, 2등이었을 것 같은데 좀 친해지자고요. 동갑인데 말 놔요!”
이도원은 심각하게 자리를 옮기고 싶어졌다. 대회가 얼른 시작했으면 하는 마음에 시계를 보았지만 아직 오 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싫어요.”
단호한 대답에 여학생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이없어. 저렇게 띠껍게 굴다가 꼭 떨어지지.”
이도원은 그녀에게 신경을 끄고 이어폰을 꽂으며 프린트 해온 독백대사를 보았다. 괜히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이제 막 연습을 시작하려할 때 사회자인 고명진이 무대로 나왔다. 그러자 옆 자리의 시끄러운 여학생이 감탄했다.
“완전 잘생겼어!”
여자아이들 대부분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아우성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명진이 입을 열었다.
“다시 보게 돼서 반갑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전 청소년독백연기경연대회 사회를 맡은 한국예술대학교 학회장 고명진입니다. 본선도 예선과 똑같이 각자 기량을 펼쳐주시면 됩니다. 수상자에게는 따로 연락이 갈 거고요. 수상여부에 따라 입시 때 가산점도 걸려있으니 다들 좋은 연기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무대 뒤로 사라지자 객석 불이 꺼지고 한 줄기 밝은 빛이 무대를 비췄다. 그리고 문자로 받은 새 번호순대로 한 사람 씩 호명될 때마다 신발을 벗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한 명도 만만한 상대가 없군.’
이도원은 내심 속으로 감탄했다.
타임 슬립 전 연기경력 십 년 이상의 프로였을 땐 입시생들의 연기를 보며 어설프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연기훈련을 시작한지 일 년도 되지 않은 지금은 그들의 탄탄한 연기가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다.
참가자들이 한 명 씩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고, 마침내 19번인 박아현의 순서가 왔다.
한편 이도원은 이어폰을 통해 자신이 녹음해두었던 독백을 다시 듣고 체크하던 것을 멈췄다.
다른 참가자들의 무대는 이어폰 너머로 들었지만 박아현의 무대만은 생생하게 관람하고 싶었다. 그녀의 교만한 성격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연기력만은 인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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