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5화 (15/178)

감각적인 배우, 기술적인 배우 (5)

박아현은 장난기가 씻은 듯 사라진 얼굴로 겉옷을 벗고 나와 심사위원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고결해 보이는 흰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19번 참가자 박아현입니다.”

“시작해보세요.”

심사위원의 말에 박아현이 십 초 정도 틈을 두더니 입을 열었다.

“나 늦지 않았죠. 정말 다행이에요. 하루 종일 불안했어요, 너무나 무서웠어요!”

밀도 높은 발성이 뒷받침 된 대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팔을 감싸며 흔들리는 표정을 지었다. 불안한 떨림과 묘한 흥분이 객석까지 전해졌다.

‘재능은 타고 났군.’

이도원은 절로 감탄했다.

몸동작과 잘 어우러져 꾀꼬리처럼 울려 퍼지는 음성을 듣고 있자니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이내 그녀가 애절한 표정으로 대사를 이어나갔다.

“아버지가 조금 전에 계모와 함께 나가셨어요. 하늘이 빨개지고 곧 달이 뜰 것 같더군요. 그래서 난 있는 힘을 다해서 말을 채찍질했어요. 하지만 기뻐요. 서둘러야 해요. 제가 여기 온 걸 아버지는 모르셔요.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나를 여기 오지 못하게 해요. 보헤미안의 소굴이라구. 내가 여배우라도 될까봐 걱정인 거예요. 내가 여배우라도 될까봐 걱정인 거예요.”

박아현이 선택한 독백은 안톤체홉의 다른 작품 <갈매기>의 ‘니나’였다. 니나는 갈매기에서 주인공 뜨레쁠레프의 사랑을 받는 역할이지만, 작가인 뜨레고린을 사랑한다. 그녀는 부유한 지주의 딸로서 철없는 성격의 젊은 처녀다. 그리고 극 내내 뜨레쁠레프를 들었다 놨다, 말하자면 어장관리를 한다.

다음은 뜨리고린을 만나기 전, 뜨레쁠레프에게 니나가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난 이곳의 호수에 마음이 끌려요. 갈매기처럼 내 가슴 속은 당신 생각으로 가득 차있어요. 지금 전 무척 흥분돼요 당신 어머닌 아무렇지도 않아요. 두려울 것이 없어요. 하지만 뜨리고린 씨가 계시죠. 그분 앞에서 연극을 하는 건 두려워요. 부끄럽기도 하고, 유명한 작가니까요. 젊은 분인가요? 그분의 소설, 정말 멋있어요!”

박아현의 눈이 몽롱하게 젖었다. 뜨레고린을 동경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뜨리고린를 상상하던 것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안타깝게 말했다.

“당신의 희곡은 연기하기가 힘들어요. 살아있는 인간이 없는걸요. 당신의 희곡은 움직임이 적고, 단지 읽는 것뿐인 걸요. 희곡이란 것에는 역시 연애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도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자니 무대로 뛰어올라가 뜨레쁠레프가 되고 싶을 정도였다.

박아현의 연기는 그 만큼 처연했고, 그 만큼 욕망을 자극했다. 만약 이도원이 연기를 배우지 않은 관객이었더라도 완전히 몰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완전히 감각적인 스타일이야.’

제멋대로인 성격도, 타고난 감정으로 연기를 펼치는 모습도 그랬다. 자신의 재능을 믿고 자만하는 모습까지, 그녀는 감각적인 배우들이 범하는 실수를 그대로 밟고 있었다. 만약 그런 단점을 극복할 수 있다면 박아현은 훌륭한 배우로 거듭날 터였다.

이도원은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 성격 바꾸는 것처럼 힘든 일도 없지.’

연기가 끝나자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심사위원의 말을 기다리고 서있었다.

심사위원들 대부분이 감탄하며 보았지만 이상백만은 날카롭게 지적했다.

“연기는 좋았지만... 통속적이군. 그저 그런, 일반적인 인물해석이야. 니나에 대해 고심하고, 니나란 인물을 잘 살려서 관객들을 사로잡지 못했다는 뜻이다. 정제된 배우가 아니라 감정이 풍부한 일반인을 본 느낌이랄까? 물론 재능이 있다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건 배우의 선택이지만, 그게 관객에게 드러나면 안 되는 법이지. 그런 의미에서 넌 감정에만 의지하는 게으른 배우다. 그만 내려가.”

박아현의 자존심을 난도질하는 혹평이었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무대에서 내려갔다.

“다음.”

이상백이 차갑게 불렀다. 하지만 얼음장 같은 목소리 속에 피어나는 불씨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그 불씨의 정체는 기대감이었다.

*

이도원은 무대 뒤에서 신발을 벗고 의상을 갈아입었다. 그런 뒤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갔다. 중세시대의 잠옷 바람으로 광인(狂人)과 같이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가면을 쓰고 발을 절룩거리며 등장하자 이상백은 단번에 그가 준비한 인물을 간파했다.

“리처드3세.”

제법 큰 목소리였고 무대까지 들려서, 이도원은 내심 놀랐다.

‘작은 특징들만 보고도 단번에 알아보다니.’

심지어 모든 특징이 같지도 않았다. 눈 아래까지 오는 <양들의 침묵>의 살인마 ‘한니발 렉터’ 가면은 리처드3세를 표현하기 위해 그가 창안한 소품이었다. 어설픈 분장 보다 아예 상징적인 가면으로 대체하는 쪽이 설득력 있다는 판단 하에 독창적으로 결정한 부분이었다.

오직 이상백만이 이 모든 것을 간파한 듯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타임 슬립 전에도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을 거라는 추측은 했지만,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유능한 인물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감독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왜 저런 사람이 흥행작 한 편 없이 영화판에서 사라졌던 거지?’

이 자리에 이도원의 의문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 이상백조차도 겪지 못한 미래의 일이었으니까.

사회자가 대신 그를 소개했다.

“20번 참가자 이도원 군입니다.”

그 말에 따라 우아하게 인사한 이도원이 정면의 허공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이상백이 말했다.

“시작하게.”

신호가 떨어지자 호흡을 가지런히 정리한 이도원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양팔을 활짝 펼치고 폭풍과도 같은 대사를 줄줄이 뱉었다.

“다른 말을 다오! 내 상처를 묶어 다오! 하느님 제발-.”

객석을 직선으로 가로지르며 곧게 뻗어나가던 음성이 뚝 끊겼다. 그리고 이도원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호흡이 거칠지만 낮게 가라앉았다.

“아니, 꿈이었군.”

이도원은 하늘을 보며 물었다.

“아, 겁 많은 양심아. 왜 이렇게까지 날 괴롭히느냐! 등불이 파랗게 타고 있구나, 지금은 한밤중이지. 공포에 떠는 이 몸에 차가운 땀방울이 맺혀 있구나. 무엇이 무서워 이러지?”

그는 걸음을 옮기며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나 자신인가? 나밖엔 아무도 없잖은가. 리처드는 리처드를 사랑한다. 그러니 곧 나는 나란 말이다. 아니 자객이라도 들었단 말인가?”

이도원은 두리번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천만에- 아냐, 내가 그 살인자야. 그럼 도망쳐야지. 글쎄. 내게서? 왜 도망쳐야 하지? 내 복수가 무서워서인가? 뭐, 내가 내게 복수를? 안 돼지, 안 돼. 난 나 자신을 사랑한단 말이다.”

그는 털썩 주저앉으며, 오만하게 퍼붓던 냉소를 거두고 절망을 끌어냈다.

이도원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문했다.

“그건 또 왜지? 내가 나 자신에게 잘해준 것이 있던가? 아이구, 난 날 미워해. 난 증오할 죄악을 저질렀어! 난 악당이야.”

오락가락하는 그의 광기를 보며 객석이 숨죽였다.

이도원은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숨을 뱉어내더니, 한 명의 광인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터져 나온 쩌렁쩌렁한 웃음소리에 관객들이 공포를 느꼈다. 그들의 두려움을 비웃듯, 이도원은 사이코패스처럼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에이, 바보 같으니, 누가 자기 자신을 헐뜯는담. 누워서 침 뱉기지.”

심사위원석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누가 탄성을 내뱉었는지 모를 만큼 여러 목소리가 뒤섞여있었다.

그때 이상백은 리처드3세의 감정을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이제 절정으로 간다.”

그 말처럼 이도원은 분노가 들어찬 표정으로 돌변했다.

“내 양심은 천 개의 혀를 갖고 있어. 그런데 그 혓바닥이 나에게 악당, 악당 하고 욕을 한단 말이다. 위증자, 세상에 둘도 없는 위증자, 살인자, 극악무도한 살인자! 이것저것 많은 죄과들이 대소를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법정에 밀어닥치고 유죄, 유죄하고 외쳐 댄단 말이다.”

공기를 불태우는 매서운 분노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객석의 모두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이도원은 시뻘건 눈길로 객석을 집어삼킬 듯 노려봤다. 그는 손으로 플라스틱 가면을 우그러트리며 증오를 뱉었다.

“난 이제 절망이다. 내 편을 드는 놈은 하나도 없다. 내가 죽어도 동정해 줄 놈도 없지. 그렇다. 날 동정할 리가 없다. 나부터 나 자신에 정나미가 떨어졌는데, 그런데 내가 죽인 망령들이 이 군막에 왔었지, 모두 내일 이 리처드의 머리에 복수가 내린다고 협박하고 있었겠다!”

불안한 광기가 촛불처럼 넘실거렸다.

누구라도 이 순간의 이도원을 본다면 막다른 길을 향해 200킬로미터로 질주하는 차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자연히 그를 보던 관객들의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독백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리처드3세의 독백은 여기까지인 것이다.

짝, 짝, 짝...

극장 안으로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장 깐깐한 심사위원인 이상백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극에 몰두해 있던 다른 심사위원들도 하나 둘 깨어나며 덩달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박수갈채에, 객석에 앉아있는 참가자들이 가세했다.

한편 이도원은 다리가 풀려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삼 분간의 독백이었지만 두 시간 무성극을 했을 때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진했다.

‘난 이도원이다.’

그는 자각하고 나서야 리처드3세가 품었던 감정의 여운이 잦아들었다.

한편 무대 뒤에서 음성만 들었던 고명진이 감동한 목소리로 말했다.

“20번 참가자 이도원 학생은 꼭 우리 학교에서 보길 바랍니다.”

기립박수를 보냈던 이상백 역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번 발성에 대해 일침을 가했었는데 훌륭하게 극복했군. 뿐만아니라 <양들의 침묵>에서 희대의 살인마인 ‘한니발 렉터’의 가면을 쓴 기지가 돋보였다. 호흡이나 연기는 더 할 나위 없이 좋았고. 연극이든 영화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같이 작업해 보고 싶군. 끝나고 내 명함을 받아가게.”

이제까지의 혹평과는 다른 극찬이 나왔다. 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누가 봐도 독백대회 본선의 주인공은 이도원이었고, 우승자 역시 이도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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