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인 배우, 기술적인 배우 (3)
“어머, 어머니! 도원이 있나요?”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도원은 어머니가 없다고 해주길 바랐지만 헛된 바람일 뿐이었다.
“도원이 방에 있는데? 어서 들어와.”
“넵!”
박서진은 냉큼 들어와 이도원의 방문을 두드렸다.
한편 이도원은 귀찮았지만 웃는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전복죽과 오렌지주스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선물?’
박서진은 미래에도 이도원의 친구였지만, 당시에는 순수하고 싹싹한 이미지가 퇴색된 상태였다. 그녀를 볼 때마다 이도원은 세월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졌다는 걸 느꼈다.
‘귀여운 구석이 있었네.’
서른일곱의 박서진을 기억하는 이도원으로서는 열일곱 살의 그녀가 하는 행동이 귀여웠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이성적인 관심은 전혀 없었지만.
“안 어울리게 뭘 이런 걸 다.”
“너 먹으라고 가져온 게 아니고, 어머님 드리려고 가져온 거거든? 그리고 말 좀 예쁘게 하면 어디가 덧나?”
박서진은 눈을 흘기면서도 방 구경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뒷짐을 지고 구석구석 훑어보는 그녀에게 이도원이 말했다.
“이리 와서 앉기나 해.”
그는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 노출하길 꺼려하는 성격이었다. 약간의 결벽증도 한몫했다.
그때 어머니가 손질한 과일을 들고 들어왔다.
“어릴 때 이후 처음이지? 오랜만에 왔는데 재밌게 놀다 가렴.”
“네, 어머님!”
박서진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어머니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이도원이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당연히 병문안이지! 다리는 괜찮아?”
“그냥 뭐. 다친 건 어떻게 알고?”
“같은 반 아니라고 내가 너 결석한 걸 모를까 봐? 매점 갔다가 언니한테 들었어. 어떻게 이런 중요한 일을 언니한테 듣게 만드니?”
“지금 누나 있는데. 거기 가서 놀아라.”
이도원이 과일을 한 입 베어 물며 얄밉게 말하자 박서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는 나무라지 않고 빤히 보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대회에서 다친 거 아니지? 연극부 선배들이 네가 결석하자마자 독백대회에서 탈락할 거라고 말하고 다니더라. 다친 건 줄은 어떻게 알고.”
“내가 탈락한다고? 잘못 짚었네. 난 우승할 테니까. 연극부는 해체될 거고.”
“뭐?”
박서진이 놀라서 물었다.
“그 몸으로 대회에 나간다고?”
“예선통과 문자만 받으면 당연히.”
이도원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그녀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위험해. 대회는 그렇다 치고, 선배들이 가만히 놔두겠어? 이미 한 번 그런 짓을 벌였는데!”
“나 걱정하는 거야?”
이도원이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묻자, 박서진의 두 볼이 불을 지핀 듯 빨개졌다. 그녀를 보며 이도원은 재미가 붙었다.
‘골려먹는 맛이 쏠쏠하군. 날 좋아했었다니.’
물론 박서진이 천년만년 그를 짝사랑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학창시절 이도원이 쫓아다녔다고 큰 소리를 떵떵 치던 그녀의 실체를 밝히자 웃음이 나왔다.
“대답 못하는 걸 보니 걱정하는 게 맞네.”
“그, 그보다 우리 아빠한테 네 얘길 했어.”
박서진이 말을 돌렸다. 하지만 남자는 평생 철이 안 든다고, 이도원의 장난기는 가실 줄 몰랐다.
“장인어른한테?”
“야!”
박서진이 소리를 빽 지르자 그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알겠다, 알겠어. 장난 그만.”
이도원을 쏘아보던 그녀가 말했다.
“우리 아빠 KAS 방송국 카메라 감독인 건 알고 있지? 너 독백대회 나갔다고, 연기 잘하다고 했더니 단역 오디션 한 번 봐보래! 요즘 인기 쩌는 <만신전>알지? 그 드라마야.”
“내가 연기 잘한다고? 누가 그래?”
이도원이 묻자 박서진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잘 하겠지!”
‘전혀 관심 없는데.’
호의는 고맙지만 그녀가 한 행동은 이도원에게 골치 아픈 일이었다. 단역이라고 해봐야 대사 한두 줄, TV에 잠깐 나오는 수준인데 굳이 치열한 오디션 경쟁을 뚫고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방송 쪽에 뜻이 있는 친구들이라면 해봄직 했지만 이도원은 아직 영화, 드라마, 무대 중 진로를 결정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새로 주어진 삶이라서 더욱 신중했다. 그렇다고 친구 아버지가 배려해 준 기회를 마냥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날짜는? 대회 일정이랑 겹치면 안 되는데. 다리도 웬만큼 나아야 하고.”
“5월 23일! 날짜랑 장소는 따로 캐스팅 디렉터가 연락해 줄 거야. 그러니까 대회는 포기하고 오디션 보자.”
이도원은 박서진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방송국에서는 때때로 조단역, 보조출연 섭외를 외주 캐스팅 디렉터(casting director)에게 맡기고는 한다. 귀찮은 섭외를 프로듀서(PD) 대신해 주는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직업이었지만, 외국에서는 꽤 많은 작품들이 이 캐스팅 디렉터를 끼고 작업을 진행한다.
앞으로 두 달 뒤인 5월 23일이면 다리도 완쾌됐을 테고 독백대회 본선과도 겹치지 않는다.
잠깐 고민하던 이도원이 대답했다.
“대회에서 우승하고 기분 좋게 오디션 붙으면 되겠네.”
“야! 이도원!”
“왜?”
“어머님한테 얘기할 거야. 연극부 선배들 짓이라고.”
박서진의 말에 이도원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지금부터 듣는 건 너랑 나랑 만의 비밀로 하자.”
그를 좋아하는 박서진에게 둘만의 비밀이 있다는 건 어느 정도 통하는 수법일 것이다.
이내 녹음기에서 한태양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극부와 관련된 내용들도 빠짐없이 녹음되어 있었다.
박서진은 대번에 놀란 얼굴이 됐다.
“너, 설마…….”
“연극부 선배들 짓이라고 고자질을 해봐야 일만 커지고 정작 보복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누군가를 고발하려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준비를 철저히 해야지.”
“너 대박이다.”
과연 먹혔다.
‘역시 애는 애야.’
어릴 때는 대부분 모험적이고 흥미로운 화제를 쫓기 마련이다. 따라서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스릴러 느낌의 사건을 던져주면 흥분할 수밖에 없다. 그건 박서진도 다르지 않았다.
“그럼 어쩌려고?”
“독백대회 끝나는 대로 연극부 해체시키고 나 때린 새끼 고소해야지. 녹음 날짜랑 진단서상 날짜도 일치하니까, 합의금을 받든지 소년원을 보내든지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고.”
“독백대회에서 떨어질 수도 있잖아?”
그녀의 물음에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소관이 아니었다.
“떨어지면 할 수 없지, 뭐.”
“부디 떨어지길 바랍니다.”
박서진은 이도원이 다친 몸을 이끌고 본선에 나가는 게 적잖이 신경 쓰였다. 괜한 짓을 했다가 보복을 당하진 않을까 그것도 걱정됐다. 동시에 그를 말릴 수 없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눈빛이 예전과 달라졌어. 날 대하는 성격도, 말투도, 행동도.’
이도원의 성격 자체가 친구를 많이 사귀지도 않고, 지금도 학교에서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유일하게 가깝게 지내던 박서진이 이런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그녀가 모르는 척 이도원을 대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금도 싫지 않은데다, 괜히 티를 내면 그가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기 때문이었다.
‘내가 물어보면 절교하자고 할 것 같아.’
나이가 어려도 여자의 직감이란 무섭다.
한편 이도원은 더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모른 척해. 그래야 지금처럼 지낼 수 있다.’
만약 박서진이 이 부분에 대해 파고들면 그는 거리를 둘 생각이었다.
이도원은 열일곱 살이지만 정신연령은 서른일곱이었다. 그쯤 되면 친구보단 나 자신과 가족을 챙기기 마련이다. 그는 누군가에 의해서 새 삶이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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