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2화 (12/178)

감각적인 배우, 기술적인 배우 (2)

이도원은 목발을 집고 동네에 있는 개인병원인 미래정신과의원을 방문했다. 간호사에게 접수를 하고 진료실로 들어가자 예쁜 얼굴의 여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외모에 따라 직군이 결정되는 건 아니었지만 처음 보는 미녀 여의사였기 때문에 조금 의외였다

.

“어떻게 오셨죠?”

그녀가 매력적인 보조개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책상 위에는 [원장 차수희]라는 명패가 놓여 있었다.

“제가 언젠가부터 환각 비슷한 게 보입니다.”

“환각이라면 정확히 어떤 환각을 말씀하시는 거죠?”

“전 연기를 하는데요. 공연할 때 주변의 사물이나 인물들을 상상하는 데에 집중하면 육안으로 흐릿하게 보이고요. 희곡 책을 볼 때 집중하면 그런 것들이 머릿속으로 떠올라요. 또 대사만 볼 땐 안 그러는데, 희곡 책을 통째로 읽으면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느껴지고요.”

“심하게 몰입을 하거나 강박관념에 의해 생길 수도 있는 현상이에요. 그것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는 뜻이죠.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볼래요?”

그녀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이도원이 답했다.

“보여드리는 게 가장 빠르겠죠. 얼마 전 제가 독백 하나를 했는데, 극 중에 열쇠를 줍는 장면이 나와요. 대부분은 손을 펴서 열쇠를 들고 있는 척하죠. 하지만 전 형상화된 열쇠를 잡을 수 있어요.”

이도원은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속으로 대사를 쳤다. 그리고 열쇠를 주웠다. 그의 손은 보이지 않는 열쇠를 잡고 있듯이 구부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차수희가 말했다.

“이걸 읽고 떠오르는 연기를 해볼래요?”

그녀는 책장에서 소설 한 권을 꺼내 자신이 가장 슬프게 읽었던 부분을 펼쳐주었다.

작품은 <마지막 잎새>였다.

소설은 희곡과는 달리 일일이 상황과 장소가 설명되어 있어서 이해가 쉬웠다. 따라서 희곡을 봤을 때와 달리 그 부분만 보고도 머릿속으로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걸 표현하는 건 이도원의 몫이었다.

“한 번 해볼게요.”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번쩍 떴다. 그러자 눈앞에 병상에 누워있는 소심한 소년이 보이는 듯했다.

이도원은 소년에게 말해주었다.

“베먼 씨가 오늘 병원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대.”

음성에는 짙은 슬픔이 배어있었다.

그가 말하는 노인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을 잎새를 그렸다. 생애 마지막 걸작으로 희망을 선택한 것이다.

“그저께 아침에 관리인이 찾아갔다가 아파하고 있는 베먼 씨를 발견했나봐. 구두도 옷도 비에 흠뻑 젖어있었고,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대. 곁에는 비에 젖은 손전등과 붓 두세 자리, 녹색과 노란색 물감을 푼 팔레트가 놓여 있었대.”

이도원은 난데없이 창문 가로 가더니, 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고 있는 외로운 잎새를 바라보는 듯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누워있는 소년에게 말했다.

“저 마지막 잎새 말이야.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니? 저 잎새는 베먼 씨의 걸작이었어.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던 날 밤, 떨어진 잎새 대신 그 노인이 그려놓은 게 바로 저 잎새였던 거야.”

진료실을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가 현실과 소설의 구분선을 허물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을수록 차수희는 소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이도원의 연기를 통해 상상 속에만 머물렀던 광경을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연기가 모두 끝났을 땐 그녀의 두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반면 이도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울고 계시네요.”

오히려 정신을 놓고 있던 차수희가 화들짝 깼다.

“아! 이런…….”

그녀는 격동하는 마음을 얼른 수습했다. 그럼에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이도원이 단번에 대사를 모두 외운 것도, 따로 준비 없이 연기라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완벽한 연기를 펼친 것도 상식을 뛰어넘은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저기. 이건 정신적인 문제 같진 않아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그냥 타고난 재능 같다는 거죠.”

이도원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내가 원래 없던 재능이니까 온 거 아닙니까.’

나직이 한숨을 쉰 그가 물었다.

“지금은 괜찮은데 앞으로 자칫 문제가 생길까 봐 그래요.”

“음…….”

차수희 역시 괜찮을 거라고 장담하지 못했다.

많은 감각파 배우들이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정체성을 잃고 폐인이 되거나, 심하면 자살을 선택하는 실례가 있었던 것이다.

이도원이 이곳에 온 의도를 파악한 차수희가 대안을 내놨다.

“어차피 진료는 무료니까 매 달 한 번 씩 들릴래요? 저도 사례들을 검토해보면서 정기적으로 체크해 줄게요.”

“그럼 감사하죠.”

이도원은 일단 이 현상에 대한 생각을 접기로 했다. 의사도 모르는 일을 자신이 고민하고 파헤쳐 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받아들이고 단념한다.’

진료를 보면서 전문가의 견해를 들었더니 확실히 속이 시원했다. 심란했던 마음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중요한 것은 이 현상이 복을 가져오든 화를 가져오든, 당장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이게 아니었으면 독백대회도 망쳤겠지.’

이도원은 이상백을 보게 된 순간을 떠올렸다. 감정이 주체되지 않아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그는 차수희에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왔다.

불쑥 핸드폰 녹음본이 떠올랐다. 본선 때까진 연극부에서 이도원이 가진 무기를 알면 안 된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선에 출전해 우승을 거머쥔 뒤 연극부를 해체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그럼 분명 반발할 거야.’

그때 녹음본을 무기로 그들을 포섭한다. 비록 선배들이었지만 잘만 되면 졸업할 때까지 부려먹을 대로 부려먹을 수 있을지 몰랐다. 타임 슬립 하기 전 이도원과, 그를 괴롭히고 부려먹었던 선배들의 상황이 뒤바뀌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

이도원은 본격적으로 <리처드 3세> 연기 연습에 돌입했다. 발목 부상으로 인해 체력단련이나 스트레칭은 무리였지만 발음 발성 호흡 훈련은 하루도 빼지 않고 진행했다.

대사 암기나 인물 분석을 따로 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에 한 결 편했다. 얼마나 정확하게 떠오르면 인물들을 색깔로 표현할 수도, 각각의 감정을 바로바로 끌어올릴 수도 있었다. 겪으면 겪을수록 참 괴상하고 우월한 능력이었다.

‘여기 기술적인 부분을 덧입히면 되겠어.’

이도원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물론 완벽한 능력은 아니었다. 소설 속 인물들이 빙의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도원이 작품을 허투루 읽거나 발상을 잘못하면 영락없이 연기를 망칠 수 있었다. 작품을 제대로 읽었을 때, 머릿속으로 쏟아지는 등장인물들의 감정 선을 어떻게 표현할지는 오로지 그의 발상에 달렸다는 뜻이다.

딱 정의하자면 타임 슬립 이후 몰입도와 집중력, 공감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리처드 3세>에서 리처드 3세는 매우 뒤틀린 인물이다. 짐승에게도 자비심은 있는 법인데, 리처드 3세는 그마저도 없는 완벽하게 추악한 인간이다. 그는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있으며 세 치 혀를 이용해 남을 속이고, 등에 칼을 꽂는다. 자신에게 방해되는 인물은 누구든 무참히 도륙한다. 자신이 악인인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기보다 자부심을 느낀다. 절름발이 꼽추에다 추남인 외모는 부모에게조차 미움 밖에 받은 것이 없었던 리처드 3세의 내면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이도원은 책을 몇 번이나 덮었다. 새 삶에서 받은 재능들로 인해 비극을 초래할까 덜컥 겁이 났다. 신 내림을 받기 전 무녀의 느낌이 이럴 것이다.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하필이면 이런 작품을 해야 돼다니.’

만약 감정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리처드 3세와 자아의 혼란을 느낀다면, 아마 배트맨 다크나이트에서 절대 악인 조커를 연기했던 히스 레저처럼 죽음을 택할지도 몰랐다.

“극도의 우울증을 앓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그는 조심스레 <리처드 3세>를 펼치고 읽어나갔다. 그러자 평소 같으면 이해는 해도, 공감할 수 없었을 리처드 3세의 처참한 감정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책장을 덮었을 때 이도원은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끝없는 오만함과 악의가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후우-.”

이도원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집중력을 흩트리자 들끓던 감정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다행히 신에게 받은 그의 재능이 저주는 아닌 듯싶었다.

어느 정도 안심이 된 이도원은 리처드 3세란 인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고민했다.

‘추한 외모로 분장하고 감정이 담긴 대사를 뱉는다고 해도 완벽한 악인을 표현하긴 힘들다. 연기는 희곡을 뛰어넘어야 해.’

그는 글자로 된 희곡에서는 느낄 수 없는, 보다 입체적인 이미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이도원은 리처드 3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보통 악인이라면 쇠를 긁는 목소리가 연상되겠지만…….”

극 중 리처드 3세는 추한 외모에도 여심을 사로잡고 능수능란하게 사람들을 속인다. 그 점을 떠올려 보면 누구도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부드럽고 유려한 음성과 말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발성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 극 중 리처드 3세는 더없이 추악한 인물이지만 그만의 마력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인물들이 그에게 속고 휘둘리는 게 납득이 될 테니까. 리처드 3세 한 명만 연기가 미흡해도 극 전체의 설득력이 떨어지게 된다. 그만큼 고난도의 배역이야.’

이도원이 리처드 3세를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이다원의 목소리가 집안을 채웠다.

“엄마! 문 좀요!”

어머니가 문을 열어주자 손님이 호들갑을 떨며 인사를 했다. 이도원도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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