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72화 (72/137)

< KBO in 스토브 (1) >

72. KBO in 스토브 (1)

해가 지자 달아올랐던 대기의 온도가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9월이 지나고, 10월을 거쳐 그 막바지에 도달한 어느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야구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호쾌한 스윙! 8회까지 3타석 3볼넷. 마침내 답답함을 날려버리는 강해준의 결승홈런!]

[경기를 지배한 한 번의 송구, 한 번의 타석. 강해준에게 그 이상은 필요 없었다.]

[더히트 에이스 배성환. 끝내 피홈런 허용하며 패전투수로.]

[한국시리즈 선발 8회 등판, 커리어 첫 피홈런을 허용한 배성환.]

1차전.

해준의 활약으로 에이스 배성환을 무너트리며 기선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세오레즈.

하지만 2차전에서 점수 짜내기를 멈추고 본래의 장타 공세로 돌아간 더히트의 반격은 매서웠다.

[5타수 3안타 2홈런 6타점! 이신우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류한열 감독 2차전 승리 소감, '1차전은 타선을 잘못 운용한 내 잘못. 하지만 이제는 초심으로 돌아간다. 앞으로 만만치 않을 것.']

[20안타 폭발 더히트 타선. 제왕의 송곳니는 녹슬지 않았다.]

불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체력의 저하를 보이지 않은 이신우. 그의 활약에 2차전을 내준 세오레즈.

이어 더히트 파크에서 열린 3차전.

[진흙탕 싸움 3차전. 승리는 더히트에게로.]

[천신만고 끝에 얻은 값진 승리. 더히트 2승 달성.]

[가을야구의 강자, 살아나기 시작한 사자의 위세!]

가을야구 DNA라는 것이 정말로 있기라도 하듯, 정면으로 치고받은 경기에서 한결 수월하게 승리를 가져간 더히트.

하지만 다음 4차전.

해준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판 자체를 뒤흔들며 흐름을 강탈해오는 데 성공한다.

[4차전 MVP, 5타석 5볼넷 5도루 야수 강해준!]

[경악, 경악, 또 경악. 그가 달릴 때마다 경기장이 함께 뒤흔들렸다.]

[주루만으로 게임을 뒤흔든 경지에 다다른 주루 기예.]

[더히트 현장관계자, '강해준의 주루가 마운드의 호흡을 뒤엉키게 했다.']

상대 배터리의 치열한 견제를 모두 뚫어버리고, 한국시리즈 한 경기 최다 도루 기록마저 경신해버리는 괴력을 발휘한 것.

그렇게 시리즈의 중반.

서로 한 방씩을 주고받으며 동률을 기록한 세오레즈와 더히트.

[한국시리즈 5차전. 용호상박의 불꽃 튀기는 경쟁.]

[실패로 돌아간 강해준 무시 작전. 5차전, 더히트의 새로운 강해준 맞춤 작전은?]

[한국시리즈를 가득 메운 스카우트? 보기 힘든 이색 광경에 야구 관계자들도 놀람을 금치 못해.]

당연하게도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한 해준의 활약에 심각함을 느낀 더히트가 5차전에서는 정면 승부를 다시 한번 걸어보지만.

따아아악-!

[이건 갑니다! 갑니다! 또 갔습니다! 더히트의 투수진이 강해준 선수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철저하고도 순식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해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한번 방망이를 폭발시킨다.

[더히트의 조커, 이우상 3과 1/3이닝 8피안타 2볼넷 2피홈런 6실점.]

[이혜준, 강해준에게 연타석 홈런 허용.]

[3연타석 홈런포! 포효, 강해준!]

[피하면 뛰고, 승부하면 친다! 가을마저 지배해버리는 야수의 폭주!]

더히트로서는 어떻게든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

그렇게 이어진 6차전.

[2번의 만루, 2번의 고의사구. 그럼에도 승리! 더히트의 지장, 류한열의 과감한 한 수!]

결국 더히트의 벤치는 극단적인 전술을 택한다.

만루에서마저 해준을 고의사구로 걸러버리는 과감성을 발휘한 것.

그렇게.

[대구 더히트, 6차전 진땀승!]

[9회 말, 잘못 들어간 한 구. 강해준의 대형 파울 홈런에 식은땀을 흘리는 마무리 정일환.]

[강해준 다시 한번 5볼넷. 한국시리즈 최초 5볼넷 경기 2번 기록 소유자.]

[더히트의 반격 성공, 한국시리즈는 7차전으로!]

[괴물의 손짓 하나 하나에 흔들리는 한국시리즈. 더히트,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순간.]

[한국시리즈? 해준시리즈! 익명의 메이저리그 스카우트, '모두가 그의 플레이만을 보기 위해 온 것 같다.']

더히트는 시리즈를 최종전으로 끌고 가는 데 성공한다.

상황만 보자면 역대 한국시리즈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긴장감을 쏟아내는 이번 한국시리즈.

그리고, 대망의 7차전 예정됐던 11월 3일.

와아아아아아아-!

10회 말 2아웃, 주자 만루.

해준은 타석에 들어서며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대구 더히트 8 : 7 서울 세오레즈]

"후우..."

1점 차의 접전.

생각보다 길어졌지만, 드디어 우승의 순간이 다가왔다.

상대는 더히트의 마무리 정일환.

해준은 그를 보며 씨익 웃고는 자세를 잡았다.

'이제는 정말로 끝낼 때다.'

고작 1점 차.

마지막 무대의 마지막 타석에서 갖춰진 최고의 사냥 환경.

광포하게 타오르기 시작한 해준의 눈빛이 마운드의 투수를 옭아매 가고 있었다.

"후웁..."

그 등골을 오한에 적시는 듯한 오싹함에 호흡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킨 정일환.

수많은 포스트시즌을 치뤄온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의 압박감을 좀처럼 이겨내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한 문장을 반복해서 생각했다.

'강해준이라고 매번 홈런을 때려내지는 못한다. 못때린다. 못때린다. 못때린다...'

그렇게 꾸욱- 있는 힘껏 실밥을 억누른 그가 마운드를 박찼고.

곧.

--------텅!

[세오레즈! 서울 세오레즈! 10회 말, 강해준 선수의 타구가 모두의 시선을 앗아가며...]

해준의 타구가 다시 한번 고척돔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

고척돔 인근 주차장.

그 날은 평소보다 유독 쌀쌀했다.

점퍼를 여민 스포츠 베어의 허상필 기자.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딸칵- 은색 지포 라이터 뚜껑이 열렸다 닫히길 반복했다.

'흐음... 슬슬 때가 됐는데.'

한창 고척돔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한국시리즈 7차전.

아직 결판이 나지 않은 그 경기의 결말을 기다리고 있던 허상필은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후배 기자 장원필을 바라보았다.

장원필은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열심히 경기 중계창의 새로고침 버튼을 연타하고 있었다.

"아직이냐?"

허상필이 물었다.

생각보다 길어진 경기 시간. 시침은 어느새 10시를 넘어선 상황. 장원필은 그 말에 미간을 좁게 모았다.

"잠시만요. 지금 서버가 폭주해서 창이... 아오, 또 멈췄다! 다시 새로고침. 새로고침.. "

이어지는 조급한 손동작.

장원필은 그렇게 화면을 몇 번 더 건드리더니, 이내.

"우승이다!"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서울 세오레즈, 창단 첫 우승!]

[10회 말 극적 끝내기! 주인공은 역사를 뒤흔든 야수 강해준!]

[한국시리즈 역사상 최고 시청률 경신! 굿바이, 레전드, 굿바이 강해준!]

[KBO 역사상 사상 첫 한국시리즈 7차전 연장 끝내기 만루홈런! 마무리 순간까지 역사가 된 야수.]

드디어 창단 첫 우승을 일궈낸 세오레즈.

그리고, 후반기부터 이어진 유례없는 폭주로 우승을 이끌며 이제는 KBO의 전설이 된 강해준.

그들의 결말은 드라마를 보는 것만큼이나 완벽했다.

10회 말 2아웃.

주자는 만루.

그리고 10회 초에 1점을 뽑아내는 데 성공하며 리드를 가져가게 된 더히트. 그런 상황에서 타석에서 들어선 타자는 한국시리즈에 들어 7경기 동안 무려 17개의 볼넷을 얻어낸 해준.

그리고...

"빵!"

빠르게 업로드된 영상 클립을 보고 있던 장원필의 요란스러운 리액션이 이어졌다. 스피커에서는 밤공기를 타고 경쾌한 파열음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극적인 끝내기 만루홈런.

"크으.. 이걸 봤어야 했는데."

이어 스마트폰 스피커를 타고 손끝에 전해지는 관중들의 함성소리. 장원필은 그에 전율하듯 몸을 한 차례 떨었다. 그리고, 곧 억울한 듯 외쳤다.

"아니, 애초에 이런 걸 보려고 기자가 된 건데!"

하지만 믿기지 않게도.

"이런 주차장이 아니라!"

야구 기자인 이들은 주차장에서 한국시리즈를 보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처절한 억울함이 담긴 외침을 이어가던 장원필은 자신들의 그 처량한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 크흠."

허상필 기자는 그 모습에 할 말이 없는 듯 슬쩍 고개를 돌렸지만, 장원필의 입은 쉴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러게 제가 그거 조금만 더 묵혀뒀다가 터트리자고 했잖아요. 적어도 한국시리즈까지만 보고! 어쩐지 불길하더라니. 이게 무슨 꼴이에요? 야구 기자가 취재도 못 하고 주차장에서 덩그러니. 결국 좋아하시던 강해준 만루홈런 장면도 못 보셨네. 역사를 날리셨네요, 역사를 날리셨어."

세오레즈 측으로부터 기자실 출입금지를 넘어 야구장 출입금지를 통보를 받은 스포츠베어 출신 기자들.

이유는 간단했다.

허상필이 세오레즈의 내부 고발자로부터 소스를 받아 구체적인 비리 현황을 터트렸고, 당연하게도 세오레즈 관련자들을 그 사실을 부정.

오히려 스포츠베어의 스포츠국 소속 기자들이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기자실 출입을 넘어 고척돔 자체에 출입을 금지해버린 것.

"아니, 이렇게 막 나갈 줄 알았나."

허상필로서는 예상치 못한 강경한 대응이 얼굴을 긁적일 뿐이었다. 기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나간다는 건, 이미 이미지고 뭐고 생존을 우선시하겠다는 뜻.

친분 있는 기자들이 이에 대해 기사를 쏟아내고 비난의 댓글들이 이어졌지만, 세오레즈 프런트는 눈도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조차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허상필은 장원필의 쫑알거림을 대충 넘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이런 식의 쇄국정책은 오래가지 못해.'

자신이 한 행동은 하나의 포문을 연 것일 뿐이었다.

그것도 조금 일찍.

'하지만 이젠 시즌이 끝났다. 그것도 최고의 결과로.'

창단 이래 최초의 한국시리즈 우승.

그리고 그 대업을 위해 묵묵히 경기에 전념하던 선수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폭발적인 파괴력을 내뿜는 포문이 상대팀이 아닌, 세오레즈를 향해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세오레즈로서는 한두 명의 기자를 막아버리는 식으로 대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FA라. 그건 얌전하던 선수도 눈깔을 뒤집고 입에 거품을 물게 만들지.'

인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프로야구선수 인생 최대의 목적.

그것을 쥘 기회를 놓치는 머저리는 없었다.

'더군다나 강해준 같은 경우 언론의 전망은 최소 2억 달러.'

얌전히 포스팅으로 진출할 경우 최소 수천만 달러를 구단 측에 내줘야 한다. 각종 비리, 경영권 분쟁으로 돈이 필요한 세오레즈의 사장 이운요. 슈퍼에이전트 행크 그린을 끼고 수백억을 사수할 것이 분명한 강해준.

이 둘의 싸움은 조용히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장원필에게서 쫑알거림이 멈추고 정상적인 말투가 돌아왔다.

"어? 저기 오네요. 저 사람 맞죠?"

허상필 기자는 장원필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선수를 떠올리게 만드는 큰 체구, 어느새 머리색을 바꿨는지 회색빛 머릿결에 회색빛 홍채가 어울리는 얼굴.

다저스의 국제스카우트이자 국제 해적으로 악명 높은 남자.

"크리스 배그웰."

그리고, 이제부터 이어질 또 다른 전쟁.

스토브리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그가 주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

한국시리즈 우승 다음 날.

세오레즈 프런트 사무실은 기쁨보다는 전쟁을 앞둔 것 같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꿀걱- 목울대를 울렁이며 전화기를 바라본 프런트 직원. 그는 불안하게 눈알을 여기저기 굴렸다.

잔뜩 찡그려진 얼굴의 사수, 벌써부터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홍보담당자, 하다못해 전력분석원까지 대응을 위해 끌려온 상황.

'아씨, 이게 무슨 일이야.'

전임자의 갑작스러운 퇴사로 입사 한지 고작 3개월 차.

그런데 그 직장이 벌써부터 망하기 일보 직전의 분위기였다. 그로서는 날벼락과 같은 상황.

'그러고보면 벌써부터 내년부터 스폰도 뚝 끊길 것 같다는데..'

스폰서의 존재 여부가 구단 재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세오레즈로서는 벼랑 끝에 몰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띠리리--

그때, 사무실의 고요를 깨는 전화벨이 울렸다.

한 순간 자신에게로 쏠리는 시선.

'.. 후우.'

속으로나마 한숨을 내쉰 그는.

"전화받았습니다. 서울 세오레즈 프런트 유홍인 대리입니다."

군기가 바짝 든 이등병처럼 빠르게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띠리리-!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사무실 사방의 전화기가 미친 듯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사전협상 기간이에요. 그 선수는 FA가 아니라니까요!"

"프런트 입장이요? 문제없습니다! 다 관례라니까요 그게. 우리 구단만 그랬습니까?"

"강해준 선수요? 당연히 포스팅으로 갈 예정... 아, FA 말고요!"

"검찰 조사요?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저 그냥 프런트 말단 직원이에요. 고위직 사정까지는 모릅니다."

"경영권 분란 문제요? 그건 또 뭡니까?"

본격적으로 포화성이 울리기 시작한 세오레즈 프런트의 사무실.

'... 올 게 왔군.'

직원들을 격려차, 입단속을 위해 사무실을 찾았던 이운요 사장은 그 모습을 본 채 안색을 굳혔다.

한국시리즈의 우승을 즐길 새도 없이 시작된 새로운 전쟁.

그리고, 그 공격을 먼저 날린 곳은.

[세오레즈 선수단 대표 이완석, KBO에 대규모 계약 해지 승인 신청!]

[사상 유례 없는 계약 해지 승인 신청! KBO 총재의 결정은?]

[선수협, 최선을 다해 서포트 할 것.]

[한국시리즈 후 불어닥친 예정된 폭풍. 그 향방은?]

스토브리그 안에 승부를 봐야 하는 선수들 측이었다.

< KBO in 스토브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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