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시리즈 (4) >
71. 한국시리즈 (4)
퍼어어엉-!
그 어느 때보다 멀리 퍼져나가는 포구음이 들려온 순간.
일순 요동치는 경기 흐름의 변화에 관중들은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8회 1사.
7과 1/3이닝 103구 3볼넷 3피안타 11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하면서도, 단 한 번도 해준을 상대로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않았던 배성환.
"스트라이크!"
그가 에이스로서의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 승부에 들어갔다는 것을.
-드디어 승부인가?
-진짜 오래 기다렸다! 그래, 난 이걸 보러 여기까지 온 거라고!
-성환아, 오래 참았다! 이제는 마음껏 싸워봐라!
-한국시리즈 1차전. 에이스로서 할 건 이미 다했다!
-7회 동안 실적을 냈으니까 이제는 마음껏 밀어 붙여봐라!
KBO를 대표하는 최고의 우완투수.
그런 그가 경기 내내 한 타자에게서 도망 다녔고, 그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은 없었다. 배성환의 투쟁심 깃든 눈빛에서는 그동안 참아왔던 여러 감정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 자식 많이 참았지."
포수 전용진이 중얼거렸다.
신인 시절부터 거릴 낄 것 없는 승리의 역사를 이어온 배성환. 그런 그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꺼려해야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경기 시작 전, 전용진은 이번 작전을 제시하며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7회.
그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낸다면, 강해준을 상대하기로.
그리고 배성환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정말로 한국시리즈 1차전이라는 큰 무대에서 7회를 압도적으로 막아내며 스스로 승부의 기회를 만든 것.
'뭐, 여기까지 올 걸 스스로는 확신한 모양이지만.'
전용진은 아직도 얼얼한 오른손에 눈살을 찌푸리고는 저 멀리 외야를 바라보았다.
[154.1km/h]
전광판에 떠오른 올 시즌 최고구속.
관중석의 웅성거림이 포수석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100구를 넘긴 상태에서 최고구속을 기록했다는 소리는.
'전력투구 페이스를 유지한 것처럼 보여도 나름 힘을 비축했다는 소리니까.'
투수의 상태와 해준의 타격 데이터를 떠올린 전용진은 미트를 홈플레이트 몸쪽 높이 들이밀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쪽으로 가자. 구질은..'
그와 함께 가랑이 사이로 들이민 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
몸쪽 높은 코스.
있는 힘껏 잡아당긴 스윙에 흰색 궤적이 걸려들었다.
오오오오오오-!
모두가 기립했을 만큼 대단했던 대형 타구.
하지만 해준은 타구를 바라보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파울이다.
'슬라이더라고 생각했는데..'
각이 덜 꺾이고, 생각보다 빠르게 밀려 들어온 공.
덕분에 히팅 포인트와 타이밍이 동시에 어긋나버렸다.
'실투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구속의 빠름이 설명되지 않는다. 해준은 폴대를 살짝 벗겨가며 관중석 상단에 떨어지는 타구에서 고개를 돌렸다.
초구는 선전 포고와 같았던 벼락같은 스트라이크.
2구는 그 선전 포고에 맞대응하듯, 아슬아슬하게 폴대를 비껴가는 대형 파울 홈런.
눈 깜짝할 새에 진행된 한국 최고의 투수와 타자의 본격적인 맞대결에 관중석에서는 웅성거림을 넘어선 함성들이 터져나왔다.
-최고다!
-그래, 이게 야구지! 배가도 생각 잘했다. 사내새끼가 그렇게 도망만 다니면 쓰나!
-방금 초구 속도 본 사람? 100구 넘진 선발투수가 던질 공 속도라고 저게!
긴박하게 진행되면서도, 해준의 타석만 되면 공기 빠진 풍선처럼 푸스스 빠지곤 했던 경기장의 긴장감.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 두 명을 휘감아가기 시작하는 관객들의 끈적한 시선에 배성환은 혀를 한차례 할짝댔다.
타구가 맞아나가는 순간, 치솟은 긴장으로 바짝 말라버린 입술.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짜릿함이 온몸을 타고 사지육신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대단한 놈이야.'
평소와 같은 슬라이더를 던졌다면 꼼짝없이 넘어가 버렸을 것이다. 한 달의 공백 기간 따위는 저 멀리 던져버린 날카로운 스윙.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최고를 상대한다는 긴장, 초조, 불안, 불확신. 이것들을 이겨낸 뒤에 찾아올 쾌락과 같은 성취감을 알고 있었으니까.
동시에 엔돌핀이 치솟기 시작했다.
더 큰 쾌감을 불러들이기 위한 정신적 고양 상태.
경쟁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고, 그 뒤에 찾아올 더 큰 즐거움을 알고 있는 배성환의 조급함과 갈증이 더욱 깊어져 갔다.
'제대로 죽여주마.'
배성환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해준을 바라보았다.
+++
'지금이다.'
해준은 그 모습을 보며 배트 그립을 잡고 있는 손아귀의 힘을 높여갔다. 끼이익- 송진스틱을 바른 부분과 장갑이 맞닿은 부분이 기분 좋은 마찰음을 만들어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기로 한 상대 팀의 에이스.
기다리고, 기다리던 끝에 그 최고조에 다다른 기세를 끊어내 버릴 기회가 찾아왔다.
'한국시리즈 1차전. 이 게임을 가져가는 쪽이 80%의 확률을 가져가지.'
2026년 KBO.
40년이 넘는 역사 동안 쌓여온 데이터는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승리한 팀이 매우 높은 확률로 시리즈 전체를 가져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회까지 이르는 동안 별다른 활약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해준. 도루와 수비에서는 여전히 빛이 나고 있었지만, 타격에서만큼은 아니었다.
'타자란 포지션은 승부의 여부를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어. 그것만큼 답답한 것도 없지.'
이미 리그를 벗어난 규격 외 존재로 성장해버린 순간부터, 해준은 자신이 KBO에서 타자로서 불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타자란 결국 투수와 맞붙는 그 찰나의 순간에 극적으로 빛이 나는 법.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맞이할 기회가 극단적으로 줄어들며, 투수들은 해준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우리는 더 이상 너를 상대하지 않는다고.
'그나마 상대가 배성환정도가 아니라면 이런 제대로 된 타격 기회도 오지 않았겠지.'
9월 후반에 들어서는 만루에서도 거리낌 없이 고의사구를 지시하는 상대 팀의 벤치들.
그것이 한국시리즈라고 다를 리 없었다.
오히려, 7회까지의 배성환처럼 더욱 철저하게 배척했으면 했지.
그렇기에 해준은 오히려 배성환이 자신과의 승부를 3번이나 피했음에도 상대가 그라는 것에 대해 감사했다.
적어도 한 번쯤은 이런 빛이 날 기회를 주었으니까.
"흐으읍!"
배성환이 다시 한번 투구판을 박차며 공을 때려냈다. 홈플레이트 하단 바깥쪽으로 파고드는 궤적.
따아악-!
해준은 망설임 없이 그 공을 때려냈다.
"파울!"
그리고, 결과는 파울.
'.. 그나저나 커터라니.'
손아귀를 울려오는 기분 나쁜 감각에 해준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배성환의 기존 레파토리에는 없던 무기였다. 감추고 감춰, 자신과의 단 한 번의 타석에서 써먹기 위해 꺼내든 새로운 송곳니. 그만큼 배성환이 칼을 갈아왔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정타를 때려내긴 힘들겠어.'
게다가 한국 최고의 우완 에이스인만큼 그 수준도 만만치 않았다. 아웃라이어 중 커터와 관련된 인물은 없는 만큼 대응하기 힘든 카운터어택.
그만큼 배성환의 이번 수는 궤를 달리하는 정확도와 패스트볼에 대한 감각만으로 어느 정도 버텨오던 해준의 역량을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관중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카운트가 계속 몰려있어.
-투스트라이크 상태에서 미친 듯이 몰아붙이는군. 강해준이 이렇게까지 몰렸던 상황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기억도 안 나네. 그 전에 끝나버려서.
전광판에서 멈춘 채 움직이지 않은 0-2의 카운트.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배성환이 해준을 몰아붙이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해준의 열세라 판단됐던 그 자료가.
따아악-!
"파울!"
따아아악-!
"파울!"
끊임없이 이어지자, 눈치가 빠른 몇몇 사람들은 이상함을 눈치챘다. 이미 표정이 굳은 상태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던지는 배성환, 그에 반해 지나치게 여유로운 해준.
팽팽했던 기세가 어느새 한 측을 향해 기울고 있었으니까.
-.. 몰려있는게.. 강해준이 아니라 배성환이야?
-왜 아직도 못 끝내는 거야?
-투스트라이크 이후에 벌써 파울만 7개야.
-벌써 110구를 넘겼어. 힘도 떨어지는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술렁거림이 퍼져나가기 시작하며 경기가 명백한 이상기류를 띄기 시작했다. 한국시리즈 1차전. 이번 경기의 흐름을 가져오느냐, 마느냐가 걸린 이 순간.
한쪽은 기세가 급속도로 죽어가는 반면, 다른 한 쪽은 그 기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
따아악-!
다시 한번 파열음이 울려퍼졌다.
카운트는 여전히 0-2.
여전히 해준은 여유를 잃지 않으면서도,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이상적인 멘탈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언제까지 그것만 던질 건 아니잖아?'
그리고, 차분히 기다렸다.
이제는 힘을 잃은 먹잇감이 버티기를 포기하고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늘어지는 그 순간을.
'분명 언젠간 온다.'
자신이 때려낼 수 있는 최적의 코스와 구종이.
그리고, 그때까지 배성환의 커터 공세를 버텨낸다면 자신의 승리였다. 게다가 배성환의 커터에도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리한 궤적, 커터라곤 믿기지 않은 각도, 꿈틀거리는 공의 더러움, 뛰어난 제구.
언뜻 보기에는 모든 것을 갖춘 그의 신무기.
해준은 그 완벽함에서 불안함을 발견한 지 오래였다.
'그래, 그 각도와 제구가 문제지.'
교묘하게 보더 라인을 노리는 듯 날아오다, 크게 휙- 하고 벗어나는 궤적들. 패스트볼이라고 생각하고 휘두른다면 헛스윙 삼진이 나올 수밖에 없는 코스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약점을 만들었다.
[보로디미르의 배팅 센스]
*스트라이크존 외부 구역을 공략 시, 안타 확률이 상승합니다.
*현재 감각 레벨: 웨이스트Waste(70)
이미 믿기지 않은 영역까지 넘실거리며 뻗어나간 상태인 해준의 스트라이크존 바깥 공략 영역.
그리고, 그런 자신의 감각이 걸치는 끝으로 빠져나가는 공들.
그 두 가지가 절묘하게 걸쳐 파울을 양산해내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스트라이크존에 꽂으면 결과라도 나왔겠지.'
그리고, 그 결과는 높은 확률로 땅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배성환은 편집증적인 집착을 보이며 스트라이크존 바깥쪽을 고집하는 상태. 포수 전용진이 이미 한 차례 마운드를 방문했지만 그 고집은 꺾일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지.'
이미 110구를 훌쩍 넘긴 투구수.
스스로의 체력이 급속도로 깎여나가고 있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왔다!'
평소보다 오래 사인을 나눈 끝에 고개를 끄덕이는 배성환을 본 해준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꾸욱-
그 어느 때보다 있는 힘껏 실밥을 누르는 손가락. 꽉 다문 입술. 다시 한번 결의가 단단하게 솟구치는 눈빛.
타앗-!
떨어졌던 힘을 보충하기 위해 평소보다 큰 동작으로 투구판을 박차는 움직임까지.
배성환이 이 지겹게 이어지는 사투를 끝내기 위해 승부수를 걸어온다는 소리였다.
"흐읍!"
그 순간을 감지한 해준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어올랐다.
축발이 몸을 밀어내며, 무게중심이 폭발적으로 앞으로 쏠리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전진이 이루어지는 하체. 동시에 테이크백이 생략되며 움직이는 배트.
하지만 닫힌 왼쪽 어깨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는 힘을 끝까지 억누른다. 그 순간 임계점에 도달한 힘의 축적.
피잉- 꼬인 스프링이 풀리듯, 허리가 순간적인 회전력을 동반한 채 돌아가며 그 힘 그대로 터트려버렸다.
따아아아아악-!
그리고, 해준은 배트를 던져버렸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와 함께 고막을 뒤흔들며 뇌간을 관통하는 관중들의 함성소리. 뒤이어 캐스터 한재오의 높은 텐션 중계가 전국의 가정집을 강타했다.
[갑니다! 갑니다! 이건 맞는 순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의 울분을 터트려버리는 강해준 선수의...!]
솔로홈런.
한국시리즈 1차전 8회 1사.
앞선 타석에서 볼넷만 3개를 얻어내며 잠잠한가 싶었던 해준의 배트가 마침내 폭발했다.
"강해준! 강해준! 강해준-!"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경기장을 뒤흔드는 세오레즈 팬들의 함성. 해준은 베이스를 돌며 그 함성에 대답하듯 오른팔을 크게 뻗어 관중석을 훑어갔다.
이제야 시작인 한국시리즈 1차전.
승기가 세오레즈 측으로 기울었지만, 앞으로도 험난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우승한다.'
해준은 뻗은 손끝을 타고 전해져오는 알 수 없는 울림에 그들의 우승을 확신했고.
'그리고 메이저리그로 간다.'
메이저리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 한국시리즈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