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전설의 대주자 (1)
과연 행크 그린이었다.
상대의 약점과 규칙의 허점을 이용한 파격적 움직임.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적인 면모가 다분했지만, 이 남자는 이와 같은 수많은 케이스를 성공시켜왔기에 최고라 불리고 있었다.
"포스팅을 건너뛰고 FA라.."
해준은 테이블을 툭툭 치며 고민에 빠졌다.
'달콤한 이야기이긴 하다.'
어느 선수가 FA를 마다하고 포스팅을 선택할까.
다만 과정을 들은 해준은 걸리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 보였다.
'KBO에서 계약 해지를 승인해 줄 것인가가 첫 번째.'
FA 진출을 위한 방법은 두 가지.
상호계약해지, 혹은 선수에 의한 일방적 계약 해지였다.
오광녹이 가져온 자료를 이용한다면 이 두 가지 모두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행크의 설명이었고.
하지만 해준은 이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행크는 분명 최고의 에이전트일 테지만 이 나라를 너무 몰라.'
계약과 신용 사회라 불리는 미국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한국은 아니었다.
구단들의 이익 관계가 첨예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KBO.
그런 그들이 상호계약해지를 통한 변칙적 진출을 순순히 허락해줄 것인가.
세오레즈를 움직여 상호계약해지를 끌어내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결국 KBO에서 승인이 떨어지지 않으면 모든 것은 허사다.
물론 행크는 언론을 통해 KBO를 움직일 것이라 자신했다. 하지만 해준은 고개를 저었다.
'언론 플레이로 KBO를 움직인다? 남은 9개 구단이 똘똘 뭉쳐버리면 불가능하지.'
그들은 이런 식의 선례를 남기는 것을 극도로 꺼려왔다.
당연히 이를 악물고 버티기로 할 것이고, 그렇게 작정한 그들만큼 독한 존재도 없다. 거기서부터 두 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선제공격에 실패한다면 그다음부터는 시간 싸움으로 넘어간다.'
포스팅 요청 기간은 11월 1일부터 12월 5일로 한 달 남짓에 불과하다.
즉, 일단 한번 싸움에 돌입하고 나면 포스팅의 기회는 포기해야 한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제소한다 해도 그 시간 안에 법정에서 원하는 결정을 끌어낼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그때부터는 어떻게든 FA자격을 취득해야 한다.
하지만 악착같이 방어에 전념할 것이 뻔한 세오레즈와 KBO의 가드를 뚫고 결정타를 먹일 수 있을까?
이 싸움은 일단 시작한 순간부터 진흙탕과 다름없다.
온갖 언론 플레이, 법정 분쟁, 각종 구설수까지.
물론 명분은 자신에게 있는 만큼 승리를 확신한다.
문제는 언제 그 승리가 확정될 것이냐. 그것뿐.
하지만 1월을 넘어 2월, 그렇게 3월까지 질질 끌려간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준은 승자, KBO는 패자가 되겠지만 그 얼굴에 떠오른 미소의 주인은 반대가 될 것이 뻔하니까.
'소머리를 내리치는 것과 같지.'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소를 잡기 위해서는 단숨에 숨통을 끊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근육이 경직되고, 고기는 상하며, 주변은 온갖 피로 점철된다.
-백정의 목표는 소의 생명이 아니라 질 좋은 고기임을 명심해야 한다.
어설프게 소의 목숨을 끊으려던 백정은 소도 잃고 고기도 잃게 된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법적 분쟁에 들어간 순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할 팀 분위기.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투타 전력 모두가 올해가 최고조다.'
이대로만 간다면 높은 확률로 우승을 바라볼 수 있다.
게다가 해준의 정체성은 매우 확고했다.
'그리고 난 야구선수다.'
야구선수는 존재 이유? 오로지 우승이다.
2등은 기억되지 않고, 1등만이 모든 영광과 관심을 사로잡는 경쟁 사회의 최고점에서 살아가는 야구선수.
그런 자신이 메이저리그로 가기 위해 우승을 바라보는 팀 분위기를 망쳐버린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누구의 잘못이냐를 떠나서 애초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해준이 결론을 내렸다.
"FA에 대해서는 전면 보류합니다. 다른 문제를 떠나서 팀이 흔들리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요."
해준이 결론을 내리길 기다리던 오광녹.
그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형! 그게 무슨 소리.."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으니까.
구단의 잘못은 명백했고, 그에 대해서 해준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그가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한다?
팀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오광녹은 희생정신도 그 정도면 위인급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그런 개인적 문제로 접근할 게 아니오. 우승? 중요하지.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팀이 정상으로 굴러갈 때의 이야기요."
행크 또한 그런 해준을 만류했다.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
비즈니스맨으로서 해준의 생각은 너무나 동양적 사고방식, 그중에서 올드스쿨이나 할법한 생각으로 보였다.
그 모습에 해준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으니까.
하지만 명백하게 오해였다.
"다들 무슨 생각하시는 겁니까?"
해준은 그들의 생각을 부정하며 말했다.
"전 그런 멍청이가 아닙니다."
자신이 팀 분위기를 생각하는 것은 팀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에 불과했다.
'난 증명하고 싶다.'
자신을 6년간 바라봐온 수많은 팬들.
그들 앞에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을 뿐이다.
나를 믿어온 당신들이 옳았고, 나를 비난하고 괴롭혀온 당신들은 틀렸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할 최고의 방법은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것뿐.
그를 위해서 자신을 기만한 구단에 대한 처벌을 잠시 미뤄두는 것뿐이었다.
행크는 그런 해준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잠시나마 러시아워에 갇힌 폐차 같았는데, 그저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위해 속도를 줄이는 포르쉐였군.'
안도의 한숨을 쉰 행크는 설득을 시작했다.
클라이언트의 생각이 그렇다면 더더욱 남은 길은 FA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지금부터 움직여야 했다. 우승한 뒤라면 늦어도 너무 늦다.
"미스터 강, 당신의 생각은 잘 알겠소.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부터 차근차근.."
언론 플레이의 사전 작업에 들어가는 시간, 계약서의 헛점, 세오레즈 측의 실수, 법적 분쟁을 최대한 빠르게 해결할 방법까지.
행크의 입에서 다시 한번 온갖 상황을 가정한 계획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말을 물끄러미 듣고만 있던 해준이 갑작스레 물었다.
"가드를 굳히는 상대를 어떻게 쓰러트려야 하는지 아십니까?"
난데없는 물음.
행크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그의 클라이언트가 심각한 대화 중에 헛소리를 내뱉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거로군.'
대답 속에서 행크는 평소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그야 가드가 풀릴 때까지 두드려야지. 팔이 몸 전체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머리를 가리면 옆구리를, 몸통을 가리면 머리를. 몇 번이고 두들기다 보면 웬만한 놈들은 쓰러지기 마련이오."
해준이 대답했다.
"하지만 상대의 맷집은 너무 단단합니다. 12라운드까지 두들겨도 버틸 수 있는 체력이 있는 상대에요. 그럴 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심지어 판정으로 끌고 간다면 우리가 진 것이나 마찬가지일 때는요?"
"...그거야."
행크 그린의 동공이 번뜩였다.
해준이 말하고 싶어 하는 바를 깨달았으니까.
해준이 이어 말했다.
"어떻게든 KO는 시켜야겠고, 그렇다고 조급하게 상대의 가드를 두드려봐야 그 방어는 더 단단해지기만 할 겁니다. 그럴 땐 상대가..."
그리고 행크가 그 말을 이어받았다.
"스스로 가드를 풀고 나오게 만든다?"
그제야 해준은 씨익 웃어 보였다.
"바로 그겁니다."
그가 팔을 내린다는 것은 공격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상대의 숨통을 일격에 끊어버리는, 숙련된 백정의 칼과 같은 날카로움을 뽐낼 기회를 얻기 위해서일 뿐.
행크가 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건..."
그리고 이어진 해준의 설명.
행크 그린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숙련된 에이전트였던 자신조차 놓쳤던 것을 해준이 알아차리고 제안했으니까.
"이렇게 간단하다니... 왜 진작에 눈치채질 못했지?"
"간혹 그럴 때가 있죠. 간단한 것이지만 아무도 알지 못할 때가. 너무 당연한 일이라 상정 자체를 하지 않는 일말이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확실히 상정 외다.
예상치 못한 일격.
오히려 정면 대결에서 세오레즈를 때려내는 것보다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지도 몰랐다.
KBO? 나서지도 못하고 게임은 끝나 있을 것이다.
시즌 중 괜한 풍파를 일으키지 않고 우승을 바라는 해준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시나리오.
'하지만 이 모든 건 미스터 강이 한 가지 위험 부담을 감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어떤 선수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는다. 에이전트 입장에서도 말리고 싶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행크는 이번만큼은 해준의 선택에 따르기로 결심했다.
'나로서도 손해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유형의 선수.
그런 선수가 어디까지 오를 수 있을까 궁금했고, 그렇기에 행크는 다소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그와 동행하고 싶었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딱 그가 살아온 방식과 같았다.
'이런 위험 부담을 감수한다는 것은 이겨낼 자신이 있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이 프라이드만큼이나 실력이 따라준다면...'
해준을 바라보는 행크 그린의 시선이 살짝 변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 사실이 알려지고 나면 KBO와 세오레즈, 언론 모두가 난리 날 것이 분명했다. 메이저리그와 선수협조차 마찬가지.
그리고 이 남자는 그런 그들의 입방아를 모두 실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래, 원래는 이런 게 야구였다.'
비즈니스니, 데이터를 이용한 몸값 협상이니, 몇 년의 장기 계약이니 해도.
결국 최고의 실력을 갖춘 선수만이 모든 것을 쟁취하는 사회.
'...이런 남자는 찾아보기 힘들지.'
행크 그린이 내심 감탄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결국 지금 그의 클라이언트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구차한 싸움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간단하군."
야구 외적인 것보다는, 야구 그 자체에 집중하도록 서포트 하는 것.
해준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소산 그룹과의 광고, 쏟아지는 스폰서 문의, 세금 처리 문제까지. 에이전트를 이용해 처리할 일은 많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저는..."
해준의 입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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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해준은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제대로 된 공을 때려낸 감각이 너무 오래전이야.'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후속 타자들의 부진, 차라리 볼넷을 내주는 것이 나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장타율, 하락세를 그리는 타격 사이클, 리그를 지배하는 데서 오는 견제, 타고투저를 완화한다 치고 비정상적으로 넓어진 스트라이크존까지.
높이 올라가려 하면 할수록, 밑에서 당기는 중력이 강해지는 것처럼.
리그의 모든 요소가 자신을 잡아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슬슬 후속 타자들이 살아나는 것 같아서 한숨 돌렸지만..'
체력 문제로 부진하던 2번 타자 장건우, 부상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3번 유장천과 4번 조병민까지.
다행히 그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며 견제는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사이 해준의 성적은 하락세를 그리고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긴 해.'
그 어떤 타자도 끊임없는 상승세를 기록할 순 없다.
역사상 최고의 야구선수였던 이들조차 삼진을 다섯 개씩 뭉텅이로 당하는 날도 있고, 저렇게 무기력할 수 있을까 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성적이 내려가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해준은 그 사실을 부정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난 이 정도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아웃라이어 시스템(Outlier System).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해준의 야구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이것.
남들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만큼, 남들이 가보지 못한 영역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해준은 끊임없이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이 시스템을 더 잘 활용할 수 있을까?'
가만히 앉아 시스템이 주는 것에만 만족하는 것은 배부른 돼지와 같았다. 어떻게든 자신이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해준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인스트럭터를 구할까 합니다."
"인스트럭터?"
행크의 눈빛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시즌 중에 개인 인스트럭터를 구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해준의 소속이 한국프로야구리그라는 것을 감안 하면 더욱 그랬다.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도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자신이 가진 것은 아웃라이어 시스템.
그동안은 그 시스템이 링크해주는 사람에게 깃들거나, 상대하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아웃라이어를 찾아간다면 어떨까?
그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면?
아무런 효과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거야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아웃라이어를 찾아보자.'
수비에서 독보적이었던 자신처럼 분명히 특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아웃라이어가 있었을 것이다.
멕시코, 유럽, 대만. 야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 가능성을 열려있었다.
'어디에 있더라도 상관없다.'
최고의 에이전트인 행크 그린이라면 반드시 그를 인스트럭터로 데려올 테니까.
'하지만 지금 만날 사람은 정해져있다.'
해준은 행크에게 아웃라이어들의 조사를 부탁하며, 지금 당장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을 떠올렸다.
'대주자의 전설.'
오로지 다리 하나만으로 팬들의 가슴 속 깊이 기억되고 있는 아웃라이어.
해준에게는 그 사람이 필요했다.
"구해형. 그 사람을 제 개인 인스트럭터로 고용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