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진짜 떠서 왔네!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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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업계에서 연기 선생으로 유명한 배우가 스타급도 아닌 무명배우에게 공짜로 연기를 코치해주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친인척도 이렇게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사이를 두고, 신지균이 대답했다.
“네 노력들은 순수하지. 옆에서 안 봐도 알아. 네가 연기 연습에 얼마나 진심을 다하는지.”
“누구나 다 하는 노력인 걸요.”
“허황된 욕망이 없잖아.”
“......?”
“누구나 다 알아봐주는 유명인이 되면 좋겠다. 슈퍼스타가 되었으면 좋겠다. 7억 받는 배우가 되고 싶다. 누구누구처럼 잘 나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할 수밖에 없다. 그런 거야?”
아니다.
배우 일을 하려면 당연히 연기가 기본이니까, 연기를 잘하고 싶어서, 노력한 만큼 성취가 있으니까.
공부, 비보잉, 트릭킹, 연기훈련 모두 진심으로 하지 않으면 들인 만큼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더욱이 이온은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거다.
“노인도 아이의 마음을 가지면 젊게 살고, 아이도 노인의 마음을 가지면 늙게 산다고 하잖아. 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면 기적적인 일들을 해낼 수 있다고 믿어. 사람들이 바보 같다고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해도 나는 끝내 인내하고 매일매일 꿈꾸면서 광대놀이를 하고 있어. 성격이 모나고 차가운 사람도 어떤 영화나 연극 혹은 드라마를 보고 감동하기도 하잖아. 나는 그런 감동을 줄 수 있는 예술가를 하나라도 더 관객들 앞에 세우고 싶은 거야. 쪽팔리게 연기파 배우니 같은 개소리 듣는 배우가 아니라. 그냥 순수한 배우 말이다.”
이온이 얼굴을 붉혔다.
스스로 순수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재고 따지고 비교해보고 조사하는데.
“나 때만 해도 배우들이 저마다 사연들이 있었어. 지방에서 올라와서 어렵게 어렵게 극단생활하면서 연기를 배우고 잡일도 하고 밑바닥부터 무대에 서고... 다소 천편일률적인 사연팔이로 들리겠지만. 분명히 배우들마다 짠하다고 할까 때로는 감동적인 스토리들이 있었지. 요새는 그런 게 좀 덜 한 것 같아. 마치 우리나라 스포츠계처럼 학교나 학원에서 엘리트들을 찍어내는 것 같아.”
잠시 말을 멈췄던 신지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제일 어이가 없는 표현이 실력파 가수니 연기파 배우니 하는 말이야.”
아이러니의 극치다.
“연기파 배우? 그런 덜떨어진 말이 왜 나온 것일까. 배우는 연기하는 사람이잖아. 연기 분야에 프로페셔널이란 뜻이지. 그런데 연기파 배우라니. 한 사람의 배우로서 그런 표현이 나올 때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어. 관객들을 실망시킨 배우들, 아니 배우라는 이름을 빌려 쓴 이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저런 말들이 나온 것일까.”
이온은 지은 죄도 없는데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세상에 성격파 배우라는 말이 어디 있어? 촬영장에서 성질이 개 같아서 진상을 부리는 배우를 그렇게 부르지 않잖아. 메소드 연기술에 기반을 둔 배우를 지칭하기 위해 기자들이 멋대로 가져다 붙인 말이지. 이온이 너도 이젠 알지?”
“네. 한국의 영화기자나 비평가들이 명명한 배우 가운데 메소드 연기를 펼치지 않는 배우도 많더라고요.”
실력파 배우라는 용어는 배우의 연기력을 칭찬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 아니다.
기본조차 안 되어 있는 배우를 조롱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그러니 배우에게 실력파니 성격파니 칭호를 붙이는 것은 실례다.
“배우가 배우다워야 하는 이유를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거야. 나는 오재순 선생님처럼 누굴 가르칠만한 연륜도 그릇도 아니지만, 너희들보다 앞서 걸어본 배우 선배로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거니까. 적어도 내가 데리고 다니며 등산도 시키고 술도 먹이고 낚시도 함께 하는 후배들에게 연기파 배우가 얼마나 부끄러운 말인지 알려주고 싶을 뿐이야.”
신지균의 말을 들은 이온은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앞으로 자신은 그의 수제자라고 일컫는 배우들과 비교가 될 것이다.
연기천재들과 함께 언급된다는 것은 영광된 일이다.
한편으로 자신이 연기로 욕을 먹으면 신지균을 비롯해 그의 수제자들인 선배들까지 부끄럽게 만들 수가 있다.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이온아~”
손주를 부르는 것처럼 자상한 목소리다.
이온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선배라고 불러라. 이제 네 선생 안 할란다.”
“......!”
“많은 위대한 배우들, 창의적인 사람들은 다르게 보고, 다르게 해석하고, 그 만의 길을 걸었던 이들이야. 당당한 자신만의 해석. 못난이들의 지탄을 묵묵히 견뎌내는 담담함. 배우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뭔 줄 알아?”
“....모르겠어요.”
“고독이야. 그 놈과 친해져야 돼.”
“.......”
“다른 색과 섞이려 노력하기보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또 해석하는지.....용기를 갖고 연기에 녹여내야 해.”
“네.”
“사람들이 그러잖아. 나 자신이 브랜드여야 하는 시대라고. 그런 사람들이 환영 받는 시대라고. 나이도, 성별도, 성적취향도, 지역도, 나라도, 피부색도 다 중요한 게 아닌. 나 자신이란게 제일 중요한 시대... 누군가와 비교해서 뛰어나야 한다는 강박도 내려놓고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며 사는 사람. 나 답게 사는 사람.”
마치 하산을 앞 둔 제자에게 스승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 같았다.
“재밌게 살자.”
“.......”
“앞으로도 함께 재밌게 살아보자.”
“네! 선배님!”
이온은 안심했다.
다행이다.
그리고 감사했다.
이만 하면 됐다고 말하지 않아서.
앞으로도 함께 하자고 해줘서.
“술 한 잔 하러 가시죠.”
“술도 안 마시는 놈이.... 너랑 마시면 재미없어.”
“단비랑 공연 끝나서 놀고 있는 연극하는 형들 연락할까요?”
“전화 해봐.”
곧바로 비상연락망(?)이 가동되었다.
당장 대학로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던 연극배우들이 모여들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이온에게는 많은 발전이 있었다.
먼저 연기력 면에서 ‘발연기’ 소리는 면할 정도가 되었다.
기술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에서 또래 배우들 평균을 넘어설 정도는 된다.
최근에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시간을 줄이고 철학이나 심리학 서적을 주로 읽었다.
‘배우는 많이 알아야 한다.’
신지균의 지론처럼 아는 만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스승이 없었다면 연기 이론서적을 붙잡고 기술적인 면에 집착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신지균이라는 좋은 스승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각도로 연기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격려와 응원으로 한층 여유로운 마음자세를 지닐 수가 있었다.
✻ ✻ ✻
야옹~
클로이의 울음소리가 이온의 귓가를 맴돌았다.
핥짝핥짝.
클로이가 이온의 얼굴을 핥았다.
이온은 손을 뻗어 클로이를 밀어냈다.
열흘 넘게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나타난 이온에게 클로이가 유난히 집착했다.
이온이 클로이를 붙잡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후.”
가볍게 한숨을 쉰 이온이 이불을 걷고 침대가에 걸터앉았다.
클로이에게 부비부비를 한 후 놓아줬다.
침대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온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다들 술통을 따로 하나씩 차고 태어난 건지......”
연극배우들의 술자리를 보면 정말 다들 주당들이 따로 없다.
주당이 아니면 연극배우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연극을 하다 보니 저절로 주당이 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신지균과 어울리는 이들만 특별히 술을 잘 마시는 것인지.
정말 질릴 정도로 술을 잘 마신다.
그런 이들과 어울리다보니 친구 단비 역시 주당이 된 것 같았다.
고등학교때까지는 단비가 주당으로 거듭 태어날 것이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거실로 나오자, 누나 이슬이 출근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슬이 방금 간 야채주스를 꿀꺽꿀꺽 마셨다.
“나 마실 주스도 있어?”
“드라마 촬영도 끝났고, 이제 스턴트맨도 안 한다며?”
“응.”
“이제 맛있는 것 좀 먹어도 되지 않아?”
“<아이돌> 시즌2 계약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서 당분간 식단 관리해야 돼. 한 번 밸런스 깨지면 복구하는 게 더 힘들어.”
이슬이 믹서기에 남은 야채주스를 컵에 따랐다.
이온이 컵을 건네받아 단숨에 마셔버렸다.
“누가 보면 프로야구나 축구 선수인 줄.”
“직업 배우도 따지고 보면 프로선수와 다를 거 없지. 자리 관리 안 하면 개망하는 똑같아.”
“그것도 그렇다. 그래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안쓰러워서 그러지.”
“막상 작업 들어가면 돼지처럼 이것저것 많이 챙겨 먹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렇다면 다행이고.”
이온이 다시 한 번 기지개를 켰다.
“아침 댓바람부터 운동 가게?”
“호수공원 한 바퀴 가볍게 돌고 올까 해서....”
“아침은?”
“먹었잖아.”
“야채주스 한 컵 가지고 되겠어?”
“점심에 맛있는 거 먹겠지.”
“아참. 오늘 기획사 대표 만나기로 했지?”
“응.”
“매니저라. 이제부터 울 이온이 호사 누리겠네.”
“호사는 무슨.”
“잘 다녀와~.”
“누나도 출근 잘 하고. 저녁도 먹고 들어올지 몰라.”
“어련히 잘하겠냐만 꼼꼼하게, 확실하게 따져보고! 알겠지?”
“응.”
이온이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아파트를 나와 호수공원까지 가볍게 뛰어 갔다.
아침운동은 군 생활을 제외하고 수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해오던 일상이다.
호수공원을 돌기 전에 간단한 스트레칭과 물구나무서기를 비롯한 트릭킹 기본 세트 훈련을 했다.
한 시간 정도 신체를 달군 후에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신체 훈련이 끝나고 바로 화술훈련에 들어갔다.
이것 역시 매일같이 해오고 있는 훈련이라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아직 일상생활에서 화술을 응용하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다만 발성, 화술의 기본기가 탄탄해지기 시작하면서 평소 쓰는 목소리도 또렷하고 멋들어지게 변화했다.
소위 ‘카메라 마사지‘를 받으면서 외모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고.
특히 촬영 내내 메이크업팀으로부터 관리 비법을 전수받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은 일상생활에서 꾸준히 하다 보니 몇 년 만에 보는 이들이 이온이 성형수술을 했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다만 깊고 또렷해진 음성 변화는 쉽게 눈치 채지 못했다.
뮤지컬 배우인 단비는 이온의 그런 변화를 즉각적으로 알아차렸지만, 일반인 친구들은 ‘이 놈 목소리가 이렇게 좋았었나?’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정도다.
암튼 호수공원에서 운동을 마친 이온이 집으로 돌아왔다.
누나는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
샤워를 하고 주방으로 온 이온이 아침 밥 대신 맛없는 야채주스를 다시 만들어 먹었다.
이온은 패션에 신경을 잘 안 쓴다.
여름철에는 반바지에 나시티 하나 입고 나가면 시선을 절로 받는다.
키도 크고 신체 비율도 좋고 은근히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아무렇게나 입어도 태가 난다.
이온이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티셔츠와 면바지 그리고 클래식한 스니커즈.
연한 톤의 톤앤톤 코디를 했다.
백팩에는 혹시 몰라 트레이닝복 한 벌과 운동화를 챙겼다.
강남에 가는 김에 선배들이 운영하는 연습실에 놀러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안에는 교복은 입은 여학생이 타고 있었다.
“......”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는 여고생이 자꾸 이온을 힐끔거렸다.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이온이 홍성욱과 톡을 주고받는데 집중했다.
- 출발 했어요?
┗ 지금 막 집을 나왔어요.
- 점심 같이 먹을 수 있죠?
┗ 네.
- 주소 다시 한 번 링크 걸어 놓을 게요.
┗ 이따 뵙겠습니다.
이온이 홍성욱이 링크 해준 지도앱을 확인했다.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일 층에 도착했다.
후다닥.
여고생이 먼저 엘리베이터를 벗어났다.
그런데 자꾸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고생은 괜히 톡에 정신팔린 척 하며 제자리에 멈췄다.
곁눈질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이온을 훔쳐보다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저기요!”
“......?”
“혹시.... <비객>에서... 악동이로 나온 배우....”
여고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온이 머쓱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와! 대박~ 대에박!”
여고생이 꺅꺅 거렸다.
“와~ 일산 산다고 하더니... 울 아파트에 살고 있었을 줄이야!”
“등교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은데? 괜찮아요?”
“저 예고 다녀요. 오늘 공연 참관하는 날이라 천천히 가도 되요.”
여고생이 매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돌려서 뒤적거리더니 공책과 펜을 꺼내서 이온에게 내밀었다.
“사인 좀 해주세요.”
“알아봐 줘서 고마워요.”
“제가 감사하죠. 이웃에 살아주셔서.”
“.......?”
이웃이라는 것이 그렇게 고마운 일인가.
이 아파트는 이온이 군 제대 후 계속해서 살고 있는 곳이다.
전에는 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이웃사촌이다.
유명인이 된 이전과 이후가 이렇게 달랐다.
이온은 아파트 현관 앞에서 사인을 해주었다.
“감사합니다!”
여고생이 꾸벅 인사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제 갈 길을 갔다.
이온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아파트 단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탔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강남행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차창에 기댔다.
푸른 하늘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여름도 끝물이다.
버스 승객들은 이온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이온을 알아본 여고생의 눈썰미가 대단한 것이다.
아직 이온은 촉망받는 신인, 그 이상이 아니었다.
팬카페가 개설되었다고 해서 유의미한 팬덤이 형성되었다고 보긴 힘들었다.
연예계는 거품이 많다.
남들이 ‘우쭈쭈‘ 한다고 붕 뜨다가는 욕 들어먹기 십상이다.
이온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버스가 강남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택시를 잡아 탄 이온이 선릉에서 가까운 칠 층짜리 건물 앞으로 왔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린 이온이 사무실 주변을 돌아봤다.
3호선과 7호선 지하철역에서도 그다지 멀지 않고, 대로변에서도 깊이 들어가지 않는 건물이었다.
‘그럴싸한데?’
아직 설립 초기였기에 어디 오피스텔부터 시작할 줄 알았다.
땅값도 비싼 곳에 번듯한 새 건물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이 자금력에 쪼들리지는 않는 모양이다.
간판에는 흰 바탕에 파란색 글씨로 FLEX-A Entertainment라는 영문이 박혀있었다.
언제까지 일지 알 순 없지만, 자신의 보금자리가 될 건물이다.
우두커니 서서 건물 외관을 감상하던 이온이 성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