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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배우-121화 (121/127)

〈 121화 〉 진짜 떠서 왔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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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이 지지 않고 받아쳤다.

“요즘은 견자단 팀이 더 잘 나가잖아요.”

“배우하겠다며?”

“액션배우 한다니까요.”

“많이 컸다?”

“성장판 닫힌 지가 언젠데요.”

권용찬이 한 대 칠 것처럼 손을 들어올렸다.

“확! 맞을래?”

이온이 ‘어이쿠‘ 피하는 시늉을 했다.

매니지먼트 계약과 관련해 액션아카데미의 권용찬 감독을 찾아뵙고 사정을 설명했다.

당연히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정색한 권용찬의 얼굴을 보고 이온이 진지한 태도로 돌아왔다.

“지금은 모두 해체된 중국의 무술팀을 따라할 생각은 없어요. 차라리 엉클 톰이라면 모를까?”

참고로 과거 홍콩 영화를 주름잡았던 유명 무술팀들 즉 성가반(성룡), 홍가반(홍금보), 유가반(유가량), 원가반(원화평)은 대부분 해체했다.

도제시스템, 열악한 근무여건, 형편없는 임금체계, 보스의 독식구조 등등.

홍콩영화가 저무는 패턴과 똑같았다.

한국영화 역시 그럴 위기가 있었다.

1980년대 암흑기를 거치며 1990년대 중반부터 모든 것이 리셋 된 후에 새롭게 판이 만들어지면서 홍콩이나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었다.

“엉클 톰?”

“톰 크루즈요.”

말이 필요 없는 할리우드의 살아있는 전설로 꼽히는 인물.

이온이 롤모델로 삼을 만 했다.

“학교는 어쩌려고? 기를 쓰고 졸업하려고 하지 않았나?”

“두 학기만 어찌어찌 버텨보려고요.”

“배우들 보니까 십년 만에 졸업하고 그러긴 하더라. 아깝긴 하지. 한국대 졸업장. 졸업장이든 자격증이든 뭐든 따놓으면 나중에 다 도움 될 때가 있겠지.”

연예계에서 한국대 졸업장이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차라리 명문대 이미지가 방해가 되면 몰라도.

“그래서. 핵심이 뭔데?”

“매니지먼트와 계약하더라도 액션배우로 활동하는 건 제가 우겨서 가능할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스턴트맨은 힘들 것 같아요.”

“배우 활동하는 놈이 남의 대역을 하는 것도 웃기지. 인마.”

“액션아카데미를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소속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대학교 수업 듣느라 체육관 나오지도 못하는 놈이 무슨 소속 타령이야.”

“......”

“까불지 말어.”

후우.

이온에게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럴 줄 알았다.

액션배우 정체성은 유지하고 싶었는데.

“계획 잘 세워서 괜찮은 소속사로 들어가. 액션연기는 배우로 활동하면서도 원 없이 할 수 있잖아.”

“......네.”

“그리고. 액션연기자협회 회원에서 탈퇴할 거냐?”

“강퇴만 안 당하면 계속 유지하고 싶습니다.”

“회비 잘 내고, 스턴트맨 이미지에 먹칠하는 큰 사고만 치지 않으면 퇴출 당할 일 없어.”

“그렇습니까?”

이온이 반색했다.

“네 성격이나 평소 행실로 봤을 때 불미스런 일로 언론에 오르내릴 것 같지도 않고, 앞으로 배우로 돈 잘 벌면 회비도 꼬박꼬박 낼 것이고. 협회에서 널 왜 자르겠냐?”

“감사합니다.”

“나한테 감사할 건 없고. 선배들 기분 안상하게 잘 이야기 하고.”

“어차피 매일 볼 감독님들이고 형들인데요. 매일은 힘들어도 자주 운동 하러 올 겁니다.”

“잘 나가는 놈이 어디서 공짜로.... 돈 내고 써!”

“넵!”

권용찬이 심통을 부린 것이다.

어떤 배우도 액션아카데미에서 돈을 지불하고 트레이닝을 받지 않는다.

가뜩이나 장신 스턴트더블이 귀한 상황이다.

적어도 10년은 신장 185 이상 배우 대역을 소화할 수 있는 후배가 액션아카데미를 떠나게 됐다.

이온에게 스턴트를 가르친 한참 선배 기수 송관효가 대역을 할 판이다.

후배가 잘된 것은 축하해주고 좋은 일이지만.

스턴트판만 놓고 보면 인재 하나를 놓친 셈이다.

‘저 놈 뽑아놨을 때 이렇게 될 줄 예상은 했지만.....’

권용찬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떠버렸다.

배우로 어중간할 싹수였다면, 단념시켜서 스턴트맨에 붙들어 놓으련만.

젊은 천재 배우들의 연기 스승이라는 신지균이 가르치는 아이다.

지금이 최고 전성기라고 할지라도 신지균에게 배운 대로 배우생활을 영위한다면 굶어죽을 걱정은 없을 것이다.

“이온아~”

“네. 감독님!”

“나중에 기깔 나는 다찌마리 영화 한 편 하자. 나랑. 알겠지?”

“영광이죠.”

“가 봐.”

“수고하십시오!”

이온이 넙죽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이온을 시기·질투하던 조현동 같은 이들이 배신자 프레임을 씌울 줄 알았다.

괜한 우려였다.

액션아카데미 동료들 반응은 우호적이었다.

이온이 완전히 이 판을 떠나는 것도 아니다.

액션캠프 출신이자 스턴트맨 출신 배우라는 타이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드라마나 영화 현장에서 자주 볼 수밖에 없다.

함께 체육관에서 땀 흘리고, 매일매일 합을 맞출 순 없지만, 동료라는 것엔 변함이 없다.

<비객>을 촬영할 때 무술팀과 어떻게 지냈는지 소문도 들었다.

후배들이 부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대체로 이온의 출세(?)를 환영하고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이온 역시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액션아카데미에서 계속해서 운동할 생각이다.

‘최신 액션 트렌드를 배울 수 있으니까.’

이온은 다음날 미리 전화로 기별한 뒤 신지균을 찾아갔다.

혜화동 극단 보름달 연습실.

신지균이 이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촬영이 고돼서 핼쑥해져 있을 줄 알았더니. 괜찮아 보이는 구나.”

“유럽답사 가서 푹 쉬고 와서 그런가 봐요.”

실제로 이온은 몇 주 전에 비해 훨씬 에너지가 넘쳐보였다.

“선생님, 약소하지만 기념품 좀 사왔습니다.”

이온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폴란드에서 구입한 기념품을 꺼내놓았다.

“폴란드가 이렇게 파란색 문양이 들어간 자기가 유명한가 보더라고요. 사모님 것까지 찻잔 세트 하고요. 비엘리츠카라는 소금광산에서 나온 암염으로 만든 바스 솔트에요.”

“대충 엽서나 사오지 뭐 하러 이 비싼 걸 사와?“

“현지에서는 그렇게 비싸지 않아요. 전반적으로 물가가 저렴하더라구요.”

신지균이 뽁뽁이에 쌓인 찻잔 세트를 풀어 살펴봤다.

“와이프가 좋아하겠어.”

“다행이네요.”

“소금은 반신욕하실 때 물에 풀면 근육이완에 좋다고 하네요.”

신지균이 찻잔과 소금을 한쪽으로 치워놓았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연기를 좀 볼까?”

<비객> 촬영과 유럽답사 등으로 이온이 연기 훈련을 소홀히 했을까봐 확인하려는 것이다.

“뭐로 할까요?”

“오랜만에 안톤 채홉으로 하자. 오디션이라고 생각하고 연기를 하도록 해.”

“작품은요?”

“<바냐삼촌> 중에 아무 것이나 마음에 드는 걸로.”

평소 연습하지 않았던 작품이다.

이온이 연습실 한 쪽에 놓여 있는 노트북을 가지고 돌아왔다.

노트북을 신지균에게 내밀었다.

“선생님이 지정해 주시죠.”

“알겠다. 준비 시간은 십 분이면 되겠지?”

“예.”

신지균이 연습실을 나갔다.

이온 혼자 연습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바냐삼촌 혹은 바냐아저씨(Dyadya Vanya).

<전원생활의 정경>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주인공 보이니츠키(바냐 삼촌)는 죽은 누이동생의 남편인 세레브랴코프 교수를 위하여, 누이동생의 딸 소냐와 함께 매부의 시골 토지를 일구며 살고 있다.

그런데 퇴직한 매부가 젊고 아름다운 후처 엘레나를 데리고 오랜만에 시골 영지로 돌아오자, 그 매부가 사실은 어리석은 속물임을 알고는 실망과 허탈에 빠진다.

게다가 그 고뇌는 엘레나에 대한 사모의 정이 싹트면서부터 한층 심각해진다.

한편, 바냐 삼촌의 친구인 아스토르프는 바쁜 진료생활 가운데서도 산가꾸기에 정열을 기울이는 몽상가적인 의사였는데, 남몰래 그를 사모하고 있는 소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엘레나의 매력에 정신이 팔린다.

이런 상황에서 세레브랴코프는 영지를 팔고 도회로 나가겠다고 선언한다.

희생과 헌신으로 보낸 반평생의 대가로, 결국 땅에서 쫓겨나게 된 바냐는 절망한 나머지 세레브랴코프를 권총으로 쏜다.

[25년 동안이나 난 두더지처럼 외출도 제대로 못하고 살아왔어. 우리의 생각과 감정, 그 모든 걸, 당신이라는 한 인간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거야. 낮에는 낮대로 당신 이야길 하고, 당신 일을 화제에 올리고, 당신을 우리의 자랑으로 삼고, 존경해하면서 당신의 그 엿 같은 이름을 부르곤 했지. 밤이면 또 밤대로, 당신의 글이 실린 잡지나 책 따위를 읽으면서 소중한 시간을 보냈던 거야..... 이제 그까짓 거. 다 쓰레기지만 말이야!]

<바냐 아저씨>는 리얼리즘 연극의 대가인 안톤 체호프의 4대 작품('갈매기', '세자매', '벚꽃동산') 중 하나다.

'어렵다', '지루하다', '흥행이 힘들다'는 편견 때문에 무대에 좀처럼 올려지지 않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게다가 이온이 연기하는 바냐는 40대 후반의 농부다.

[아직 이 땅에서 할 일이 있어!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은 망쳤어! 이 나이가 되도록 진정한 삶이 없었어. 나한테는 참 생활이 없었다구. 당신 덕분에.... 난 내 인생에 가장 좋은 시기를 몽땅 허비하고만 거야! 당신은 내 원수야!]

이온은 농부 바냐가 느끼는 상실감, 허탈감, 분노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연기에 몰입되어 잠시 ‘바냐’라는 인물의 탈을 쓸 수는 있다.

기술적으로는.

[한 평생을 허비하고 말았어. 나도 예전엔 재능도 있고, 영리하고, 용감한 사내였어. 만약에 내가 제대로 살아왔다면 쇼펜하우어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될 수 있었을지도 몰라. 쳇!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미치겠어.... 어머니, 저는 이제 절망이에예요.... 네? 어머니!]

이온으로서는 40대 후반의 농부가 절절하게 외치는 ‘내 삶이 없었다!’는 외침을 관객이 공감할 수 있도록 전달하기가 난망했다.

다만 바냐의 외침은 이온을 비롯해 현대인 모두가 피해갈 수 없는 삶의 실체라는 사실.

그 근본에는 '인간의 존재감'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평생 매부를 위해 일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바냐의 현실 그리고 그의 심정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아버지들과 닮아 보인다.

좀 더 확장하면 이온 또래의 청년 세대가 마주하고 있는 아이러니와 닮아있다.

원리 원칙대로 순조롭게만 가는 인생은 없다.

우리 인생에서 아이러니는 곳곳에 숨어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농부 바냐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서 절망하고 있는 또래 친구들의 상실감과 분노 그리고 허탈함을 담아내면 된다.

억지로 아버지 세대의 감정을 흉내 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연기가 대단해도 캐릭터만 가지고 이야기를 완성할 수는 없는 법이다.

캐릭터의 강렬함에서만 그친다면 이야기도 길을 잃는다.

짝짝짝.

신지균이 박수를 쳤다.

이온은 비교적 안톤 체홉스의 본연의 극에 맞는 연기를 선보였다.

'리얼리즘 연기란 무엇인가' 고민이 묻어있다.

이온이 최근 활동하는 TV 드라마가 사실적 연기를 보여주긴 하지만, 그 안에 내용이 너무 없다.

반면 사실주의 연기에서 배우는 '일거수일투족'이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이온은 그런 본연의 의미에 비교적 충실하려고 애쓴 태가 났다.

요즘엔 퍼포먼스성 연극이 많다.

시도하는 것도 좋고 양식 파괴도 좋다.

신지균은 기본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본에 충실 한 후, 양식파괴 연극이 시도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국연극의 진정한 다양성이 만들어진다고 믿었다.

“잘했다.”

칭찬에 이온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감사합니다.“

“<비객>에서 악동이 퇴장하는 방영분보다 연기가 또 늘은 것 같은데? 내가 더 뭘 가르쳐 줄 것이 없어. 정말 열심히 하고 있는 모양이다.”

“제 스스로 연기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훈련을 게을리 할 수가 없어요.”

“연기의 재능이 별 거 더냐? 제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큰 노력이 없으면 꽃을 피울 수 없어. 특히 너처럼 밑바닥부터 시작하지 않고 바로 큰 배역을 연기 한 상황에서 빠른 시간에 이 정도 성취를 얻는다는 건 재능이 있다는 거야.”

“하산하라는 말씀은 마세요.”

“앞으로는 너 자신과의 싸움이야. 일을 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를 빼고 끊임없이 본인 자신을 연구하고 단련해. 독서를 하든 영화를 보든 여행을 하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양한 경험을 하려고 노력해. 연기는 하루 훈련하면 하루만큼 좋아지고, 하루를 쉬면 이틀만큼 퇴보해.”

이온은 가슴 깊이 충고를 받아들였다.

“네. 선생님.”

비보잉이나 트릭킹도 마찬가지다.

하루를 쉬면 그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며칠 동안 반복 훈련을 해야 한다.

몸을 쓰는 것도 그런데, 감정을 다루는 것은 얼마나 더 예민할까.

“슬슬 매니지먼트와 계약을 해야지?”

“유럽답사 기간 고민을 많이 했어요.”

“결정은 했고?”

“죄송해요.”

“내가 있는 회사로 오지 않아도 돼.”

“컨택 온 기획사 중에 중견 매니지먼트가 몇 군데 있었어요. 그 회사들이 몇 년 전에 케이블 오디션 프로그램 조작과 관련 있던 회사였더라고요. 대기업 계열이라는 메리트가 있지만 아이돌 기획사에서 시작한 곳들이라 백화점 같아서 고민이 되더라고요.”

“계약금 많이 줄 텐데?”

“대신 제가 건 조건을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아요.”

신지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온이 내건 세 가지 조건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것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불이익이라는 것도 의미가 없어졌지만.

“홍 캐디가 만든 회사로 가려고?”

“제가 아무것도 모른 채 막 일을 시작할 때부터 가이드를 해주시기도 했고. 거기 회사에 서우일 선배님도 계셔서 배울 점이 많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서우일은 일명 빨간 양말 캐릭터로 미친 연기를 선보인 이후로 착실하게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채로운 필모그래피를 쌓아오면서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배우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한 배우다.

“맞아. 우일씨가 홍 캐디와 계약했었지?”

“작품을 함께 해야 곁에서 많이 배우겠지만. 같은 소속사에 있다 보면 이것저것 얻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 양반도 참 버라이어티한 무명생활을 겪었지. 이온이 네가 무명생활이 너무 짧아서 흔히 눈물 젖은 빵을 구경도 못해봤는데, 서우일 그 양반으로부터 배우로서 살아온 궤적을 참고할 수 있으면 도움 되는 것도 분명 있을 거야.”

“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이온이 불쑥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제게 대가 없는 호의를 베푸시잖아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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