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Before Sunrise.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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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학과 역사답사 일정이 모두 마무리됐다.
귀국할 일만 남았다.
폴란드를 떠나는 날 아침 일찍 한아름이 답사팀이 묵고 있는 호스텔로 찾아왔다.
“아침 일찍 무슨 일로.......?”
호스텔 카운터로 나온 이온이 의아해서 물었다.
“이거요.”
아름이 USB를 내밀었다.
USB를 건네받은 이온이 설명을 바라는 표정으로 아름을 쳐다봤다.
“문화원에서 촬영한 동영상하고 개인적으로 찍은 스틸이에요.”
“메일로 보내도 되는데....”
“파일 크기가 좀 커요. 5R사이즈부터 30R까지 넣었거든요.”
“......?”
“쉽게 말해서 탁상용 액자 있잖아요. 그 사이즈가 5R 사이즈라고 보면 되고요. 혹시 디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대형액자 사이즈 80×100도 작업해서 넣어놨어요.”
이온은 그런가보다 했지만, 사실 만만치 않은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요즘 사진은 촬영보다 후보정이 중요하다.
이온은 몰랐지만, 아름은 이온이 떠나기 전에 파일을 전달하기 위해서 하루를 꼬박 사진 보정작업에 매달렸다.
이온이 카운터 뒤편에 걸려 있는 시계를 쳐다봤다.
공항으로 출발하기까지 여유시간이 충분했다.
“혹시 아침 먹었어요?”
“아직......”
“같이 브런치 먹으러 갈래요?”
“......둘이서 만요?”
“구시가지 광장 노천 펍에서 뭔가를 먹어보고 싶었어요. 떠나기 전에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더라고요.”
“좋아요. 가요.”
“잠시 기다려요. 답사팀장에게 말하고 올 게요.”
✻ ✻ ✻
떠나는 날까지 날씨는 쾌청했다.
마지막으로 시내를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혼자 걸어가는 것이라면 청승 맞아 보였을 수 있겠지만, 둘이 걷다보니 쓸쓸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유럽으로 넘어와서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걷는 것이 처음이다.
약간은 간질간질한 느낌.
햇빛이 좋아서만은 아니다.
뭔가 묘한 감정의 편린들이 가슴을 콕콕 찔렀다.
그렇게 삼십 여분 정도를 걸어 도착한 구시가지 중앙광장.
북적북적.
왁자지껄.
정 중앙에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에 방패를 든 인어상(Pomnik Syrenki)을 둘러싸고 기념품 가게와 노천 식당들이 자리하고 있다.
바르샤바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뒤섞여 간식도 사먹고 다양한 물건을 구매하는 등 인파들로 북적거렸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다.
너무 예뻐서 관광객들의 기념 촬영이 끊이지 않는다.
이온과 아름이 알록달록 장난감 집 같은 건축물 앞으로 늘어서 있는 노천식당을 둘러봤다.
“아름씨도 바르샤바가 처음이에요?”
“세 번째에요. 펍에는 들어가 본적 없어요.”
“다 비슷비슷해 보이네요.”
“아무데나 가요.”
이온은 노천카페와 펍 밖에 걸려 있는 메뉴판을 꼼꼼히 따져본 후 가게 한 곳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동양인이 들어서자, 종업원들이 영어로 인사했다.
이온이 폴란드 인사말로 응수했다.
“진 도브리(좋은 날입니다).”
살짝 이른 시간이었지만 반절 정도는 이미 자리가 차있었다.
그리 붐비는 느낌은 아니다.
테이블마다 대형 파라솔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노천 펍 안은 마치 실내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은 인어상이 보이는 광장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여성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왔지만, 두 사람은 메뉴판을 보는 것이 아닌 노천 펍 곳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밖에서 보던 것과 느낌이 달랐다.
분명 광장 풍경은 아름다운 유럽이다.
헌데 파라솔 아래로 들어와 보니 한국의 야외 고기집과 다를 것이 없다.
손님 모두가 외국인이 아니었다면 한국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이온은 폴란드의 흔한 길거리 음식인 차피에칸키를 주문했다.
따뜻한 바게트빵 위에 폴란드 전통식 치즈를 비롯해 햄, 소시지, 옥수수, 버섯, 각종 야채 등이 올라가는 폴란드 대표 음식 중에 하나다.
바게트빵 하나 크기라서 하루 한끼로 먹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차피에칸키에 레몬에이드를 음료로 곁들여 먹으면 좋습니다.”
종업원이 친절하게 음료를 추천했다.
“그렇게 주세요.”
“아름씨는?”
“피에로기와 커피로 할 게요.”
피에로기는 한국의 만두와 비슷한 폴란드 전통음식이었다.
폴란드는 한국의 직행노선이 생긴 이후로 유럽에서 가성비 좋은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유럽이 전반적으로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데, 폴란드는 살짝 당황스러울 정도로 물가가 저렴하다.
고급 호텔의 메인 요리가 평균 13유로 정도로 합리적인 편이다.
숙박 역시 저렴해서 여행자 숙소는 10~15유로, 조식 포함된 호텔은 60유로 정도면 하루를 머물 수 있다.
시장이나 마켓 물가도 한국보다 저렴해서 배낭여행족 역시 착한 물가로 인해 자칫 지갑 속 현금이 ‘순삭’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맥주 한 캔이 0.5유로로 매우 저렴하다.
폴란드 전통 음식의 경우도 메뉴 하나당 가격이 대략 2~5유로다.
1유로가 대략 1380원 정도 하니 얼마나 싼지 알 수 있다.
“#@$%&^%!”
“&^%#@$~”
옆 테이블에서 폴란드 현지인 부부가 언쟁을 벌였다.
식사를 하러 와서 부부싸움이 벌어진 것 같다.
“......”
이온과 아름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너 없인 못 살겠어.
분명 저 부부도 한때 그랬을 것이다.
서로 반했던 순간의 그 설렘도 시간이 흘러가며 애증의 사이가 되어버린다.
설렘도 유통기한이 있는 모양인지.
설레던 사이가 어느새 익숙해져서 무덤덤해지는 익숙한 사이가 되어 서로 싫증을 내는 것만큼 안타까운 것은 없다.
사실 감정은 오래 지속되기 정말 힘들다.
이온은 연기를 해봐서 안다.
심지어 복수의 감정도 십년 이십년 잊고 살면 마모되고 만다.
설렘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랑이 뭘까.
순간의 설렘이 바래지 않도록 서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아닐까.
"......"
간단한 음식이지만, 두 사람은 천천히 식사했다.
이온이 보기에 아름은 폴란드 전통음식이 입맛에 맞는 모양이다.
맛있게 잘 먹었다.
“저번에 이야기한 자각몽 이야기는 뭐에요?”
“누군가 그랬어요. 여행이란 내면에서 이루어진다고. 연기는 어떤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걸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에요. 자각몽처럼 어떤 세계를 여행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봤어요.”
“배우들이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는데 이온님도 그런 거 였어요?”
“모르겠어요. 솔직히....”
“......”
“나와 악동이 캐릭터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후배들이 간혹 평소와 다르다고 이야기했던 걸 보면.”
“지금은 완전히 빠져나왔어요?”
“그것도 모르겠어요.”
아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아는 가족이 있으니까.”
“학교를 다니면서 어떻게 드라마에도 출연할 수 있어요?”
“학교와 촬영팀 양쪽에 양해를 구해야 해요.”
이후로 식사가 끝날 때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부터 영화와 드라마에 이르는 예술분야는 물론이고, 청년의 삶, 철학, 종교, 정치, 문화, 사랑에 관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대화를 이어갔다.
둘은 서로 자신만의 뚜렷한 가치관과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밝은 햇살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브런치를 먹자고 노천 펍에 들어왔는데, 나올 때는 점심시간이었다.
“방학 동안 한국에는 안 들어와요?”
“올해는 계획이 없어요.”
“나중에 한국에 들어오면 제가 제대로 한 턱 쏠 게요.”
이온의 말에 아름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둘 모두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안다.
그래도.
혹시나.
두 사람은 낯선 타지에서 사랑의 불장난을 치지 않았다.
그저 서로 눈을 바라보며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쉬운 관계로 가려고 마음먹었으며 호텔을 잡고 짜릿하고 짧은 관계를 맺고 끝낼 수도 있었겠지만,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관계를 위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약간은, 아니 내심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았다.
좀 더 발전된 관계.
친구 그 이상....
아쉽다.
헤어질 시간이다.
오늘의 식사가 마지막 만남이 될지 모른다.
이온이 계속해서 배우 생활을 한다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를 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각자 원하던 것을 어느 정도 얻었다.
이온은 배역 투자에 따른 후유증 극복을.
아름은 인기스타와의 소소한 추억을.
아름의 흔들거리던 눈망울이 시 별빛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뭐 사줄 건데요?”
“뭘 먹고 싶어요?”
“삼겹살?”
“좋죠.”
“삼겹살 먹어요?”
“당연하죠.”
“근육 유지하느라 닭가슴살만 먹는 줄 알았어요.”
“닭가슴살 안 먹어요.”
“....네.”
이온이 묵고 있는 호스텔이 점점 가까워오고 있다.
“아름씨는 어디 묵는다고 했죠?”
“아니에요. 곧 비행기 타야 하잖아요.”
“숙소까지 데려다 줄 정도 여유는 있어요.”
아름이 뜬금없이 화제를 돌린다.
“하늘이 정말 예쁘네요.”
“서울에서 좀처럼 접할 수 없는 하늘이죠.”
“유럽에서 지내는 것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게 바로 저 거에요. 매일 맑고 깨끗한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거.”
하늘 이야기에 아름의 생기가 조금 돌아왔다.
“이온님한테 밥도 얻어먹었겠다. 다시 브이로그 촬영 하러 바쁘게 다녀야겠어요.”
이온이 손을 내밀었다.
삶이란 긴 시간을 놓고 보면 정말 찰나의 순간.
이번 여행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아름과의 추억과도 작별할 시간이 찾아왔다.
마치 악동이가 방실과 헤어졌던 것처럼.
“건강하게 한국에서 다시 보길 바라요.”
“다음 드라마나 영화 꼭 챙겨 볼게요. 조심해서 한국 돌아가세요.”
두 사람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활기찬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아름.
이온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봤다.
뭔가 허전한 감정이 들긴 하지만.
그리움이나 상실감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아쉬움 정도.
아름과 마법 같은 러브스토리 에피소드가 만들어지려면.
이온이 그녀와 함께 있겠다는 시도를 해야 했다.
멀어지는 그녀에게 당장 달려가서 손목을 붙잡는 신파 한 편을 찍어야 할 수도 있고.
뜨거운 하룻밤을 함께 보냈어야 했다.
이온은 그렇게 할 마음이 생겨나지 않았다.
사랑이란 혼자가 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탈출구일지 모른다.
이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하는 법이나 그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 ✻ ✻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한 후 메시지들을 확인하자 누나를 비롯해 유럽 친구들의 문자가 많이 와 있었다.
아름 보낸 톡도 있었다.
- 이런 말 하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는데... 사실 요새 너무 힘들었어요. 한국에 들어가야 하나 고민도 많았구요. 그런데 이온 오라버니를 만나서 다시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잠시 천국을 엿봤던 것 같아요.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고마워요.
사랑하는 것은 천국을 살짝 엿보는 것이다.
작가 카렌 선드가 한 말이다.
이온은 그런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행복이란 말에 미소가 그려질 뿐.
아무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만들어 줄 수 없다.
행복이란 향수와 같은 거다.
먼저 자신에게 뿌리지 않고는 다른 사람에게 향기를 발산할 수 없다.
적어도 폴란드에서만큼 이온은 행복했으리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정도로.
유럽답사는 그렇게 별 탈 없이 잘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무사히 한국의 일산 집에 도착했다.
어제와 똑같은 방식으로는 다른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이온에게도 큰 변화를 맞이해야 할 시점이다.
가장 먼저 매니지먼트 계약 건을 매듭지어야 했다.
이온은 유럽에서 돌아온 후 기획사 관계자가 아니라 액션아카데미부터 방문했다.
“성가반 운영 하던 성룡처럼 해보게?”
액션아카데미의 권용찬 감독이 이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