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비객(悲客). (5)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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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드라마 촬영현장에 푸드트럭이 오는 것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사극촬영의 메카 용인대장금파크 촬영현장에 간식트럭이 도착했다.
현재 이곳에서는 <비객> 촬영이 한창이었다.
#비객#힘내세요#시청률#20%#아자아자#오늘은 악동이 쏜다~
간식트럭에 걸려 있는 현수막 문구다.
악동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는 나이온.
이온이 촬영팀을 위해 간식을 쐈다는 의미다 된다.
주연들이 돌아가면서 간식차를 쏘고, 중견 연기자 일부도 커피차를 쐈다.
조연급인 줄 알고 <비객>에 합류했다가 졸지에 서브 남자주인공 위상으로 올라 선 이온도 한 번쯤 커피차나 간식차를 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소속사가 있었다면 알아서 해줬겠지만, 이온은 이런 부분을 챙겨줄 매니저가 없었다.
그런데 이온의 이름으로 <비객> 촬영현장에 간식차가 나타난 것이다.
보낸 이는 다름 아닌 <아이돌>에서 인연을 맺은 아이돌 오찬기였다.
딴에는 기죽지 말라고 멤버들과 십시일반 돈을 모아 보냈다고 하는데.
망한 아이돌 그룹 주제에 간식차를 보낸 것은 좀 무리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미 푸드트럭을 섭외해 놓은 터라 취소도 못했다.
이럴 때는 보통 인증샷을 찍어서 SNS에 올리게 마련이다.
받은 이나 보낸 이나 모두 홍보가 되니까.
헌데 이온은 아직까지도 SNS 활동을 하고 있지 않았다.
이온이 간식트럭 앞에서 난감한 얼굴로 서성거리는데, 멀리서 예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이온이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꼬질꼬질한 출연의상을 입은 여배우가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비객>의 여주인공 손민아다.
말이 필요 없는 미모.
떼가 타고 군데군데 기운 자국이 있는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빛나는 외모의 소유자.
<아이돌>의 고한별이 걸어 다니는 인형이었다면, <비객>의 손민아는 나이는 어린데 단아하고 우아한 기품 있는 미인이랄까.
말도 조근조근 참 잘하고, 연기도 야무지게 잘했다.
철학책을 읽은 것이 취미라고 알려지면서 지성미까지 뽐내는 여배우로 알려져 있다.
“나한테 자꾸 선배라고 하네요. 민아씨가 훨씬 선배라니까.”
“그래두. 세 살이나 나이가 많으신데.”
“따로 부를 호칭이 마땅치 않으면 차라리 씨를 붙여요.”
처음 작품에서 만난 사이다.
같은 소속사 선배도 아니다.
냉큼 오빠라고 부르기도 내키지 않았고, 그렇다고 씨라고 부르면 싸가지 없어 보일 것 같았고.
손민아는 ‘저기요’라고 부르다가 언젠가부터 ‘선배’라는 호칭을 썼다.
본인이 이온보다 데뷔가 한참 빠르면서.
호칭을 가지고 고민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싸가지가 장착되어 있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성격이 내성적이거나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타입으로 읽을 수도 있었다.
이온이 보기에 손민아는 전자에 가까웠다.
본인도 답답했던 모양이다.
“에잇~ 몰라요. 그냥 이온 오빠라고 할게요.”
이온이 촬영에 합류한지 보름이 다 되어서야 호칭이 정리 되었다.
“편할 대로 해요.”
“오빠. SNS 안 한다고 했죠?”
“예.”
“거기 간식차 앞에 서 봐요.”
“사진 찍어봐야 올릴 때도 없.... 아, 찬기한테는 고맙다고 사진 찍어서 보내줘야겠구나. 그럼 부탁해요.”
손민아는 이온의 폰이 아닌 자신의 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SNS에 방금 찍은 사진을 올렸다.
현수막의 해시태그와 문구도 그대도 써서 올렸다.
“오빠, 이것 봐요.”
손민아가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내밀었다.
“이걸 왜?”
“간식차 온 걸 여기저기 자랑 해야죠. 우리끼리 맛있게 먹는 걸로 끝내는 거 아니에요. 미담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셀프로라도 마구마구 알려야되요.”
“미담?”
“이것도 다 홍보에요. 아마 <비객> 홈피나 SNS 공식계정에 다 나가긴 할 거에요. 기사로도 나가고. 저는 협찬으로 커피차 여러 번 쐈는데요 뭘.”
손민아는 음료 모델을 수년째 하고 있었는데, 음료회사에서 간식차를 세 번씩이나 보냈다.
음료회사가 모델인 손민아를 배려하는 차원도 있지만, 수백만의 SNS 팔로워를 보유한 손민아를 통해 자사 브랜드를 푸드트럭과 함께 노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해도 되요?”
아주 친한 사이도 아니다.
두 사람은 푸드트럭 협찬을 스스럼없이 할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오빠는 착한 것 같더라고요. 어디 가서 막 소문내고 그럴 것 같지 않아서.”
그렇게 말하고 손민아가 혀를 쏙 내밀며 웃었다.
“오빠는 촬영장에 와서 제일 먼저 하는 게 인사더라고요. 막내 스태프한테도 일일이 찾아가서 인사 하는 걸 봤어요. 저도 대선배님들한테 그렇게 배워서 노력은 하는데 막상 실천하기 진짜 어렵거든요.”
이온은 처음부터 그렇게 배웠고, 무술팀으로 많은 현장을 돌아다니며 자연스럽게 인사가 몸에 배어 있다.
처음 만나는 스태프나 배우라고 할지라도 낯가릴 것도 어색함도 전혀 없었다.
“나는 액션배우라서 절반은 스태프 쪽에 걸쳐 있어서 그럴지도 몰라요. 배우와 스태프의 구분이 없다랄까.”
“지금도 스턴트를 해요?”
“그럼요.”
“배우인데 어떻게 남의 대역을 해요?”
“못할 건 없죠.”
“엥?”
손민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몰라요. 배우가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고 또 내가 바빠지면 스턴트를 할 시간이 없을 수도 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죠.”
“어? 분식차가 아니었네요?”
“커피하고 츄러스더라고요.”
“오오. 츄러스구나~ 내가 일빠. 사장님, 딸기 시럽 뿌려서 주세요~”
손민아가 쾌활한 목소리로 주문했다.
잠시 후, 스태프와 배우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츄러스와 냉커피를 받아갔다.
점심식사가 한참 지난 후에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츄러스는 촬영팀에게 꿀맛 같은 휴식과 함께 활력을 줬다.
이온은 인원이 뜸해지자 간식차를 몰고 온 사람에게 섭외방법과 비용 등을 문의했다.
오찬기로부터 간식차를 받았으니, 추후 자신도 보내주는 것이 맞았다.
✻ ✻ ✻
드라마 사극에는 몇 가지 법칙 아닌 법칙이 있다.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을 찾아내면, 그 인물을 로맨스나 멜로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물론 삼각, 사각 관계의 연적은 필수다.
만약 없다면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실제 인물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도록 한다.
특히 남자인물은 그가 문관이거나 선비이거나 관계없이 무예수준이 월등하도록 한다.
비밀결사가 있으면 그들의 무력수준을 높여 최강의 무예집단으로 만든다.
결과적으로 사극은 무협물과 구분이 없어지고, 굵직한 역사서사는 말랑말랑한 로맨스물이 된다.
역사적 사실은 기존의 주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낡은 관점을 답습하고 만다.
대중적 흥행을 해야 하니 새로운 것을 부각하면 낯설게 느껴지니 말이다.
그런 매너리즘으로 인해 한때 사극이 정체기를 겪기도 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소위 퓨전사극이라거나 팩션이다.
물론 퓨전사극인지 팩션인지 구분도 별 의미 없다.
결국에는 멜로드라마로 귀결되니까.
암튼 퓨전사극일수도 있고 팩션일수도 있는 드라마 <비객>은 동·서인 붕당의 두 가문 120년의 질긴 악연을 모티브로 해서 정여립의 대동계와 남인북인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임진왜란까지 다루는 대하서사극이다.
물론 모든 인물은 가공되고 변형되고 가문의 이름이나 실존인물 역시 이름과 성격을 모두 바꿔버렸다.
황혜경 작가는 역사적인 개연성을 따질 수 없도록 120년의 시간을 마구 뒤섞어버렸다.
심지어 훨씬 후대인 1754년에 정조 추대 문제로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격화된 신임사화로 인해 제주도로 유배를 간 조씨 집안의 일화까지 버무렸다.
[옥 같던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혼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이 이어졌네.]
라는 시가 대사로 나온다.
시비로는 우리나라 유일의 금석문으로 전해지는 제주도 홍의녀묘에 적힌 애도시다.
제주도 유배객 중에서 가장 오래 유배생활을 했던 인물 조정철이란 사람이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사나 국문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가 아니면 알지도 못하는 일화다.
악동이가 속해있던 대동계 역시 많이 과장되어 있다.
실제로 대동계는 특정한 날에 모여 세상을 논하고 술과 음식을 나누는 문화동호회에 가까웠다.
1587년(선조 20년) 왜구가 침입하자. 전주부윤 남언경이 정여립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에 대동계를 이끌고 왜구 소탕에 나서 성과를 얻었다고는 하나, 대동계가 드라마 <비객>의 설정처럼 엄청난 무술 고수들로 이루어진 비밀결사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대동세상에는 좌우는 있을 수 있으나 상하는 없다.]
라는 대사 등을 통해 당시로서는 굉장히 위험한 사상에 악동이 감화되었다는 설정으로 현재 한국의 고루한 이념적 반목의 양당정치와 중산층의 몰락이라는 시대적 화두를 건드리려는 야망을 정통사극이 아닌 변형된 장르형식으로 풍자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면서 한국 드라마의 빠지지 않는 클리셰인 삼각관계 로맨스가 아주 진하게 묻어 있다.
암튼 이온은 자신이 등장하지 않는 회차의 대본까지 모두 받아서 꼼꼼하게 읽었다.
비록 역사적 개연성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게 집필된 통속사극이라고 할지라도 모티브가 되었던 역사적 사건을 일일이 찾아서 공부했다.
황혜경 작가를 제외하고 모두가 유난스럽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어쩌랴.
이야기의 배경이나 논리성 또는 개연성에서 스스로 납득이 안 되면 캐릭터 구축에 애를 먹고 몰입도 잘 안 되는 것을.
어쩌다 한 번씩 황혜경 작가가 촬영장을 방문하면 이온이 득달같이 달려가 이것저것 묻거나 잘못된 것을 지적하기도 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정통사극이 아니야. 통속사극이지. 드라마적 픽션을 자유롭게 활용해 가공인물과 가공사건을 얼마든지 펼쳐낼 수 있는 그러니까 역사라는 옷을 걸친 멜로드라마라구.”
반대로 정사(正史)에 충실하거나, 정사를 바탕으로 야사(野史)를 약간 첨가해도 사실 자체에 대한 왜곡이나 수정이 거의 없는 게 정통사극이다.
원론적인 구분이다.
현재는 팩션사극과 퓨전사극으로 또 다시 분화됐다.
둘 다 작가에게 역사적 사실과 개연성 파괴 부분에서 면피하는 아주 좋은 구실이 되고 있다.
즉 팩션사극은 팩트(fact)와 픽션(fiction) 즉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기획 및 상상을 융합시킨 것이고, 퓨전(fusion)사극은 역사의 배경을 빌리긴 하되 가상을 전제하거나 역사적 논리보다 현재의 논리를 더욱 강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트립을 잡으면 그런 장르적 특징을 내세우면 된다.
“시청자들의 시청 수준을 얕보시는 건 아닐까요?”
“너희 세대만 해도 지식으로서의 역사교육과 소일거리이자 취미로서의 역사드라마 감상을 분별할 능력이 있잖아. 나는 후자를 하고 있는 거야. 사극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얼마나 역사를 재료로 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느냐, 즉 스토리텔링의 문제야. 미국이나 영국도 끊임없이 역사드라마를 만들어. 그런데 걔들이라고 정사만 다룰까? 야사에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때로는 비틀기도 해. 얼척 없는 것도 얼마나 많은데.”
말은 그럴 듯 하게 들리는데,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다.
역사왜곡의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실존 캐릭터의 성격을 심하게 비틀거나 역사적 사실 자체를 완전히 바꿔버리면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이 역사드라마와 실존인물을 그린 드라마다.
“네가 연기하는 광대이자 대동계원인 악동이는 명백히 가상의 인물이야. 그런데 너도 단번에 이해했지만, 이 시대 청년들의 고민과 딜레마가 어느 정도 묻어있어. 정치가 개판을 치는 시대에 태어난 그것도 노비보다 못한 천한 광대인 꽃다운 나이의 악동이가 21세기 경제적 신분사회인 대한민국의 흙수저 물고 태어난 보통의 청년의 모습과 어딘지 겹쳐 보이지 않아?”
억지춘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의 붕당정치로 조선의 미래 세대 기회를 빼앗고 외세에 침략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 같은 최악을 상황을 연출한 것과 비슷하게, 현재의 대한민국 역시 정치는 실종되었고 사회 전반의 엘리트 부패 카르텔은 정권이 바뀌어도 전혀 균열조차 못 내고 있어서 청년 세대가 아무리 노력해도 계층간 사다리를 오를 수 없는 암울한 상황이긴 하지만.
그런 걸 충분히 감안한다고 해도 많이 양보해서 대본만 놓고 봤을 때는 반반이었다.
악동이란 캐릭터가 얼마나 지금의 청년 시청자가 공감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다만 이온이 어떻게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지가 관건이라면 관건.
결국 가상의 인물인 악동을 어떻게 잘 구현해내냐에 따라서 혹시 모를 논란을 피해가거나 잠재울 수 있는 것이다.
‘잘하면 작가 탓, 못하면 감독과 배우 탓.’
사극의 주인공이 그래서 어렵다.
조연이나 감초역할은 주어진 역할만 잘 소화하면 어떤 비난으로부터 자유롭다.
하지만 주인공은 연기뿐만 아니라 드라마 속 역사에 잘 녹아들어야 한다.
꾸며지고 가공된 이야기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런 면에서 이온이 메인 주인공이 아닌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그런 역할을 맡기에는 아직은 역부족인 것이 사실이니까.
경험도 없는 신인배우가 16부작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을 수행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소위 떴다고 해서 아무나 주인공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년 만에 서브 주인공을 꿰찬 것도 고속열차를 탄 것이지만.
그렇다고 부담 가질 필요가 없었다.
아직은 미숙하고 카리스마가 부족한 젊은 주인공들의 모자람을 보완하기 위해 조연급에 경험 많고 중량감 있는 연기자들을 대거 배치하니까.
악동과 남사당패 안에서 자주 붙는 배역인 저승패 ‘만억‘도 그 중 하나다.
재주나 공연할 능력을 상실한 늙은 단원을 저승패라고 하는데, 악동을 손자처럼 여기는 ‘만억‘ 캐릭터는 감초배우로 유명한 김영훈이 캐스팅됐다.
160Cm를 겨우 넘길까말까 할 정도로 단신이 김영훈 배우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로 능청맞거나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선보이는데, 간혹 악역을 맡게 되면 소름끼치는 연기가 압권이다.
이번에는 익살스러움을 빼고 비열함도 빼고, 오로지 늙고 무기력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중늙은이 저승패를 연기했다.
[왜 안 됩니까! 왜!]
[이 천한 놈아.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고 혔어 안 혔어. 그러지 마. 네 놈만 다쳐.]
악동이가 방실을 연모하는 것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 만억이다.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것이 아니라는 듯 방실을 데리고 온 첫날부터 남장여인이며 악동이 애틋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 챈 바 있었다.
[나 좀 내버려두오. 내가 사모하고 내가 미련을 갖는 것이고 내가 놓아주는 것이오. 내 맴이 어찌 영감의 것처럼 마음대로 가지고 놀려고 하시오.]
예인촌에 머물 때는 한없이 바보처럼 헤실헤실 거리기만 하던 악동이다.
그런데 드물게 화를 내고 있다.
[아이고~ 이걸 워쪄. 이 미천하고 미련한 눔아~ 다 널 위해 그러는 거 아녀.]
[제발... 날 위해 그런다고도 하지 마시오. 영감은 죽었다 깨어나지 않는 한 내 맴을 모를 것이니까. 영감은 모르오. 내가, 내 맴이 얼마나 죽어가는지 모른단 말이오!]
“컷! 이온아 모니터 보게 와봐.”
“네 감독님!”
서브 주인공이 되면서 좋아진 것이 이런 것이다.
매 촬영마다 연출자와 함께 모니터를 보며 확인하고 디렉션을 받을 수 있다.
모니터 보자고 요구할 수도 있고.
“너무 만억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진 마. 화가 나있긴 한데 만억에 화풀이할 정도로 빡친 건 아니니까.”
“만억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건 괜찮죠?”
“응. 만억 선배님이 지금처럼 네 시선을 피하는 게 좀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아.”
“알겠습니다. 감독님.”
엄 감독 뒤편에서 황혜경 작가가 엄 감독과 대화를 나누는 이온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황혜경 작가는 촬영 현장 방문이 잦은 편이다.
그럼에도 <비객>은 유독 자주 촬영장을 방문했다.
하루 종일 작업실에 앉아 대본을 써도 모자를 판에 현장방문 많았다.
‘굿 초이스였어.’
무언가 답답함이 뻥 뚫리는 기분에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 중심에는 이온과 또 다른 물음표의 주인공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