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비객(悲客).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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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곤 하차 논란에 대해 <비객> 제작진은 시간이 지나도 공식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아시안 게임 기간 동안 연예뉴스는 ‘황혜경 갑질‘ ’제작사의 캐스팅 횡포‘ ’하연도 못하는 무명배우의 설움‘ 같은 기사들이 도배됐다.
당연히 SNS로 퍼져나가며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어디서 흘러나간 루머인지 알 수 없었다.
황혜경은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일절 무시했다.
작업실에 칩거한 채 대본 작업에만 열중했다.
연출자인 엄기웅을 비롯한 제작진은 결방 기간 동안 언론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지방을 돌며 촬영에 집중했다.
여유로운 제작진과 달리 이형곤의 소속사는 꽤나 난감했다.
이 이슈에 있어서 소속사가 처신을 제대로 못하면 연기자들이 소위 ‘갑‘들에게 찍히게 된다.
언론에 입장을 내기도 못하고 그저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외부에서 뭐라고 떠들든지 <비객>의 제작PD는 물밑에서 이형곤의 소속사와 협상을 했다.
하차 대신 분량 축소를 제안한 것.
이형곤의 소속사 입장에서는 비중이 조금 줄어들기는 하지만, 완전히 드라마에서 빠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큰 반발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문제의 발단이었던 정승복 캐디가 이형곤을 종편에서 준비 중인 드라마에 캐스팅해주기로 했다.
출연료 부분에서 재협상을 통해 약간의 손해가 생겼다.
조·단역 출연료라고 해봐야 소속사 입장에서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스타작가 황혜경의 작품에 출연했다는 경력이 필요할 뿐.
사실 조단역급 하차 문제로 이 정도까지 시끄러운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방송사인 MBS 내부에서도 우려가 많았다.
다만 의도치 않은 노이즈마케팅으로 인한 화제성이란 측면으로 인해서 사태를 관망만 했다.
1,2화 방영 전보다 인터넷과 SNS상에서 언급량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비객>이란 단어가 많이 노출됐다.
게다가 방송사 입장에서는 탑클래스 작가의 작품이 망가져선 안 된다.
대작인 <비객>이 무너지게 놔둘 수 없었다.
동시간대 경쟁작들도 치고 올라오는 상황이었고.
현재의 뜨거운 관심을 시청률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를 위해 황 작가가 비장의 무기를 준비한다고 하니, MBS 측에서는 믿어볼 수밖에.
“출연료가.... PD님 잘못 된 거 아닌가요?”
출연계약서에 서명을 하려던 이온이 출연료 항목을 확인하고 제작PD에게 물었다.
“미안해. 그거 외주등급이야. 외주와 본사등급 차이는 알지?”
“알고 있어요.”
제작PD가 미안해 할 일이 전혀 아니었다.
출연료등급표에서 지상파는 본사등급, 외주제작사에서 나눈 등급은 외주등급이라고 한다.
또한 케이블과 종편은 지상파 등급에서 할인된 금액으로 계약하고 있다.
같은 등급이라도 출연료가 다 제각각이다.
참고로 이온은 스턴트맨으로 출연하거나 액션연기를 할 경우에는 본사등급 8등급 고정이었고, 드라마에서 고정출연(조단역 이상)할 경우 외주등급 10등급을 받고 있었다.
그런 이온에게 제작PD는 외주등급 12등급을 제시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15년 정도 연기 경력의 조·단역 전문 연기자가 본사등급 기준 12등급을 받는다.
“90분 기준 대략 세전 140만 원이야. <비객>은 미니니까 그 금액에서 60% 받게 되겠지?”
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인배우로서 12등급(본사·외주 상관없이)을 제시받았다는 사실은 적어도 외주제작사에서 이온의 가치를 조연급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다.
만약 단비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부러워서 미칠지도 몰랐다.
경력이 얼마 되지도 않는데, 벌써 출연료 등급이 12등급까지 급등했으니까.
“방송등급 받기 쉽지 않다는 거 알지?”
“잘 알죠.”
“스턴트맨으로 배우 데뷔를 했던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어.”
“지나고 보니 그렇더라고요.”
스턴트맨은 지상파 방송등급표 기준으로 협회등록 회원의 경우 고정 등급을 무조건 받는다.
무명의 조·단역 배우들이 겨우겨우 6등급을 받을까말까 할 때 이온은 첫 출연부터 스턴트맨 고정등급인 8등급 출연료를 받았던 것.
막 현장에 나온 무명배우들이 자신의 프로필에 보조출연, 이미지단역 등을 경력으로 기재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촬영현장에서 출연료를 지급받는 배역은 프로필에 안 적는 것이 좋다.
연출팀과 제작팀은 그런 내용은 경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온의 경우 <지옥의 악인들>, <아이돌>처럼 제작사와 계약서를 작성해서 서류가 있는 것이 이 바닥에서의 배우 경력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온씨에게 왜 이 등급을 챙겨주는지 알아줬으면 좋겠어.”
“실망시키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이돌>보다 조금, 조금 발전한 모습만 보여줘도 돼.”
제작PD가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서명란을 콕 찍었다.
조연급 연기자로써 책임감을 가져달라는 주문이었다.
슥슥.
이온이 시원하게 계약서에 서명했다.
정식 출연계약을 맺음으로써 당장 삼일 후부터 <비객> 촬영에 합류하게 됐다.
급작스러운 합류로 인해 연기적으로 준비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또한 임대한과 역사 고증 담당자와의 의견충돌을 피하기 위해 춘천과 안성을 다녀오느라 시간을 까먹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연기 스승이랄 수 있는 신지균은 그런 것도 경험해봐야 프로에 한 발 더 다가서는 것이라며 격려했다.
이온은 신지균에게 도움을 청했다.
혼자서는 그 짧은 순간에 완벽하게 준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째든 작가나 연출자는 캐릭터 비중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
다만.
“종방까지 이온씨와 쭉 갔으면 좋겠는데.”
계약을 마친 후 제작PD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이온이 연기하게 될 캐릭터는 악동이란 이름의 사당패 땅재주꾼이다.
정여립이 결성한 대동계(大同契)에 몸담으며 왜구 토벌에 앞장섰으나, 반역을 획책한다는 고발이 있어 피신하던 중 정여립이 자살하면서, 대동계가 해체되고 홀로 유랑하는 신세가 된다.
우연히 위험에 처한 방실(송여실)을 도와주게 되고, 그녀를 남사당패가 모여 사는 예인촌으로 데리고 간다.
남장여인으로 예인촌에서 숨어사는 방실을 연모하는 악동은 키다리 아저씨처럼 그녀가 곤란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말뚝이탈을 쓰고 나타나 도움을 준다.
이온이 계약과 함께 받은 대본에는 그 부분까지만 나와 있었다.
이후에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될 지는 오로지 황 작가와 엄 감독만 알고 있었다.
✻ ✻ ✻
드라마 <비객>에서 여주인공 방실의 집안은 동서붕당에서 서인파벌에 속한 순흥 안씨 가문이었고, 남자주인공 우준은 동인파벌의 여산 송씨였다.
이 두 가문의 악연은 무려 120년이나 엎치락뒤치락 매우 치열하게 이어졌다.
신사(1521)년에 여주인공의 집안은 남자주인공의 집안을 역모로 엮어 밀고를 하게 되지만, 추후 누명을 벗은 남자주인공 집안은 복권하게 되고 반대로 여주인공 집안은 노비가 되어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바로 신사무옥(辛巳誣獄)이란 역사적 사건이다.
두 집안은 붕당정치가 치열해지는 것과 함께 수십 년에 걸쳐 원수지간이 된다.
노비로 떨어졌던 송씨 가문은 계미(1583)년에 일어난 니탕개의 난과 이 난을 수습하기 위한 국방강화책의 하나로 이뤄진 대규모 노비쇄환령이라는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고, 서인당이 동인당과의 정쟁에서 밀리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두 집안의 희비가 수시로 엇갈리는 사이 드라마상의 시대배경 기축(1589)년에 이르러 송씨 집안이 동인당을 상대로 복수의 기회를 잡게 된다.
그 사건이 바로 기축옥사다.
이 옥사는 곧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번져 근 2년에 걸쳐 온 나라를 피바람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다.
공식기록으로 사형당한 사람이 1,000명이 넘으니, 기록 없이 형장으로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된 사람은 얼마나 많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암튼 백성의 희생도 그렇지만 조선 최초로 백성들의 각성으로 전국적으로 조직된 자강운동인 대동계가 허무하게 무너지고, 대륙침략의 야욕에 불타는 일본 군국파들의 망상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 곧 바로 임진왜란이 터지는 불운을 겪게 된다.
붕당정치로 말미암아 국가와 민족적 손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을 모티브로 해서 실존했던 가문의 실화를 살짝 비틀고, 완전 상상력으로 탄생한 캐릭터를 집어넣어 붕당정치로 혼란스러운 조선의 정치 상황 속에서 사랑을 하게 된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서양사학과가 아니라 동양사학을 전공할 걸.’
부질없는 가정일 뿐이다.
이온은 긴 한숨을 뱉으며 넣어 두었던 테블릿을 꺼냈다.
그리고 대동계를 비롯해서 기축옥사에 대해 정리해 놓은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이온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학구파 배우다.
스스로 배경 지식이 없으면 캐릭터나 이야기를 납득하는데 애를 먹는다.
테블릿으로 역사적 사건을 다시 한 번 훑은 후에 <비객> 대본을 꺼냈다.
자신이 출연하는 분량은 전혀 없지만, 1부부터 찬찬히 읽었다.
지난 <아이돌> 때에도 그랬다.
비록 송하나의 인격이나 성격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작가로서는 왜 칭송을 받는지 대본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황혜경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비객> 속의 인물들이 저만의 굉장한 논리적인 흐름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
전반적인 흐름 안에서 사건과 말과 행동에 대해 인물들이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에 수반되는 논리가 기가 막혔다.
대중성은 말할 것도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슬프고 안타까운 멜로.
모든 여성의 첫 로맨스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한 ‘키다리 아저씨’ 판타지.
수년 전 방영했지만 여전히 신화처럼 남아 있는 <아워글래스>의 보디가드 신드롬.
마지막으로 단맛과 매운 맛 중에서 골라서 먹을 수 있는 삼각관계 로맨스까지.
이미 한국드라마에서 흥행 공식으로 증명된 클리셰까지 절묘하게 녹아있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이온은 자신이 맡은 배역, 대사, 스토리를 통해 캐릭터 지도를 만들었다.
군데군데 숭숭 뚫린 부분이 있었다.
추측하기로 작가가 일부러 여지를 둔 부분 같았다.
악동이란 캐릭터가 어딘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남자주인공 대신에 방실과 악동이 연결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묘하게 시청자와 밀당을 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대본만 놓고 보면 쉽게 결말이 예상되지 않았다.
‘낚시성 장면도 곳곳에 숨겨져 있고....’
암튼 이온은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당장 내일 모레 바뀐 대본을 가지고 자신이 등장하는 대규모 액션 장면을 찍어야 하고, 아시안게임이 끝나기 전까지 이형곤과 남사당 캐릭터 일부의 분량 중에서 이온에게 넘어온 장면을 재촬영해야 했다.
고작 삼 일 안에 막둥이란 인물을 이해하고 논리를 탄탄하게 쌓아야 하는 것이다.
그 삼 일 동안 구축한 캐릭터가 촬영이 진행되는 두세 달의 시간 동안 일관되게 이어져야 한다.
중간에 바뀌어서 다른 느낌을 주면 절대 안 된다.
제 아무리 기본기가 탄탄해도 캐릭터가 무너지면 연기 못하는 배우가 되는 거다.
제작PD의 말처럼 종영까지 캐릭터가 이어질지 알 순 없다.
하지만 자신과 중견 연기자 선배가 긴급 수혈되면서 대본 전체를 뒤집어엎었기 때문에 앞으로 종영 때까지 쪽대본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체력은 걱정이 없다.
다만 연기의 콘티뉴이티가 문제가 될 뿐.
따라서 이온은 두세 달의 촬영기간 동안 매번 촬영 때마다 같은 느낌으로 몰입할 수 있는 준비를 착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 ✻ ✻
대구광역시의 성화여고 2학년에 다니는 오연수는 한국 드라마의 열렬 시청자다.
요즘 십대가 본방사수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상파든 종편이든 케이블이든 드라마 방영시간에 학원에 있을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헌데 오연수는 자신이 꼭 보기로 마음먹은 드라마는 학원을 땡땡이 치고서라도 꼭 본방사수를 했다.
이번에 꽂힌 드라마는 <비객>이다.
시청률도 형편없고, 다소 실망스러운 출발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황혜경 작가 작품이란 이유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작품이다.
라이징 스타인 안건우와 손민아가 처음으로 사극에서 호흡을 맞추는 것도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오연수는 학원을 땡땡이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리모컨부터 찾았다.
“다른 거 봐. <비객> 존노잼.”
연수의 언니 연희가 채널을 돌리자 질색했다.
“내가 보든 말든.”
“Vnet에서 ‘달리는 캠핑카’ 한단 말야.”
“다운받아 보든가 방에서 스트리밍으로 봐.”
자매가 리모컨 쟁탈전을 벌였다.
한심한 딸들을 보다 못한 엄마가 나섰다.
“엄마! <비객> 틀어. 황혜경 드라마야.”
“‘달리는 캠핑카‘에 최종수 나온데. <비객> 개노잼. 시청률 완전 개똥망.”
“하아, 언니 모르면 좀 가만있어.”
“모르긴 뭘 몰라. 황혜경 갑질 이슈로 시청률 더 떡락하게 생겼는데.”
“그거 다 루머래. 황혜경 싫어하는 모 방송국 PD가 음해한 거라잖아.”
“그걸 믿냐?”
“믿든 말든. 암튼 오늘은 <비객> 본방 사수!”
아휴.
언니 연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작한다!”
“......?”
오연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예고편에서도 없는, MBS 드라마 공식 넷튜브 채널에서도 어떤 언급도 없었던, 뜬금없이 장면이 처음부터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드론촬영으로 해안가 마을이 보여주다가 바닷가로 나아간다.
바닷가에 훈도시로 보이는 팬티 하나 달랑 찬 헐벗은 왜구떼가 모습을 드러낸다.
“언니......?”
“왜?”
“나이온이야.”
“누구?”
“<아이돌>에서 크리스티안으로 나왔던, 한국대 다는 배우. 나이온.”
“진짜? 어디? 걔는 수염 붙이고 나오는 거 진짜 이상하던데. 왜 감독들은 자꾸 그 예쁜 얼굴을 수염 같은 걸로 가리려고 하냐구.”
“<활빈>에서는 배우가 아니라 스턴트맨으로 참여했다잖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디 나온다는 거야?”
“저기 조선무사들 사이에......”
정여립이 지휘하는 대동계가 막 해안가 마을을 습격하는 왜구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그 뒤로 전주부 소속 관군들이 따르고 있다.
전주부 관군은 어딘지 오합지졸 느낌이 풍겼고, 대동계는 정예군사조직처럼 일사불란해 보인다.
긴박한 장면 사이에서 이온의 클로우즈업이 잠시 나왔다.
“어떻게, 어떻게! 맞지? 나이온이지?”
언니 연희가 호들갑을 떨었다.
오연수가 언니를 발로 찼다.
“조용히 봐. 아니면 방으로 꺼져.”
“수염 안 붙였네? 이제 얼굴 까나 봐?”
“아! 닥쳐. 시끄러.”
결방 이후 재정비를 거친 <비객>이 다시 전파를 탔다.
그 화려한 막을 대동계와 함께 악동을 연기하는 이온이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