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비객(悲客).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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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기술 좀 써도 돼?”
“어디 대회 나가려고? 비보이 때려치운 거 아니었냐?”
“사실은 내가 드라마를 찍어. 거기서 곡예를 좀 해야 돼.”
“<비객>?”
“.......응.”
“엄청 욕먹고 있더라?”
“형도 만나자마자 욕했잖아. 배신자라고. 새삼스럽지도 않아. 다 루저들의 질투일 뿐이지 뭐.”
이온이 양팔을 벌리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 자식이 어디서...! 코 찔찔 흘릴 때 할로우백 누가 가르쳐 줬더라?”
“형 만나기 전부터 물구나무 설 줄 알았거든!”
할로우백은 물구나무 선 자세에서 허리를 구십도로 젖힌 상태로 유지하는 기술이다.
몇몇 비보이들이 프리즈 기술로 많이 쓴다.
“뭐 하게? 나인트랙?”
비보이 킬라는 프리즈 기술 중에 체어라는 기술과 파워모브를 융합한 독특한 기술과 나인틴 기술을 연속으로 끊어서 하는 일명 나인트랙이란 기술을 만들었다.
현재까지 그의 기술을 카피해서 똑같이 따라할 수 있는 비보이는 없었다.
“혹시 남사당패로 나오냐?”
“.....?”
“3회 예고편 보니까, 여주가 예인촌인가 광대들 사는 마을로 숨던데?”
“드라마도 보는지 몰랐네.”
“와이프랑 네가 나온 <아이돌> 재밌게 봤다고 했잖아. 서울 돌아가기 전에 꼭 잊지 말고 와이프한테 사인 좀 해주고 가.”
“무술감독이 땅재주꾼의 기예에 비보잉과 트릭킹을 쓰고 싶어 해. 넷튜브에서 형하고 레전드 형들 몇 명 시그니처 무브를 편집해서 보여주더라고. 나한테 할 수 있겠냐고 하더라.”
“남사당패놀이와 비보잉은 전혀 다른, 완전히 다른 영역인데?”
“후우. 그러게.”
유명한 비보이 크루는 종종 풍물놀이패와 합동공연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유명한 사물놀이패나 풍물단체와도 친분이 있었다.
“그래도 돼?”
“모르겠어. 그냥 막무가내라서.”
“안 된다고 하지.”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조선시대 광대 옷 입고 사극 드라마에서 누가 봐도 파워무브를 펼치면 비보이씬에서 좋은 말 안 나올걸? 요즘 개념 없는 놈들이 SNS나 넷튜브에서 참견질하고 관종짓을 많이 하더라.”
킬라가 같잖다는 듯 말했다.
말로는 헤드스핀 백 바퀴도 돈다.
인터넷 상에는 레전드 비보이들을 가볍게 쌈싸먹을 수 있는 외계인 비보이들이 넘쳐난다.
“할 수 있으면 해. 근데 되겠냐?”
“형들이 하는 수준은 어림도 없지. 괜히 시그니처 무브라고 불릴까.”
“또 누구누구 꺼 할 생각인데?”
“루나형의 무중력 무브하고, 갬블 크루 형들 프리즈 중에 몇 가지 그리고 그래비티 형님 시그니처 기술. 그 정도. 땅재주에 물구나무서서 걷는 팔걸음이라는 기본 기예가 있거든. 거기에 이것저것 프리즈를 섞어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냐? 알아서 잘하겠지. 술 한 잔.... 아직도 술 안 해?”
“춘천하면 닭갈비지.”
“요새는 커피야.”
“커피든 닭갈비든 저녁부터 먹읍시다.”
“자고 갈 거지?”
“저녁 먹고 올라가 봐야 돼.”
“<아이돌>에서 보여준 거 진짜인지 카메라 장난인지 확인해보려고 했구만.”
“그걸 구라로 봤으면 형 눈이 잘 못 된 거야. 은퇴 각 잡아야겠네.”
“어쭈~ 많이 컸다?”
“키는 중학교때부터 형과 맞먹었거든요. 고등학교 이후로 10센티 더 자라서 형을 내려다 봤지 아마?”
“그래 키 커서 조오켔다.”
“응. 키 커서 얼마나 좋은데. 형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그 기분 절대 모를 거야.”
“주유소 풍선 같은 놈이~”
이온은 오랜만에 만난 비보이 선배와 허물없이 대화했다.
나이가 좀 있는 분들은 90년대 비보이를 했다고 하면 날라리나 껄렁대는 청소년이었을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이온은 그런 비보이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차라리 어릴 때부터 비보잉에 꽂혀 살다보니 사회물정에 너무 어두워 답답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모를까.
90년대 말부터 어지간한 국제대회는 모두 휩쓸고 다녔고 전 세계 비보이들로부터 전설 대접을 받지만, 이온 같은 후배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순둥이에 의리 있는 형들도 없다. 대부분 순수하고 맑은 사람들이다.
비록 몇 개의 협회로 갈라져서 비보이씬의 대표성을 놓고 서로 으르렁거리기도 하고, 대회에서 크루들 간에 험악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한국 비보이씬을 걱정하는 마음은 모두 한결같다.
또한 세계 대회에 출전하게 되면 언제 분위기가 험악했냐는 듯이 한국을 대표하는 비보이로서 품격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멋진 형들이다.
이온은 부부와 함께 춘천의 원조 닭갈비를 먹고 유명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오늘 고마웠어.”
“그냥 가면 어떻게 해? 사인 해주고 가야지.”
이온은 킬라 부부와 사진도 찍고 사인도 해준 후 막차를 타고 일산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부터 춘천을 시작으로 서울, 의정부, 분당 등의 유명 비보이 크루 연습실을 돌며 선배들에게 시그니처 무브 카피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또한 중국에서 결혼해 살고 있는 파워무버 대선배 그래비티에게도 국제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했다.
이온이 레전드 선배들의 기술을 똑같이 재현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일단 카피를 하게 되면 전 세계 현역 비보이와 팬들은 이온이 어떤 무브를 흉내 냈는지 모를 수가 없다.
따라서 사전에 원주인에게 허락을 구해야 나중에 뒷말이 나와도 문제를 부드럽게 해결할 수가 있다.
더해서 선배들에게 기술에 대한 팁도 전수받았다.
“할 수 있으면 해. 또 도와줄 건 없냐?”
“<아이돌> 뜨고 나서 학부형들이 비보이 하면 아이돌 될 수 있냐고 문의하더라.”
“나중에 연예인 비보이하고 우리 크루하고 특별 이벤트 형식으로 배틀 한 번 하자.”
십여 년 전 한 케이블 방송의 댄스경연에서 비보이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꺼져가던 비보이씬의 불씨를 잠깐 되살린 적이 있었다.
오래 가지 못했다.
이온이 <아이돌>에서 환상적인 파워무브를 선보이며 일시적이나마 청소년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고, 아시안게임 브레이킹 부분에서도 최소 은메달 획득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보이씬에서는 다시 한 번 비보이 바람이 불길 기대했다.
때문에 비보이 선배들은 이온의 요청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들은 이온이 딴에는 비보이 출신이라고 나름 비보이를 알리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으로 오해를 했기 때문이다.
비보이씬에서 이온의 평판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만 일각에서는 배틀 경험이 미천하기 때문에 비보이가 아니라 행사용 스트리트댄서일 뿐이라고 애써 폄하하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이온은 그런 말들에 전혀 기분이 상하지도 신경도 안 쓴다.
그저 부러워서 열등감에 짖어대는구나 할뿐.
✻ ✻ ✻
비보잉 문제를 해결했으니, 실제 그 기술을 살판 기예에 적용해도 되는지 전문가에게 문의를 해봐야 했다.
이온은 안성 보개면 양복리에 멋들어지게 지어진 남사당전수관을 찾아갔다.
남사당패에는 '잘하면 살 판, 잘 못하면 죽을 판'이라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그렇게 그들은 죽을뚱살뚱 악기와 기예 그리고 창을 익힌 후 놀이판에서 목숨을 걸고 완성된 공연을 펼쳐야만 박수가 나오고 엽전이 들어온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 남사당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당당한 예술가집단으로 예우받고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개천가에서 연습하던 남사당 전수자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지방자치단체의 지원하에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후예들을 길러내고 있다.
이온은 남사당전수관 방문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무술감독 임대한에게 말한다면.
“쓸데없는 짓 하고 자빠졌네.”
라고 할 것이고.
곽 감독에게 말하면.
“배우로써 아주 좋은 자세야.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연기에 집중하도록 해.”
라며 시큰둥할 것이 뻔했다.
그래도 해야 했다.
이온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고 그래서 논리가 구축이 안 되면 캐릭터나 스토리에 쉽게 빠져들지 못한다.
좋은 연기를 위해서라도 자신뿐만 아니라 남이 납득할 수 있는 논리를 구축한 후에 배역에 접근해야 했다.
그것이 이온의 성향이고 신지균에게서 얻은 연기법이다.
“방송국에서 연락이 올 줄 알고 기다렸는데, 안 오더군요.”
“드라마에 고증과 감수를 해주시는 분이 따로 계세요.”
이온이 백발이 성성한 남사당기예보유자 선생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누군데요?”
“강은미 교수님이요.”
“강 감독님이 감수를 해주시고 계시는 군요.”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
“그런데 왜?”
“교수님보다는 직접 사당패 생활을 하신 분께 생생한 경험담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좀 더 사실적이고 살아있는 인물을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20년 전인가? KBC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지요. 나는 우리 광대나 배우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도 않더이다.”
“선생님 죄송한데. 제가 가르침을 촬영해도 될까요? 절대 넷튜브나 블로그 같은데 안올리고 개인적으로 캐릭터 구축하는 것에만 사용하겠습니다.”
“그러세요. 뭐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까마는.....”
이온이 스마트폰의 녹음기능을 켰다.
“아까 남사당이 뭐냐고 물었죠? 쉽게 말하면 조선시대 아이돌 그룹이라고 보면 됩니다. 공연의 형태로 보면 태양의 서커스와 비슷한, 신체를 이용한 기예의 종합판이지요.”
전수자 선생이 자부심을 가질 만 했다.
현재 얼른이라는 요술(마술) 종목은 사라졌지만, 풍물,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 등 여섯 종목이 남아있다.
이 여섯 놀이는 과거 최대 6~7시간을 공연했었다.
현재는 2~3시간 정도로 축소되어 공연되고 있다.
“흔히들 남사당이라고 하면 양반들이 장죽물고 '어흠' 하던 엄격한 조선시대 때 광대패라고 해서 멸시와 천대를 받던 최하위 천민계층으로 알고 있죠. 맞아요. 그런데 사시사철 온종일 뼈 빠지게 노동을 해야 겨우 연명을 할 수 있던 백성들에게 남사당이야말로 한바탕 신나는 놀이마당을 만들어 주는 유일한 연희집단이었어요.”
서양의 연희가 귀족 및 특권계층의 문화에 속한다면, 우리 전통문화는 민중들과 애환을 함께하는 지극히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문화라 할 수 있다.
혹자는 KPOP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을 하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
위로는 위대한 군주이자 다방면에서 천재였던 세종대왕이 문화정책의 근간으로 예약(禮樂)의 기틀을 세웠고, 본인이 직접 종묘제례악을 작곡까지 했으며, 아래로는 사당패, 남사당패, 걸립패 등의 유랑예인집단이 전국 장터거리와 민가를 사시사철 돌며 우리네 백성과 어울려 놀이 한마당을 만들었다.
오죽하면 일제강점기 실전된 풍물놀이 장단의 일부를 모으거나 병행해서 만든 사물놀이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음악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을까.
만약 과거 유랑예인집단의 장단과 신나는 가락이 원형 그대로 모두 전해졌더라면 현재의 사물놀이는 훨씬 풍성하고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재창조되어 발전했을지도 몰랐다.
어떤 문화평론가는 그런 조상들의 풍류와 연희 DNA가 후세의 모든 분야의 예술가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백성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직업이라 할지라도 그 삶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요. 여기 안성 지역의 사당패들은 그래도 한양과 가깝고 사통팔달이라 터를 잡고 공연을 할 수 있었겠지만, 저기 먼 지방의 사당패들은 이리저리 떠돌며 놀이마당을 펼치고 끝나면 던져주는 엽전이나 곡식으로 겨우 살아갔을 거요. 겨울이면 추운 곳에서 겨우 숨만 쉬며 겨울잠을 청해야 했지요. 그러다 동사하는 이들도 많았고. 양반들에게 이유 없이 멍석말이 당해 병신이 되거나 죽기도 하고. 피죽도 못 끓여먹는 농사꾼들이 먹는 입 하나 줄이겠다고 자식을 사당패에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 삐리들은 재주를 배우면서 어른들을 따라 떠돌다 객사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고 하지요. 혹시 ‘좇삐리’라는 말 들어봤어요?”
“욕 아닌가요?”
“그 ‘좇삐리‘의 ’삐리‘가 남사당패의 어린 수련생을 말하는 거지요. 옛날 남사당패에서는 어린 아이가 처음 들어오면 무조건 여장을 해야 했고, 잔심부름을 하다가 때때로 양반댁 노인이나 홀아비들의 성노리개 노릇을 했다고 하지요. 그나마 겨울철에 그렇게 몸을 팔았던 삐리들은 적어도 얼어 죽지는 않았을 것이요.”
남사당패에게는 슬픈 이야기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종전의 히트를 치기도 했다.
사실 남사당패로서는 부끄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남색은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행위이니까.
게다가 아동학대이자 성폭력이기도 했고.
“부끄러워도 어쩌겠소. 그것이 남사당패의 실제 역사인 것을. 물론 그것이 전통은 절대 아니오. 그렇다고 해도 기록에는 남겨야 하지요. 그래야 똑똑한 사람들이 소위 학자라는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그 시대를 이해하고 읽을 수 있을 테니까.”
다소 무거운 이야기를 바꿔보려고 이온이 입을 열었다.
“최근에 세계줄타기대회에서 우리나라 남사당전수자가 우승했다면서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에요. 십년 전쯤에 처음으로 외국의 줄타기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했더랬지요. 서양 줄타기는 긴 쇠장대를 들고 그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는 게 다에요. 근데 우리는 부채 하나 달랑 들고 줄 위에서 팔랑 팔랑 온갖 재주를 다 부리지요. 그러니 서양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겠어요.”
이온이 맞장구를 쳤다.
“거기에 재담도 빠질 수 없죠.”
“허허. 맞아요. 어름산이가 재담을 늘어놓으면 그걸 영어로 번역해서 들려줬는데, 서양 사람들이 웃더이다.”
“통역을 해 준 사람이 상당히 재치가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네요?”
“그 미국 사람이 우리나라 전통에 매우 해박한 인사였어요. 미국에서 아주 인기가 많은 코미디언이 하는 말이나 시트콤 대사를 많이 섞어서 통역을 했다고 하지요.”
이런 것이 놀라운 점이다.
한국인들은 전통을 고스란히 복원하고 재현하는데도 최선을 다하지만, 동시에 전통을 기반으로 재구성, 재창작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때론 스승들이 하지 말라고 해도 제자들이 기를 쓰고 해서는 뭔가 청출어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것을 우리민족의 비빔밥 정신이라고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이온은 남사당기예전수자 선생 앞에서 살판놀이 12기예에 비보잉과 트릭킹 기술을 섞은 안무를 시범 보였다.
그런 후, 실제 기예와 차이점이나 원형에 대해서 배웠다.
제자가 펼친 살판 시범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고, 전수자 선생의 육성 녹음을 영상에 담고, 자신이 현대적인 아크로바틱과 섞어 만든 기예를 다듬었다.
비록 수박 겉핥기의 지도였다곤 하지만, 얻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마지막의 전수자 선생이 해 준 말이 이온에게 꽤나 인상적이었다.
“남사당놀이라고 늘 같았겠어요? 비록 기록은 거의 없지만, 얼마나 오래된 연희인데. 남사당이나 사당놀이에 제(류나 파)가 어디 있겠어요. 없어요 그런 거. 잘하는 게 남사당이에요. 사물놀이 봐요. 모방과 창조는 종이 한 장 차이 아닌가 말이죠. 중요한 것만 건드리지 않으면 되요. 전통의 본질. 왜 그렇게 해야 했고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것만 잊지 않으면 되는 거예요. 원래 남사당이든 뭐든 놀이는 그때그때 다 달라요. 왜? 구경꾼들과 광대가 함께 호흡하는 것이니까.”
이온은 나이 지긋한 전통기예전수자라고 해서 다소 꼰대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내가 살아보니까 방귀 꽤나 뀐다는 사람들도 40년 전 50년 전 배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이 늙어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배움을 멈추면 생각이 늙어가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어린 친구도 배움이 없이 늙어가는 건 똑같은 거지요. 내가 어릴 때 경험했고 배웠던 것이 오늘날에도 똑 들어맞는다고 어떻게 장담하지요? 내가 배운 지식과 경험이 무조건 진리는 아니란 생각이 듭디다.”
평생 남사당으로 살아오신 분의 말씀이 한국대의 배울 만큼 배운 꼰대교수 몇 사람의 충고보다 더 와 닿는 것 같았다.
어쨌든 임대한을 포함해서 감수는 물론이고 감독까지 설득할 수 있는 진짜 남사당전수자의 육성과 기예를 동영상으로 저장해 놓았다.
그런 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남사당전수관 방문으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전통의 무한확장 가능성에 대한 전수자 어르신의 확인과 촬영에서 자신이 펼치게 될 살판 기예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물론 실제 남사당패를 경험한 분의 생생한 경험담을 통해 캐릭터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