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비객(悲客).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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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비객>은 온라인상에 논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캐스팅 문제 때문이다.
배우 이형곤이 작가의 압력에 의해 하차를 했다느니, 불공정 계약이 문제가 되어 소속사와 소송을 진행 중이라느니 각종 설이 불거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제작진은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논란은 더 커져갔다.
사실 제작진 입장에서 조단역 배우의 배역 교체나 축소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문제와 관련해 어떤 사건 사고도, 법적 하자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입장 발표를 할 수는 없었다.
자칫 허술하게 대응했다가는 추후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으니까.
차라리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면 대응이 쉬울 수도 있었다.
사안을 잘 마무리하여 촬영에 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하면 되니까.
그런데 제작진은 조금 위험한 생각을 했다.
현재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로 한 것.
오히려 침묵함으로써 외부에서 시끄럽게 만드는 것이 더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논란을 키우진 않았다.
다만 노이즈마케팅 효과로 저조한 화제성을 단번에 끌어올리는 기대감에 젖었다.
황혜경 작가는 시끄러운 상황을 반전시킬 만큼 새로운 인물인 이온을 매력적으로 등장시킬 묘안을 찾는데 골몰했다.
그 사이 제작진과 이형곤의 소속사측과 물밑 협상이 이루어졌다.
그런 논의에서 정승복과 캐스팅 업체 유앤아이는 배제되었다.
이온 입장에서는 그렇게 고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온의 상황이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술감독 임대한과의 관계였다.
“이걸 CG없이 리얼로요?”
“응.”
이온이 보고 있던 스토리보드에서 눈을 떼고 임대한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설마 와이어도 없이 찍는다는 건 아니겠죠?”
“미국의 어떤 다큐보니까 사람 세워 놓고 머리 위로 날아서 넘어가더라. 혹시 체조선수는 될까 싶어서. 유명한 트릭커라며? 못해?”
“왜 꼭 그렇게 찍으려는 하는 건데요?”
“왜긴 새꺄. 리얼리티 때문이지. 액션캠프에서 뭘 배운 거야? 우리는 가능한 현장에서 무언가 만들어보려고 하잖아. 그게 충무로 액션만의 장점이잖아.”
드라마 작가 탑5에 드는 황혜경 작가 작품인데, 액션 혹은 공연 장면에서 예산 때문에 타협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온이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술감독의 철학 혹은 안무 스타일 때문이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만 똥고집이 문제였다.
<비객>의 무술 전반을 책임진 임대한은 이온이 캐스팅 되자 욕심이 생겼다.
겉으로는 깔보고 무시하지만, 내심 이온의 트릭킹 실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던 것.
물론 경력이 오래된 베테랑들이 이온보다 트릭킹을 훨씬 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이브라고 할까 예술성이라고 할까, 수년 간 트릭킹에 집중한 이온에 비할 바가 아니다.
<비객>에서 이온이 연기하게 될 캐릭터는 예인집단인 사당패에서 ‘지예(地藝)’또는‘장기(場技)’라고도 하는 땅재주를 펼치는 광대다.
땅재주꾼들이 펼치는 살판은 서양의 아크로바틱이나 비보이들의 브레이킹과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라고 임대한이 주장했다.
“네가 할 수 있는 거 일단 다 해봐.”
이미 임대한의 무술팀 체육관에서 도착하자마자 충분히 몸을 풀어두었지만, 이온은 다시 한 번 몸을 풀었다.
그리고 땅재주의 12가지 재주 즉 앞곤두, 뒷곤두, 번개곤두, 자반뒤집기, 팔걸음, 외팔걸음, 외팔곤두, 앉은뱅이팔걸음, 쑤시미트리, 앉은뱅이모말되기, 숭어뜀, 살판 등과 그나마 기술이 비슷한 브레이킹과 트릭킹을 선별해서 시범 보였다.
“그게 다야?”
“인터넷에서 검색해본 정보로 가장 땅재주와 비슷한 동작을 해본 겁니다.”
“누가 그딴 거 하래? 네가 가장 자신 있는 트릭킹이나 브레이킹을 해보라고.”
하라면 해야 한다.
그가 무술감독이니까.
이온이 어느 정도 역량이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드라마에서 필요한 기술을 적용하거나 보완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온은 썩 내키지 않았다.
임대한이 전통 기예를 싹 무시하고 현대적인 기술로 땅재주를 짰기 때문이다.
“아무리 12가지 기예 중 일부가 단절되어 알 수 없고, 기본적인 기예를 다양하게 베리에이션 할 수 있다고 해도 전통을 왜곡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왜곡 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 실제 남사당 땅재주는 수수해. 아니 재미가 없어. 요즘 시청자들에게는 전혀 감흥을 줄 수가 없단 말이야. 그래서 현대적인 아크로바틱 기술을 좀 섞으려고 하는 거고.”
“논란이 많을 겁니다.”
이온이 걱정스레 말했다.
“노이즈 마케팅 되고 좋지 뭐.”
임대한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 차원이 아닐 겁니다. 전통이 왜 전통이겠습니까. 전통적인 기예에 현대적인 감각을 약간 가미하는 것과 비보잉이나 트릭킹 기술을 그대로 갖다 쓰는 것은 사안이 완전 다릅니다. 왜곡입니다.”
“하여간, 거 새끼.... 누가 한국대 아니랄까봐.”
불과 일이년 전에 지상파 한 방송사에서 방영한 드라마가 역사를 왜곡한 것 때문에 중도에 폐지가 된 일이 있었다.
요즘 관객과 시청자를 어떻게 보는 것인지.
퓨전사극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봐야 똑똑한 집단지성인 시청자에게 씨알도 안 먹힌다.
세계적인 KPOP 아이돌 그룹조차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음악과 안무, 뮤직비디오에 녹여내는 시대다.
그런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해외 KPOP팬들이 무척 좋아하기도 하고.
그런데 우리 전통 곡예를 외국 익스트림 스포츠와 댄스로 바꿔치기 하려고 하다니.
“쪽팔리기 싫다고 말해. 어디서 되도 않는 핑계를 대고 지랄이야!”
“자문해 주시는 분도 동의한 겁니까?”
“마음대로 하래. 어차피 퓨전사극이고 아예 없던 걸 만들었거나 중국식이나 왜색만 덧칠하지 않으면 상관없대.”
이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비객>에는 분명 역사 고증을 해줄 전문가가 있었다.
그런데 이온이 보기에 전문가라는 사람이 어딘지 허술해보였다.
비록 서양사학을 전공하고 있는 일개 학생일뿐이지만, 사이비와 진짜 학자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헐렁한 이온이 아니다.
고증에 참여한 인물은 딴에는 전통문화 분야에서 많은 연구를 수행해 온 문화정책 전문가이자 지방 전통문화 축제 총감독을 다수 역임했다.
역사학자나 전통문화 연구자가 아니라 문화마케팅 전문가라고 해야 옳다.
그런 인물이 <비객>의 역사 감수와 고증을 하고 있었던 것.
원조 사당패와 남성 예인으로만 구성된 남사당패는 뿌리는 같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도 많다.
또한 그들과 관련해서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은 것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전문가가 얼마든지 드라마적 상상력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일리가 있긴 하다.
그런데 비보잉과 트릭킹 기술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문제가 있다.
현재 두 분야의 기술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실제로 육체로 구현할 수 있는 거의 극한에 다다라 있기 때문이다.
500년도 훨씬 전의 조상님들의 상상력과 구현력을 훨씬 넘어섰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차라리 태껸이나 전통춤에서 아이디어를 얻으시는 것이... 곡예로 접근하지 말고 전통예술로.....”
“뭘 자꾸 따져? 남사당패놀이를 공부하지 않았을까봐? 야이, 새끼야! 내가 무술감독이나 하고 있다고 무슨 고등학교 중퇴에 돌대가리인줄 알아?”
답답했다.
추후 논란이 발생하면 무술감독은 빠져나갈 수가 있다.
감수나 고증을 받았다고 하면 되니까.
논란에 중심에 서는 것은 일차로 그것을 연기한 배우다.
그러다가 제작진으로 그리고 고증 담당자로 책임 소재가 옮겨갈 것이다.
논란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것은 배우 당사자다.
“까불지 말고. 이거 봐봐.”
언제 노트북을 가져왔는지, 임대한이 동영상 파일 하나를 재생해 보여줬다.
세계적인 탑클래스 비보이들의 시그니처 무브를 편집한 영상이다.
“이런 거 할 수 있어?”
“이 무브들은 세계적인 비보이들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혹은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라고할 수 있는 시그니처 무브들입니다. 함부로 카피하는 것은 실례입니다.”
“못한다는 말이지?”
똑 같이는 못한다.
본인만 할 수 있으니까 시그니처다.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으면 그것이 시그니처가 될 순 없다.
비보이 & 비걸들은 그저 즉흥적인 느낌만 가지고 무대에서 냅다 돌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매일매일 상상하고 고민하고 연습하고 하고 또 하며 피나는 훈련을 통해서 자신만의 연계기술을 개발하고 루틴을 만들며 시그니처 무브를 창조해낸다.
당연히 그것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할 수밖에 없다.
“한 번 형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뭘 물어봐?”
“제가 드라마에서 흉내 내도 되는지요.”
“브레이킹도 저작권 있어?”
“일부 기술은 저작권 있습니다. 똑 카피에 대해 양해를 구하는 것이 예의이고 레전드에 대한 리스펙입니다.”
대선배들의 일부 시그니처는 많은 후배들이 따라하고 있다.
더 이상 특정 비보이의 시그니처 무브가 아니게 된 기술도 있다.
그럼에도 원조는 원조다.
처음으로 무브를 선보인 비보이의 이름은 영원히 남는다.
체조에서 특정 선수의 이름이 기술이름에 쓰이는 것과 비슷하다.
유명한 시그니처 무브 중에 몇 가지는 이온도 펼칠 순 있다.
동경하던 비보이들의 무브를 흉내 내고 연습했으니까.
“암튼, 새끼가 더럽게 유난을 떨어.”
당연히 유난을 떨어야 한다.
리얼리티를 위해 CG가 아니라 현장에서 실연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땅재주의 12가지 기예 부분에서 전통은 무시한 채 현대적 기술로 도배를 해버린다니.
리얼리티는커녕 왜곡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개소리 말고 시그니처 무브인지 뭔지 다 보여 봐. 니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일단은 무술감독의 말을 따랐다.
이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보여줬다.
카나한 윈터게더링 이후 각 잡고 트릭킹을 제대로 했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카메라에 담은 임대한은 속으로 매우 흡족했다.
마당놀이 장면에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이온이 없을 때와 천지차이였으니까.
그렇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는 임대한이었다.
“오늘은 일단 가봐. 땅재주 장면 콘티 나오면 연락할 테니까.”
“예.”
“사당패놀이 촬영 전까지 다치지 않게 무리하게 몸 굴리지 말고.”
“예.”
이온은 임대한의 무술팀 체육관을 나서면 심사가 복잡했다.
정승복 캐디 사건도 있고.
오늘처럼 자칫하면 배우가 옴팡 뒤집어 쓸 수 있는 영화적 표현상의 문제도 있고.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누구도 배우를 보호해 줄 것 같지 않다.
다들 남 탓 혹은 책임회피를 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배우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
어제까지 이온은 매니지먼트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
이젠 고민을 해야 봐야 할 것 같다.
아주 심각하게.
✻ ✻ ✻
이온은 임대한의 체육관을 나오자마자 90년대생 한국 비보이 가운데 비보이 로켓과 함께 파워무브 쌍벽을 이루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곧장 상동역으로 가서 경춘선을 탔다.
춘천에 도착한 이온은 택시를 타고 비보이 선배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갔다.
이온을 맞이한 인물은 종편의 댄스경연 프로그램으로 대중에게도 친숙한 세계적인 파워무버 닉네임 킬라였다.
“배신자 왔냐?”
“누가 배신자야?”
“배우 한다며? 자식이 진득하지 못하게 자꾸 직업을 갈아타?”
“비켜봐. 형수님한테 인사하게.”
이온은 킬라를 옆으로 밀치고 몇 년 결혼한 킬라의 아내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형수님.”
“네. 안녕하세요.”
비보이 중에서 장가 잘 간 것으로 손에 꼽히는 인물이 킬라다.
참하고 착하고 예쁜 신부를 얻어 많은 동료들이 부러워하고 있다.
“형은 아시안 게임 안 갔어?”
“춘천문화재단과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참고로 킬라가 포함된 크루는 얼마 전 개막한 아시안 게임 개막식 쇼 무대에 섰다.
킬라가 대단한 파워무버이긴 하지만, 그가 속한 크루에는 그 못지 않은 레전드들이 수두룩해서 그의 부재는 크게 태가 나지 않았다.
“때마다 톡이나 틱틱 날리기만 하던 놈이 웬일로 이 먼 곳까지 왔대?”
“형들한테 허락을 좀 구할 게 있어서.”
“무슨 허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