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한치 앞도 모르는 세상.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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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멀다 하고 TV와 영화에서는 새로운 스타들이 탄생한다.
망한 것으로 판명 났어도 다시 확인하게 만든 아이돌 그룹의 멤버, 적은 분량에도 존재감 ‘뿜뿜‘ 해서 눈길 끈 신인배우, 완전 신인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데뷔한지 꽤 됐던 중고신인 등.
그런데 그런 라이징 스타가 될 확률은 로또에 가깝다는 사실.
그 로또 같은 기적을 잡기 위해 오늘도 수천 명의 신인과 무명배우들이 프로필 파일을 들고 영화사와 드라마 제작사를 전전한다.
그렇게 프로필 수백 수천 번을 돌려도 사실 오디션 볼 기회조차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다.
나에게도 꼭 기회가 온다.
천만에 말씀이다.
그 기회가 오는 것은 정말 소수다.
어쩌면 이미 그 소수가 정해져 있을지도 모르고.
또한 공개 오디션이란다.
웃기는 소리다.
사실 '공개'가 아니다.
오디션 정보는 완전 비공개다.
정승복처럼 캐스팅을 업으로 사는 사람들이나 매니지먼트 회사에게만 ‘공개‘된 공개 오디션이다.
무명이나 신인에게는 그런 기회 열려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들 소속사에 들어가려고 난리안 거고.
‘이온이란 놈.’
소속사가 없다.
건방지게 영입을 제안한 기획사에 조건을 걸었다.
당연히 싸가지 없다고 업계에서 찍혔다.
그래서 만만히 봤다.
아무리 연기력이 나쁘지 않고 재주도 많으며 외모가 출중하면 뭐하나.
알려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흙속에 진주.
이 바닥에 그딴 거 없다.
그 귀하다는 진주는 예고에, 연극영화과에, 한예종에, 대학로에, 독립영화판에 널리고 널렸다.
그런 진주 같은 신인이나 무명배우가 메이저 필드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인맥이다.
이 바닥은 선배가 후배 끌고 가고, PD가 아는 매니저의 배우를 쓰고, 어떤 작품은 아예 친목 모임이고.
정말 10년 만에 나올까 말까 한 미친 연기력의 소유자.
또는 보는 순간 누구나 홀릴 그런 미모의 배우.
그런 예외적인 존재를 제외하고, PD나 감독들은 작은 배역에 누가 들어가든 상관없다.
연기하고 싶다고 달려드는 수백 명 다 오디션 보는 거 얼마나 피곤하고 번거로운데.
그래서 캐스팅 디렉터 선에서 추천하고 커트하고 끼워 넣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에 아는 사람 친한 사람 출연시키는 거다.
이 바닥에서 인맥으로 오디션에 합격했다는 말은 기회를 잡았다는 말과 같은 거다.
수만 명의 배우 중에서 인맥 하나만 부족한 배우가 얼마나 많은데.
그 모든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승복이다.
베테랑 캐스팅 디렉터 정승복은 최근에 큰 낭패를 봤다.
비록 인물담당 조연출의 추천이었지만, 제작진에서 먼저 오디션 요구를 한 배우가 나이온이었다.
그가 알기로 소속사가 없는 배우는 거의 대부분은 인맥이 없다.
나이온이란 스턴트맨도 그래야 정상이다.
스턴트맨은 스턴트맨이고 배우는 배우다.
두 개의 영역이 달라 네트워크도 다르다는 말이다.
기껏 인맥이라고 해봐야 연출부일 텐데.
미안하지만, 조감독들은 스턴트맨을 배우로 안 본다.
“잔바리(언론계 은어)는 잔바리일 뿐이니까.”
커피를 마시며 중얼거리는 정승복을 비서가 힐끗거렸다.
현재 정승복은 모회사 액터앤스터디의 김훈 회장 호출을 받아 본사에 와 있었다.
비서데스크 옆 응접실에서 20분 째 대기 중이었다.
“참나. 최근 단편이나 독립영화를 찍고 있다고 해서 전형적인 무명배우 테크트리를 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뒷빡을 쳐?”
사실 인맥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
운 좋은 사람이 위너다.
그런 면에서 나이온이란 녀석이 송하나의 눈에 든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 기회를 살린 것도 칭찬 받아 마땅하고.
녀석은 몇 달 전 종영한 <아이돌>에서 신인치고는 꽤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바 있었다.
시즌2에도 어떤 형식으로든 출연하게 될 거라는 소문이 들려온다.
캐스팅 디렉터 입장에서 봤을 때 액션아카데미 소속 스턴트맨으로 활동하며 드라마와 영화에서 알음알음 단역 커리어를 쌓아가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은 스텝이다.
그렇게 눈물 젖은 빵을 좀 먹어봐야 혹여나 스타가 되도 잘 버틴다.
낮은 수준의 작업도 해보면서 무명생활을 해봐야 어떤 상황에서도 심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건방진 자식......!”
정승복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대견한 것과 자신의 당한 치욕은 다른 문제다.
정승복이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댔다.
찻잔이 비어있었다.
리필을 부탁하려는데 비서가 선수쳤다.
“들어오시랍니다.”
정승복이 옷차림을 점검하고 회장실문을 노크했다.
✻ ✻ ✻
사무실을 보면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의 성격이나 취향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액터앤스터디 김훈 회장의 집무실은 마치 한국 5대 그룹 회장 집무실 같다.
30대 중반의 남성이 혼자 사용하는 사무실치고 너무 요란했다.
김훈이 자신의 집무실처럼 남에게 보여지는 모습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타입임을 알 수 있다.
“안녕하십니까.”
김훈 회장은 인사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대뜸 따지기 시작했다.
“감 떨어진 거야, 원래 감이 없었던 거야?”
“......”
정승복으로서는 유구무언이었다.
김훈은 정승복보다 열 살이나 어리다.
그럼에도 회장이란 직함과 위세를 빌어 반발을 찍찍 내뱉었다.
그 상전의 그 아랫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형곤이랑 그런 놈을 두고, 그런 멍청한 픽을 할 수 있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징징이 작가와 함께 일한 PD가 몇 명이고 하고 싶어 하는 PD가 몇 명인 줄 알잖아. 왜 그랬어? 그렇게 이 바닥에서 오래 일했으면서 아직도 원석 보는 눈이 없나?”
“......”
“어떻게 됐어?”
“전속계약은 싫답니다.”
“나이온 영입 실패?”
김훈 회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당연히 아니겠지. 신인배우가 송하나와 황혜경 두 사람 눈이 드는 것이 쉬워? 게다가 그 깐깐하다는 신지균이 가르친다면서?”
“이미 FLEX-A에서 침 발라둔 눈치입니다.”
“서우일 소속사? 홍성욱이 대표로 있는?”
“예.”
“홍성욱이가 소속 연예인들 막 돌리지 않나? 그래서 소속 배우들과 트러블이 많았을 텐데?”
“그래서 소속 연기자들이 몸값 올라가면 계약 끝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죠. 소송도 몇 개 걸려있고.”
“서우일이 어떻게 홍성욱과 일을 하지?”
“홍 캐디가 서우일 무명 때 신경 많이 써줬던 걸로 압니다.”
“서우일도 아무 일이나 가리지 않고 하는 스타일이긴 해.”
“소속 연기자들 막 돌리는 것도 보기에 따라 다르잖습니까. 본인들이야 얼른 스타가 되고 싶겠지만, 홍 캐디 입장에서는 어린 배우 멘탈을 단련시킨답시고 이러저런 고생을 많이 시키는 거니까.”
“차라리 학원을 차려서 애들을 가르쳐야지. 필드에서 소속 연예인을 훈련시켜. 돈 아깝게.”
소속 배우가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얼른 손절하면 된다.
그것이 김훈과 정승복 등이 일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액터앤스터디에는 젊은 배우보다 중견 연기자들이 많다.
젊은 배우는 회사 이름에서도 나와 있듯이 연계된 학원에서 키우고.
말이 신인배우 트레이닝이지 실제로는 학원생들 호주머니 털어먹는 짓이다.
“홍성욱이 침 발라놨다고 다른 기획사에서 컨택을 안 하지 않을 거 아냐.”
“처음부터 성형 거부니 예능 출연 거부권, 드라마와 영화 선택 권리 같은 조건을 걸어서.... 아마 중대형 엔터에서는 관심을 접었을 겁니다.”
“웃긴 새끼네. 송하나 드라마 한 편 했다고 지가 뭐가 된 줄 아나봐?”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신지균이 그렇게 가르친 것인지 모르겠지만. 객기를 부리긴 했죠.”
“오히려 그 점을 노리고 데려가는 곳이 있을지도 몰라.”
사실이다.
신생이나 소규모 매니지먼트 회사들은 꾸준히 이온에게 영입을 제안하고 있었다.
이온이 자신의 권리와 조건에서 전혀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음에도 전속계약을 맺고 싶어 하는 작은 기획사는 상당히 많았다.
“홍성욱도 쉽지 않을 겁니다. 이 업계에서 수십 년 구르면서 터득한 경험에 의하면. 다 잡은 물고기라도 어항 안에 가두기 전에는 안심해선 안 되죠.”
“어항 안에 가둬도 딴 놈이 채가는 곳이 이 바닥이지.”
정승복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다소 과한 리액션이다.
정승복은 회장실에 들어오고부터 내내 쩔쩔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상명하복은 60년대 깡패들이 장악한 충무로 영화사, 그때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더럽고 치사해도 어쩌랴.
회사 물주이면서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인 걸.
정승복이 살아남은 방식이다.
“황 작가와 곽 PD는?”
“작업실과 사무실에 적당한 가격의 선물을 보냈습니다.”
“우리 징징이 작가께서 착하고 어리숙해보인다고 만만히 보다가는 나중에 한 방에 훅 가는 수가 있어. 명색이 탑 파이브 작가야. 탑 파이브! 은근히 뒤끝이 쎄다는 거 잊지 맙시다.”
“예. 회장님.”
“형곤인가 하는 애는 어떻게 됐어?”
“하반기 종편 드라마에 꽂아주기로 했습니다.”
“나이온은 포기하지 마. 홍성욱이 침 발라놨든 신생이든 뭐든... 접촉하는 회사들 조건 파악 잘 해보고.”
“꼭 영입을 해야겠습니까?”
“요즘 연기력 안정되어 있고 스타성 있는 이십 대 라인 약하다고 난리잖아. 삼십 대 배우들이 청춘 캐릭터 사골국물 우리고 있는 거 몰라.”
언제부터 자기가 업계를 걱정하고 대의에 입각했다고.
김훈은 자신이 가진 인맥으로 아무 힘없는 이온을 사장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나름 업계에서 영향력을 지닌 그에게 찍힌다면 이온을 써주는 곳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유력자에게 찍힌 배우를 위해 나서줄 사람, 연예계에 없다.
“계속 설득해 보겠습니다만.... 건방짐이 아주 하늘을 찌르는 놈이라. 영입을 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미지숩니다.”
“계약금 많이 달라면 주겠다고 해. 대신 시건방진 요구 조건들은 들어줄 수 없다는 걸 명심하고.”
“물론입니다.”
나이온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면 그것이 선례가 된다.
자칫 개나 소나 신인주제에 그런 조건을 걸게 될 수도 있다.
자신의 회사뿐만 아니라, 업계 전체의 시장질서가 교란된다.
순전히 ‘갑’ 입장에서의 시장논리였지만.
“멀리 못 나가요. 가서 일 보세요.”
김훈이 존댓말로 축객령을 내렸다.
정승복이 김훈에게 인사하고 회장실을 빠져나왔다.
액터앤스터디 본사를 떠나며 이온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그는 이온이 자신의 연락처를 지웠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정승복은 이온을 꼭 자신 쪽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상전 앞이니까 영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 것 뿐.
이온의 제시한 조건을 모두 들어준다고 해도 영입을 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첫 단추를 잘 못 끼웠기 때문이다.
그 문제보다 당장 이형곤과 관련해서 <비객>에서의 배역 교통정리가 급선무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야했다.
잘못 처리하게 되면 앞으로 이형곤의 소속사와는 일을 못할 수도 있다.
“어디서 미꾸라지 같은 게 튀어나와서는.....”
정승복 같은 이들은 자신이 갑인 줄 안다.
아니다.
그는 이온과 마찬가지로 을이다.
그가 캐스팅 디렉터로 살아가는 한 그는 갑이 될 수가 없다.
그의 목줄을 잡는 상위 그룹에 투자자, 감독, 배우, 작가가 있는 한은.
이온은 현재 을이다.
만약 A리스트 배우가 된다면 을 중에서 최상위에 올라서게 된다.
그것만으로 정승복 같은 이는 꼼짝 못한다.
특급 스타가 되면 갑 중에 갑이 된다.
제작자나 감독도 함부로 못하는 그런 슈퍼 갑이 되는 것이다.
정승복이 상대하는 오늘의 단역배우 중에 누군가는 언젠가 갑이 될 수도 있다.
실제 을이었던 시절의 한(恨)을 갑의 위치에 올라서게 되어 되갚아주는 배우도 존재한다.
당장 새끼 맹수는 여우와 하이에나에게 한입거리다.
그런데 다 자란 맹수는 다르다.
여우와 하이에나는 항상 맹수의 눈치를 보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