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쩌다 배우-100화 (100/127)

〈 100화 〉 한치 앞도 모르는 세상.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 무슨 삭발이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살판쇠라는 캐릭터로 오디션 봤습니다. 그 배역이 머리를 밀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 살판쇠가 뭔 줄 알아요?

“남사당패 중에서 땅재주꾼의 우두머리 아닙니까?”

- 우리 드라마는 사당패를 다뤄요. 그게 남사당하고 다른 건데. 암튼 뭔가 이야기 전달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네. 땅재주꾼들은 떠꺼머리라고... 혹시 떠꺼머리 알아요? 사극 좀 해봤다고 했죠?

“상투 틀기 전에 길게 땋아 내린 머리요?”

- 맞아요.

“그런데 어린 사람이 살판의 우두머리가 될 있었나요? 제 자랑은 아닌데 동안이라서....”

- 하하. 역시 한국대생이라고 하더니 그런 것도 다 아네.

조연출의 목소리에서 대견함이 묻어나왔다.

한국대 다니는 것과 아무런 상관없다.

배우가 오디션을 보러 가는데,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가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이온은 오디션 대본에 나온 단편적인 단어를 토대로 남사당패와 관련해 사전 공부를 좀 했을 뿐이다.

한국대 타이틀은 어디를 가나 따라 다녔다.

이온으로서는 징글징글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 그러니까. 정리해봅시다. 못하겠다고 한 이유가 삭발 때문이란 거네요?

“예.”

- ......흠.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건방지게 <비객>을 안 좋게 본 것이 절대 아닙니다. 머리를 밀게 되면 그 당시 촬영에 참여하고 있던 <활빈>에 지장이 가기 때문에.....”

- 캐스팅 디렉터가 중간에서 장난질을 친 모양이네.

이온은 이미 캐스팅 디렉터 정승복이 자신이 미는 배우를 꽂으려고 농간을 부릴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먼저 선수를 친 바 있었다.

이온은 별로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비객> 오디션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까.

신지균 선생님의 가르침처럼 최선을 다하되 일희일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까.

<비객>에 캐스팅이 되지 않음으로 해서 몇 편의 단편영화와 독립영화에 출연하면서 새로운 연기세계를 경험하기도 했고.

- 원래 이 바닥이 그래요. 이온씨 정도 되면 보통 매니지먼트에 소속되어 있는데.... 그렇게 독고다이로 활동하면 종종 불이익 당할 거예요. 뒷구멍으로 매니지먼트나 캐디 사이에서 지저분한 딜이 원체 많은 바닥이라서. 막말로 끼리끼리 해먹는 경우도 다반사고.

까칠하고 권위적인 조연출이나 조감독도 많다.

지난 오디션 때도 그렇고, <비객>의 조연출은 그런 유형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이온은 캐스팅 디렉터의 교묘한 말장난에 놀아난 꼴이다.

이온이 받은 오디션 대본의 인물은 분명히 살판쇠다.

그런데 이온과 형곤이 경쟁한 배역은 땅재주꾼이었다.

살판쇠는 그런 땅재주꾼들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말로 연극배우 출신이자 창극 경험도 풍부한 김영훈 배우가 캐스팅되었다.

그 배우가 U자형 대머리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 삼국시대 막론하고 과거에도 대머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도 다 상투를 틀었다.

보통 탈모는 정수리쪽이나 앞머리가 빠진다.

옆머리 뒷머리가 빠지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옆머리 뒷머리를 길러서 상투 틀면 머리도 풍성해 보이면서 깔끔해 보이는 인상까지 준다.

사실 머리숱이 많으면 상투 틀기가 쉽지 않았고 상투를 틀어도 예쁘지가 않았다.

오히려 덥수룩하게 지저분해 보이고 갑갑한데다가 머리가 붕 뜨는 바람에 갓을 쓰기도 힘들었다.

거기다 여름엔 열이 차고 땀도 많이 났다.

여러모로 상투는 대머리들에게 축복이었던 셈이다.

드라마 <비객>에서 그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있다.

- PD님하고 작가님이 이온씨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시간 낼 수 있어요.

“무조건 내야죠. 그런데 조연출님.... 제가 낮에는 좀 곤란합니다. 저녁이라면 내일 당장도 상관없습니다.”

- 촬영 있어요?

“수업이 있어서....”

잠시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온의 추측으로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을까 추측했다.

막말로 조연출 입장에서는 배우하겠다는 녀석이 뭐가 중요한지 분간을 못한다고 여길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었다.

그 동안 독립영화에 출연하고 스턴트맨 일을 하느라 지방 촬영을 자주 다녀서 수업을 좀 많이 빠졌다.

낙제를 하지 않으려면 남은 출결관리를 착실히 해야 했다.

- 독특한 스타일이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스턴트맨까지 병행하다보니까.....”

- 나한테 죄송할 건 없고.... 그럼 내일 저녁에 방배동에서 보는 걸로 합시다. 시간과 장소는 문자 남길게요.

“예. 내일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이온은 몇 순 더 활을 쏘고 활터를 나섰다.

프로덕션 사무실이 아니라 카페에서 보자고 했다.

그런 것으로 봐서는 오디션은 아닌 것 같았다.

미팅자리라면 특별히 준비할 건 없었다.

정승복이 <비객> 프로덕션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를 따라온 직원의 양손에는 에너지드링크가 담긴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정승복이 조연출의 데스크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사이 직원이 <비객> 스태프들에게 에너지드링크를 돌렸다.

“곽PD."

방송사에서는 3차 정도 되는 조연출부터 PD 호칭을 붙이고, 프리랜서는 입봉을 앞두고 있을 때 PD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출연자들은 대체로 감독이란 호칭을 선호하는 편이다.

“나 왔어.”

정승복은 오늘 일진이 매우 사나울 것이란 걸 꿈에도 몰랐다.

“<비객> 끝내놓고 대하사극 한 번 해야지?”

“무슨 대하사극을 찾고 있어요? 그런 올드한 마인드로 무슨 캐스팅 디렉터를 한다고.”

실실 웃고 있던 정승복이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곽준기가 PD 혹은 제작자에게 깨진 모양이다.

“하하. 곽PD가 많이 좀 가르쳐줘.”

“형. 책도 장편소설이 안 읽힌 지 오래됐어. 대하사극처럼 웅장한 스케일과 긴 호흡으로 밀고 가는 장르는 현대인의 감성 코드와 안 맞는다고. 긴 호흡, 웅장한 스케일은 지금 세대들의 코드와 안 맞아.”

“그래. 나도 그런 거 같더라. 그래도 16부작보다 50부작 정도 대작 아니면 12부작으로 시즌 3 정도 하면 좋잖아.”

“나보고 아저씨들이나 보는 드라마 찍으라는 말이야?”

“뭘 그렇게 까칠하게 받아들여. 그냥 덕담인데....”

가만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것을.

괜히 말을 꺼냈다가 면박만 당했다.

‘새끼가 제대로 된 정통사극 연출할 실력도 없는 주제에....’

정승복이 겉으로는 활짝 웃으며 속으로 궁시렁댔다.

“형, 나랑 장난해?”

“왜 또 그래~ 뭐가? 누가 또 우리 곽PD를 화나게 했을까.”

정승복은 속내는 철저히 감추고 곽준기를 달랬다.

“왜 그랬어?”

“뭘?”

“나이온.”

“뭐 하는 앤데? 딴 드라마에 빼앗겼어?”

“<아이돌>에 나온 애. 땅재주꾼 오디션 봤지?”

“걔 못한다고 말했잖아. 자기가 안 한 대.”

“삭발 이야기는 뭐야?”

“무슨 삭발?”

정승복이 시침을 뚝 뗐다.

어떤 대배우에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완벽한 연기다.

아니 철판을 깔았다.

“걔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걔 말을 믿어? 분 바르는 새끼들이 언제 솔직한 거 봤냐? 뒤에서 호박씨 까는 게 배우잖아.”

연예계의 오래된 격언이다.

분 바른 이(배우)는 믿을 게 못된다.

“형, 진짜 나랑 안 보고 싶구나?”

“......?”

정승복이 입을 다물었다.

이때 처신을 잘해야 한다.

흔하디흔한 조연출의 협박이 아니다.

곽준기는 <비객>을 마무리 하고 나면, 곧바로 입봉이 예정되어 있었다.

“나하고 일 할 때 그렇게 장난 쳤던 거야? 지금까지 그랬어?”

“말이 지나치잖아. 곽PD는 내 말을 믿어야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단역 배우의 말을 믿어? 진짜 섭섭하다.”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꼴이다.

곽PD는 30대 초반이지만 나름 이 바닥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

심지어 소위 명문대학교 출신도 아니면서 지상파 방송사에서 밑바닥부터 꾸역꾸역 버티고 버틴 끝에 입봉 기회까지 잡았다.

“나하고 일 하려면 뒤에서 장난치지 마. 기분 진짜 뭣 같으니까. 어디서 쌍팔년에나 통하던 수작을 하고 그래.”

정승복은 대꾸 없이 속으로 곽PD를 욕했다.

‘지가 언제부터 단역배우들 배려했다고. 새끼가.....’

“형, 나 황혜경 작가랑 일하고 싶어. 근데 황 작가 드라마에서 캐스팅 가지고 장난을 쳐?”

“내가 잘못했다. 다음부터 안 그럴게. 트라이글로우 엔터의 박이사가 하도 형곤이를 넣어달라고 난리를 아주 난리를 치니, 나라고 뭐 어쩔 도리가 있어야지.”

“내 앞 길 막으면 형네 물주 액터앤스터디고 뭐고 다 가만 안 둬.”

입봉 작품의 대본을 황혜경이 써주길 바라는 곽준기였다.

최소한 그녀가 키운 작가라도.

지금까지는 탄탄대로였다.

그런데 정승복이 그 탄탄대로에 오물을 묻혀 버렸다.

정말 쌍욕이 나오는 걸 곽준기는 간신히 참았다.

“......!”

정승복 역시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나이도 어린 조연출에게 면박을 당하니 속이 뒤집어졌다.

헌데 곽PD에게 면박을 당한 것은 시작이었다.

띠리리~

정승복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폰을 귀에 대자마다 상대방의 호통이 터져나왔다.

- 정 대표!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야!

자신이 대표로 있는 캐스팅 에이전시 유앤아이의 물주이자 모회사격인 액터앤스터디 기획의 사장이 노발대발했다.

“무슨 일이신데요?”

- 트라이글로우 엔터의 박이사가 전화해서 따지는데 내가 얼굴을 들 수가 있어야지. 도대체 캐스팅을 어떻게 하기에 그 난리를 치냐고!

정승복의 심장이 덜컥 했다.

윗선에서 컴플레인이 들어왔다면, 뭔가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난 것이다.

“곽PD. 잠깐 전화통화 좀 하고 올게.”

정승복이 폰에서 터져 나오는 액터앤스터디 대표의 온갖 꾸지람을 한 귀로 흘리며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도대체 뭐 하는 새낀데.....! 아버지가 무슨 국회의원이라도 돼?”

정승복은 여러 군데서 전화를 받았다.

이형곤의 소속사인 트라이글로우 엔터는 물론이고, 이온의 연기 스승이랄 수 있는 신지균도 있었다.

- 정 캐디. 그러지 맙시다. 단역배우가 영원히 단역이랍니까? 지금 명품조연 소리 듣는 후배들 중에 정 캐디 회사와 거래 안 하는 애들 많은 거 몰라요? 대학로 배우들하고 일 안 할 거요?

“혹시 그 배우가 진짜 선생님 제자였습니까?”

정승복은 안 믿었다.

액션아카데미 출신 스턴트맨을 가르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술자리에 데리고 다니는 여러 꼬마 중에 하나인 줄로만 알았다.

- 내가 가끔 낚시도 데려가고 산도 데려가고 합니다. 연기를 가르치는 건 아니지만 선배로서 그냥 이것저것 알려주기는 합니다.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 선생님 제자인 줄도 모르고 제가 실수를......”

- 내가 가르치는 후배는 좋게 봐주고. 아닌 후배들은 함부로 해도 된다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신지균은 그저 명품조연이자 중견배우 정도가 아니다.

대학로 연극배우들 사이에서 꽤나 신망이 높은 선배다.

그가 누구는 못쓰겠으니 가까이 하지 말라고 말을 한다면, 많은 후배들이 그 대상을 보이콧을 할 정도다.

정말 인간말종이 아니라면 후배들에게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긴 하지만.

신지균이 듣기로는 출연료 장난은 치지 않는다고 했다.

단역배우 하는 후배들 중에는 아주 적은 출연료조차 생계를 좌우한다.

비록 수수료를 많이 가져가더라도 떼먹지 않는 것만 해도 정승복이 인간말종까지는 아니란 거다.

워낙에 ‘사짜‘도 많고 ‘업자‘도 많은 바닥이니까.

어쨌든 신지균은 오랜만에 업계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

알아듣고 못 들고는 오로지 정승복의 몫이다.

사실 신지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전화를 걸어 점잖게 사정 좀 봐달라고 말하는 것밖에 없다.

듣는 사람은 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후우.

정승복은 폐 깊숙한 곳에서부터 진한 담배연기를 허공에 내품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 친분을 쌓은 곽PD의 빈정을 상하게 한 것은 큰 문제다.

평소 선 굵은 이야기나 시대극을 선호하는 PD다.

입봉작품도 스케일이 작을 것 같지 않다.

그 만큼 캐스팅 사이즈도 클 터.

무조건 자신이 캐스팅 디렉터를 맡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단역 캐스팅에서 작업을 좀 쳤다가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친분 있는 신인배우가 소속된 기획사의 톱스타들만 염두에 두다가 로또가 될지도 모를 복권을 놓쳐버린 셈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