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성스럽도록 순수한 그들.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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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은 1학기 수강신청을 하기 전에 액션아카데미 사무실 앞에 붙어 있는 12명의 무술감독들이 작업하고 있는 작품들과 스케줄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3~4월 두 달간 촬영이 가장 많은 요일을 확인했다.
화요일이었다.
그에 따라서 월, 목, 금요일에 강의를 몰았다.
최대한 화·수요일에 잡혀 있는 촬영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한국대 안에서도 서양사학과와 동양사학과는 졸업시험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학과로 손꼽힌다.
졸업반은 한 학기 동안 서양사연습이라는 과목을 수강하며 졸업논문을 작성하게 된다.
졸업논문 발표회 직전까지 수도 없이 수정작업을 거치는데, 그 기간 동안 심사 교수진들에게 계속해서 지적을 받는다.
논문이 미흡하면 대놓고 면박을 당하기 일쑤다.
이온 입장에서 연예계(?) 활동으로 인해 일부 교수진에 눈총을 받고 있고 있는 터라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것 같아 걱정이 됐다.
아직 1년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당장은 평균 B학점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온은 발걸음을 빨리해 다음 강의실로 향했다.
복도에서 후배 홍수진과 마주쳤다.
“빵!”
홍수진이 이온을 향해 손가락 총을 쐈다.
“......?”
이온은 그녀의 뜬금없는 짓거리에 빤히 쳐다볼 뿐.
헤헤.
홍수진이 웃었다.
귀염상에 볼 가운데 보조개가 인상적인 후배다.
남자 후배들은 친해질만 하니까 입대를 위해 휴학을 해버렸다.
그나마 남은 후배 중에서 친한 녀석 중에 한 녀석이 홍수진이었다.
귀하게 자라서 어리광을 부리는 것인지.
성격 자체가 애교가 많은 것인지.
마주칠 때마다 과한 리액션과 하이텐션을 보여준다.
“오빠, 우리 같이 학교 다는 것 맞아요?”
“같이 다니지는 않고. 같은 학년의 수업을 듣고 있지.”
되도 않는 말장난이다.
그런데 홍수진이 웃겨 죽는다.
리액션 만큼은 과에서 최고다.
“매번 만날 때마다 밥 한 번 먹자고 하구선.”
“점심시간에 맞춰서 톡을 하든 날 찾아오든 하지 그랬어.”
“톡도 씹으시잖아요.”
“누가 들으면 매번 그러는 줄 알겠다.”
강의 들으랴 <활빈> 촬영을 병행하느라 워낙 정신없이 일주일을 보내느라 후배들을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서양사학과만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학과 분위기가 개인플레이가 강한 편이다.
학교에서는 친하게 지내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선배에게 밥 사달라 술 사달라 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다들 자발적인 아싸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녀석만 빼고.
“오빠, <활빈>에도 나오죠?”
“단역은 아니야. 액션배우로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몇 회 찍었어.”
“저번 주에는 금토 2회에 다 나오더라구요.”
“나인 게 티가 나?”
“당연하죠!”
“.......?”
친누나도 드라마 속 액션장면에서 이온을 찾아내려면 꽤나 헛갈리는데 과 후배가 알아본단다.
“막 과일 쌓아놓은 매대에 날아가 처박히고 그러던데 몸을 괜찮아요?”
“밥 먹듯이 하는 일인데 안 괜찮을 리가.......”
“긍정적이라 참도 좋으시겠어요.”
홍수진은 자못 냉랭한 말투로 비꼬았다.
그런데 그 안에 내포된 걱정까지 모두 숨기진 못했다.
얼굴 표정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애가 날 좋아하나? 왜 속상해 하지?’
이온은 영화와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한 것 때문에 학내에서 꽤나 유명인사다.
그렇다고 학교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가신 일이 벌어지는 일은 전혀 없다.
이온은 있는 듯 없는 듯 스텔스모드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과 후배들 극히 일부와 교류할 뿐이었다.
“강의 노트 필요하면 말해요.”
“나중에 부탁 좀 하자.”
“언제든지요!”
강의 노트 빌려주는 것이 그렇게 즐거운 일인가.
홍수진의 기분이 좋은 것이 다 느껴질 정도로 역동적인 리액션이었다.
“말 나온 김에 오늘 저녁 먹을까?”
“진짜요?”
홍수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너무 반색해서 이온은 제안을 취소할까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너희 동기 여자애들이 몇 명이었지?”
“....일곱 명이요.”
어딘지 실망이 묻은 말투다.
“내가 술을 못 해. 그래도 괜찮다면 저녁에 보든가.”
“여자애들만이요?”
“남자 녀석들도 올 사람은 오라고 하고.”
“넹.”
귀엽게 대답한 홍수진이 배시시 웃었다.
모든 강의가 끝나고, 홍수진이 동기 여학생 두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다른 후배들은 왜 같이 오지 않았는지 묻진 않았다.
‘돈 굳었지 뭐.’
이온은 후배들을 데리고 샤로수길이 아닌 행운동 먹자골목으로 갔다.
샤로수길의 물가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한 지역으로 간 것이다.
후배들이 잘 안다는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다들 복스럽게 잘 먹었다.
술도 가볍게 곁들였다.
식사 내내 생각보다 연예계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지 않았다.
요즘은 온갖 매체를 통해서 연예계 사정이 많이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다.
넷튜브에만 들어가도 영화나 드라마와 관련한 생생한 뒷이야기를 들어볼 수가 있다.
게다가 후배들은 이온과 마찬가지로 3학년이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벌써부터 이만저만 아니었다.
연예인 이야기는 이들의 주관심사가 아니었다.
“배우 하는 거 재밌어요?”
“응.”
“오빠는 그래도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좋겠어요.”
“오늘 행복한 것이 내일도 계속 행복하리란 보장은 없어.”
“좋아서 하는 일 아니에요?”
“재밌긴 해.”
행복은 예측할 수 없을 때 더 크게 다가온다.
반면에 불행은 예측할 수 없을 때 감당할 만하다.
뜻밖의 상황에서 기대 이상의 무언가를 얻었을 때 행복을 느낀다.
반면에 이미 미래를 예측할 수 있어서 기대감이 완전히 사라진 상황에선 어떤 것도 행복하지 않다.
게다가 불행은 모를 경우에는 견디고 감내하지만, 알게 되는 그 순간 더 큰 불행이 시작된다.
따라서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행복은 더 크게 누리고, 불행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석사까지 하고 취업하라는 교수님도 계시고. 유학을 추천하는 분도 계시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미래의 불확실성이 현실의 힘겨움과 만나면 불안함이 싹튼다.
자신이 미덥지 않을수록 이 불안함은 더욱 커져 간다.
그럴 때 불안함을 잠재울 확실한 무언가를 원하기 시작한다.
영혼까지 끌어 모아서 무언가를 도모한다고 해서 ‘영끌‘이란 단어가 유행하고 있다.
어떤 학생은 학자금 대출금으로 가상화폐에 투자했다가 큰 낭패를 봤다.
또 다른 어떤 학생은 오늘만 사는 것처럼 술, 섹스 등에 깊숙이 탐닉한다.
극히 일부는 마약 같은 것에 손을 댄다.
도전은 엄두도 되지 못하고 아예 포기부터 하는 청춘도 있다.
아무 것도 안 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국은 잘 갖춰진 사교육시스템으로 인해 청년의 스펙(각종 자격증)은 나날이 좋아지고 그에 따라 기준도 높아진다.
그래도 모자란 것인지 사회로부터 새로운 기준을 또 다시 제시 받는다.
이온은 남들이 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학벌, 외국어능력, 출중한 외모 기타 등등.
그럼에도 불확실성이 매우 큰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서양사학과 후배들은 그런 이온을 선망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연예인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자신들이 걸어가는 길보다 더 희박한 성공확률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부 학과 후배들은 내심 이온을 동정하고 있거나 비웃을지도 모른다.
허황된 꿈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
그런 평가를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온은 일찍이 철이 든 편이다.
오늘의 하루가 어제와 같다면 미래 역시 오늘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앞공중돌기나 에어트랙 연습을 빼먹으면 내일은 그로인해 약간 무뎌진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서 오늘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미래는 현실의 연장선 위에 존재한다.
또한 삶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움직인다.
삶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목적이 아닐까....?’
때문의 함부로 성급하게 삶의 끝을 정하거나 규정해선 안 된다.
삶은 움직이는 것이고, 누구도 그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지탱하는 기둥은 여럿이 있다.
그중 하나의 축이 삶의 목적이다.
목적이 없으면 삶은 표류하고 갈피를 잡기 어렵다.
목적이 전도되면 삶이 피폐해진다.
인생의 말미에 가서는 후회와 번민만 가득해진다.
자아를 가치 있게 만들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 같이 추상적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삶의 목적은 개개인마다 다를 것이기에.
“오빠는 입이 무척 짧은가 봐요. 우리만 돼지처럼 먹는 것 같네.......”
홍수진이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 이온을 보며 물었다.
“내가 요즘 이진한 스턴트더블을 한 번씩 하고 있거든.”
무겁고 진지한 대화에 진이 빠졌던 후배들이다.
요즘 떠오르는 신예 스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관심을 보였다.
“진한씨가 나보다 많이 말랐어.”
“스턴트맨은 자기가 대역하는 배우와 똑같이 다이어트를 해야 되나 보죠?”
“그게 일반적이야. 사실 내 경력으로 주인공 더블을 할 정도는 아닌데, 진한씨가 키가 나와 비슷하거든.”
“오빠 키가 몇이에요?”
“184.”
“거의 190 될 줄 알았는데. 그것 밖에 안 돼요?”
“실제 키보다 좀 더 커 보이긴 해. 그것이 대역 하는데 유리한 점이 있고. 진한씨도 그렇지만 주로 모델 출신 배우들 중에 마른 체형이 많아. 대역을 연기하려면 배우들의 사이즈에 맞춰줘야 하거든. 대역은 사이즈가 가장 중요해.”
때문에 송관효 감독은 이온에게 근육을 필요 이상 키우지 못하도록 제한을 가하고 있었다.
만약 180 중반 신장에 근육질 배우 대역을 해야 한다면 그에 맞춰서 이온도 근육을 키워야 할 수도 있다.
아직 그런 배역은 맡지 못하고 있었다.
“오빠는 팬클럽 없어요?”
“맞아. 팬클럽!”
“우리 모두 가입할게요.”
“해외에서는 K-드라마 팬들 사이에서 이름이 조금 알려진 모양인데. 팬덤이 만들어질 정도는 아니야. 조단역 하나 한 것으로 팬클럽 만들어질 정도면 내가 지금 너희들하고 저녁 먹고 있진 않았겠지. 아마 영화나 드라마를 찍고 있을 거야.”
그때 열심히 톡에 빠져 있던 효정이란 후배가 입을 열었다.
“친구 한 명 여기로 오라고 해도 될까요?”
“우리 과 후배야?”
“다른 과에요.”
홍수진을 비롯해 동기들이 효정에 눈치를 줬다.
“저녁 안 먹었으면 오라고 해.”
“그래도 되요?”
“응.”
이온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우리 학교 영화제작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친구인데요. 선배님한테 뭐 좀 물어볼 게 있다고 해서요.”
“얄라리?”
“THI라고요.”
한국대 영화동아리는 1979년 만들어진 얄라리가 유명하다.
THI라는 동아리는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선배님도 길버트 아데어의 소설 ‘성스럽도록 순수한 그들’(The Holly Innocent) 아시죠?”
“응.”
“동아리 이름을 거기서 따왔다고 하네요. 영화로도 만들어졌잖아요.”
‘성스럽도록 순수한 그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이다.
프랑스 68운동 혹은 5월 혁명이라는 사회적 혼란,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20대 청춘과 딜레마, 한창 때의 성적 욕구 등 얼핏 잘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잘난 척 하기 좋아하고 지적인 체 하는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랄까.
이온이 다소 냉소적으로 평가를 내린 이유는 영화가 지나치게 현학적이란 사실 때문이다.
게다가 근친상간, 쓰리썸, 성기 노출 등 다소 불편한 외설 설정으로 대중적인 영화는 아니다.
또한 영화 곳곳에서 등장하는 흑백영화들과 현학적인 대사들 그리고 예술작품 오마주들은 아는 만큼 보이는 예술영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물론 이온은 <몽상가>를 처음 보면서 상징과 은유 대부분을 파악했다.
아마 함께 저녁을 먹고 있는 후배들도 영화를 본다면 금방 이해할 가능성이 높았다.
프랑스 68운동을 모를 수가 없고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예술작품 오마주도 얼추 유추할 수 있을 테니까.
암튼 영화 <몽상가>는 혼란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사회를 바꾸려는 직접적인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자유, 젊음만을 외치는 청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아마 감독은 정치와 사회에는 무관심하면서 사회를 향해 나 개인만의 자유와 청춘만을 말로써 강조하는 유럽의 젊은이들의 가려진 진실 혹은 염세주의를 있는 그대로 담으려고 했던 것 같다.
“어서 와.”
20여분이 지나서 효정의 친구가 음식점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철학과에 다니고 있는 이미연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나이온이에요.”
잠시 자신의 소개와 영화동아리 소개가 이어지다가 미연이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이온은 출연을 부탁할 줄 알았다.
“이번에 단편영화를 한 편 찍을 예정인데, 스턴트 장면이 있어요. 혹시 선배님이 아는 분 좀 소개시켜 주실 수 있을까요?”
“단순히 위험한 장면을 대신 해 줄 사람, 아니면 코레오그래피를 해줄 사람. 어떤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한 거죠?”
“이왕이면 안무를 짜줄 감독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