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쩌다 배우-95화 (95/127)

〈 95화 〉 성스럽도록 순수한 그들.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물론 재능기부를 바라겠죠?”

“아무래도 단편영화라서 예산이 적어요. 그래도 성의표시를 해야 되니까 교통비조로 조금... 아주 쬐금....”

미연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런 인연도 연줄도 없는 사람에게 공짜로 와서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이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시나리오 가지고 있어요?”

“예?”

“찍으려는 단편영화 시나리오 읽어볼 수 있냐구요.”

“예, 옛! 있어요!”

미연이 냉큼 가방을 뒤져 A4용지로 출력된 시나리오를 꺼냈다.

1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의 시나리오였다.

시나리오를 전달받은 이온이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별 것 없다.

하릴없이 PC방에서 게임이나 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백수와 그의 친구들은 오늘따라 하는 하는 게임마다 패배를 거듭해서 기분이 좋지 않다.

심기가 매우 불편한데, PC방 앞 골목길에서 웬 차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신경을 거슬린다.

백수와 그의 패거리들은 아예 골목길을 막아서며 차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길막을 한다.

그러다 운전자와 충돌이 일어난다.

그렇게 끝나면 좋았겠지만, 어린 청년들에게 수모를 당한 운전자는 백수 청년을 스토킹한다.

아내와 사랑스러운 딸이 언제 귀가하냐고 채근을 해도 막무가내다.

백수 청년을 스토킹 하다가 드디어 기회를 포착하게 된다.

운전자는 한적한 도로에서 담배를 피우는 백수 청년을 자신의 차로 밀어버린다.

차에 치여 사경을 헤매는 백수 청년이 살려달라고 애원해보지만, 중년 남자는 분노에 완전히 잠식되어서 그나마 숨을 유지하고 있던 백수 청년을 패죽인다.

그리고 운전자는 백수 청년을 트렁크에 실어 사라진다.

그 장면이 그대로 CCTV에 찍히는 것으로 영화가 끝이 난다.

“자동차로 밀어버리는 장면 촬영을 도와줄 스턴트팀이 필요한 거네요?”

“팀이라기보다는 스턴트맨 한두 분 오셔서......”

“시나리오만 놓고 보면 차가 사람을 밀어버리는 설정인데, 한 두 사람이 와서 한다......?”

“.....그게요.”

“미연씨가 연출해요?”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는 이온에게서 전문가의 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예.”

미연은 마치 지도교수님께 졸업논문을 보여드리고 혼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만큼 이온에서 품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미연씨. 내 말 오해 하지 말고 들어요. 자동차 사고와 관련된 아주 작은 액션도 아마추어들이 함부로 하다가는 큰일이 날 수가 있어요. 제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로 눈속임 콘티를 짠다고 해도 또 극단적인 점프컷으로 처리한다고 해도 사고 장면을 찍게 된다면 비전문가들이 현장에서 마주치게 될 곤란한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닐 거라 장담해요.”

“그래서 전문가를 모시려고 하는데... 그쪽으로 아는 분도 없고. 돈도 없어서.”

액션아카데미로 단편 혹은 독립영화 의뢰가 꽤 들어온다.

돈과 상관없이 스케줄만 맞으면 도와주는 편이다.

무명 배우들이 단편과 독립영화에서 연기 훈련 기회로 삼는 것처럼 연차가 적은 스턴트맨들도 일종의 훈련이라 여기고 기꺼이 손을 보태는 편이다.

물론 아무 영화나 막 도와주지 않는다.

학생단편이라면 졸업 작품, 일반인이라면 감독이 작품경력이 있는 독립영화, 충무로 조감독이 찍는 작품 등을 주로 돕는다.

이는 미래를 대비한 투자이기도 하다.

그들이 상업영화판에 나왔을 때 단편영화를 찍을 때 졌던 신세를 갚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세상에 완전한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어쨌든 연차가 적은 스턴트맨이라도 그 분야에서 전문가다.

당연히 전문가 손 탄 작품과 그렇지 않은 것에 차이는 상당히 크다.

“카 엑시던트 시퀀스만 하루?”

“네.”

“리허설은요? 그냥 현장에서 그날 바로 찍지는 않겠죠?”

“......리허설은. 그러니까 하긴 해야 되는데. 논의를 해봐야죠.”

점점 대화가 이상해진다.

마치 이온 본인이 액션안무를 짜줄 것처럼 질문하고 있다.

“저... 선배님?”

“왜요?”

“혹시 선배님이 직접 도와주시려고요?”

이온은 즉답 대신 딴 소리를 했다.

“여기 백수 역할은 캐스팅 됐어요? 자동차에 치는 캐릭터요.”

“일단 후보는 있긴 해요. 근데 아직 결정을 못했어요. 그 배우가 자동차에 치는 연기를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캐스팅 된 친구에게 미안하지만, 혹시 내가 해도 되겠어요?”

“예?”

미연이 깜짝 놀랐다.

너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 했다.

삼대 드라마작가로 꼽히는 송하나의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가 눈앞에 있는 선배다.

최근에는 <활빈>에서 액션배우로 활약 중이다.

그런 그가 겨우 학생 단편영화에 출연해 준다고 한다.

물론 더 유명한 배우들도 학생 영화에 출연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실제 출연하는 일이 종종 있다.

한예종, 영화아카데미, 배우 본인이 졸업한 학교 후배들에 한해서다.

한국대의 경우 전통의 영화 동아리 ’알라리‘라면 또 모를까.

자신 같이 동호회 수준의 아마추어 작품에 출연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이렇게 저렇게 콘티를 짜서 찍으면 되겠지 막연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구타 장면이든 자동차 사고 장면이든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현재 시나리오 지문의 사이즈를 현역 무술팀에 부탁한다면 꽤나 까다롭게 굴 테고 돈을 요구할 수도 있어요.”

“얼마나....?”

“방송의 경우 최소 10시간에 24만원. 교통비, 식대, 장비대 등은 뺀 금액이에요. 카 스턴트팀은 각자 일당으로 50만원을 요구할 수도 있어요. 기본 세 명이 함께 현장에 나올 것이고요. 지금 말한 금액은 독립영화 기준이에요.”

“......”

미연의 말문이 턱 막혔다.

대략 10만 원 정도 일당을 주면 될 줄 알았다.

잡다한 비용을 제외하고 최소 일당 20만 원, 카 스턴트맨의 경우 그 몇 배를 줘야 한다니.

“이럴 때 나처럼 액션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액션배우를 캐스팅하면 좋아요.”

이온이 씨익 웃어보였다.

그저 스웨그를 해본 것 뿐.

끼 부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미소를 본 여자 후배들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술기운이 올라서는 아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었어도 이온의 동안 미모(?)는 어디 가지 않았다.

이온이 미소를 지을 때 소년미가 살짝 드러났다.

순간적으로 후배 여학생들의 심장을 콕 찔렀던 것.

“팁이라면 팁인데.... 캐스팅한 액션배우를 통해서 공짜로 대단한 양반들을 불러와서 써먹을 수 있으니까요. 하하.”

이온이 말을 하고난 후 가볍게 웃었다.

“선배님. 그게요. 시나리오 상의 백수 캐릭터는 하찮은......”

“어떤 영화나 드라마에도 하찮은 배역은 없어요. 제대로 표현 못한 배우는 있을 수 있어도.”

짝.

수진이 박수를 쳤다.

“오올~ 진짜 배우 같아요~”

발갛게 볼을 붉히고 있던 수진이 하이텐션으로 떠들었다.

마치 속내를 감추기라도 하듯이.

“그럼 가짜인줄 알았냐?”

“아니 진짜 배우요. 연예인 말고 배우!”

배우(俳優).

세상의 수많은 직업의 종류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유독 한국의 거의 대부분의 연기를 직업으로 삼는 이들이 이 칭호를 얻기 위해 애를 쓴다.

한때는 TV에서 활동하는 이와 흔히 충무로라고 일컬어지는 영화계에서 활동하는 연기자를 구분하는 호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대체 한국에서 연기를 업으로 삼은 이들 왜 배우라는 이름으로 살기 위해 애쓸까.

사실 연극 무대에서 펼치는 연기, TV 드라마에서 보이는 연기, 스크린에 투영된 연기는 타인의 삶을 주체화한다는 점에서 모두 똑같다.

디테일한 연기 기술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연기법의 본질은 같다.

그런데 왜 탤런트 연기자 등의 명칭을 털어내고 배우라고 불리고 싶어한다.

대중들도 무의식적으로 배우와 탤런트 혹은 연예인을 구분한다.

과거에는 매우 노골적이었다.

탤런트 혹은 연예인이라 불리면 어떻고 배우라 불리면 또 어떻기에.

그 두 영역 사이에는 어떤 미묘한 간극이 존재하기에 연기하는 많은 이들이 궁극적으로 영화로 옮겨가 배우란 타이틀을 얻으려고 할까.

별것 아니라면 별것도 아니다.

보통 배우라는 명칭은 연기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영화에서 주로 활동하며 연기력이 검증된 스타를 두고 연기자니 탤런트라고 부르지 않는다.

<화성연쇄살인>의 송대호를 연기자 혹은 탤런트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외국의 경우는 연기를 펼치는 모든 매체에 참여한 사람을 actor라 칭한다.

연기력이나 활동 영역에 따라 명칭을 구분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의 평단 및 관객들은 ‘연기를 잘해야 배우다’라는 개념이 꽉 들어차 있다.

수진은 그걸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액션배우라고 무시하는 거 아니지?”

“아니에요!”

홍수진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요란하게 흔들어댔다.

술기운인지 볼이 빨개진 녀석이 어린애처럼 행동하니까 제법 귀여웠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온은 참았다.

“여기 엔딩 씬에서 백수 청년이 신나게 얻어터지는 장면도 있네요?”

“.....네?”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미연이 얼른 정신을 수습했다.

“차에 치인 다음에 또 다른 주인공이 분노에 차서 마구 패는 게 있어요. 혹시 추천하실 배우분이라도.......?”

“상업영화에서는 이런 장면도 모두 무술감독이 콘티를 하고 직접 찍는 편이에요. 학생영화에서는 감독이 직접 연출해 봐도 되겠죠. 단편작업이란 게 배우고 실험하고 도전하는 과정이니까.”

정말 전문가가 해줘야 할 것이 아니라면 감독이 직접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단편영화도 엄연히 영화예술의 독립적인 한 부분이긴 하지만, 프로의 손길이 너무 많이 타면 단편 특유의 거칠고 정제되지 않는 영화적 화법이 사라질 수도 있다.

“진짜 선배님이 출연도 하고 액션 장면도 도와주시려고요?”

“오디션 봐야겠죠?”

“아니, 아니에요! 안 보셔도 되요. 무조건 합격이에요. 아니....”

미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넙죽 허리를 굽혔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인 효정이 방정을 떠는 친구 미연을 슬그머니 잡아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이온을 향해 고마움을 표했다.

“오빠, 고마워요. 나는 그냥 오빠가 아는 스턴트맨이 많을 것 같아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어차피 다 후배들인데. 못 도와줄 게 뭐가 있겠어. 대신...”

또 어떤 좋은 말을 해줄지.

미연이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이온의 입을 주시했다.

“촬영을 평일에 잡지 말아줬음 좋겠어.”

비록 기대와 다른 말이었만, 미연으로서는 무조건 배려해야 할 사항이었다.

“당연히 수업에 지장이 가시면 안 되죠.”

“특히 화요일과 수요일은 내가 드라마나 영화 촬영을 해야 할 지도 모르거든.”

수진이 냉큼 끼어들었다.

“<활빈> 말고 다른 드라마 출연해요?”

“아직 결정된 건 없어. 혹시 몰라서 그 두 날은 일정을 비워두고 대기해야 될 것 같아.”

“최대한 선배님 스케줄에 맞춰서 촬영일정 짤 게요.”

미연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래주면 고맙고.”

수진이 자신의 폰을 손에 쥐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 SNS 계정 좀 알려주세요.”

“니들 알고 있잖아.”

“메신저 말고 서치스타그램이나 뉴룩북 같은 거요.”

“없어.”

“무슨 연예인이 그런 것도 안 해요?”

“안 하는 연예인들 많을 걸? 내가 공군에 있을 때도 SNS 안 하는 군악병 많았어.”

“소속사도 없죠?”

“응.”

“팬 관리도 안 하겠네요?”

“팬이 있어야 관리를 하겠지?”

“지금 하나 만들어요.”

“소속사 계약하게 되면 그때 공식계정 생기면 알려 줄게.”

“언제요?”

“글쎄. 언젠가는.... 생기지 않을까?”

이온은 지금까지 메신저를 제외하고 SNS 없이 불편함 없게 살아왔다.

딱히 타인과 공유할 소식이 없고, 낯선 이들과 소통의 필요성을 못 느꼈으며, SNS를 통한 소통이 왜 소통인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얻고 싶은 정보나 최신 트렌드는 넷튜브를 통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친한 친구들이나 지인과 소통도 부족한데 모르는 사람들과 소통한다고 하루 종일 스마트폰 붙잡고 앉아 있는 것은 성격에도 맞지 않았고.

“우리라도 오빠 팬클럽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

“해외 사이트에서는 이온 오빠 짤도 많이 돌아다니는 것 같던데.”

“무슨 짤?”

“<아이돌> 마지막회 데뷔무대 있잖아. 그거 뮤비 버전으로 올라온 거 있던데? 공식채널이 아니라 개인이 편집해서 올린 거라더라.”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말해주지!”

언제부터 이온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후배들끼리 법석을 떨었다.

이온이 후배들을 진정시켰다.

“니들은 내 팬클럽 신경 꺼. 학점 관리나 잘해. 그래야 대학원에 진학하든 유학을 가든 할 거 아냐.”

효정이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에잇! 기분도 꿀꿀한데 노래방이나 가요!”

효정의 제안대로 이온은 후배들과 노래방으로 2차를 갔다.

후배들이 열심히 노는 사이 이온은 미연과 단편영화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학교 후배의 단편영화를 도와주겠다는 결정은 다소 충동적이었다.

그렇지만 수락한 것을 후회하거나 철회하고 싶지 않다.

도리어 재밌을 것 같다.

스턴트는 연기도 하지만 연출도 필요하다.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어떻게 맞아서 어떻게 쓰러져야 카메라에서에 더 사실적이고 더 강렬하게 담길까.

그런 고민은 연출 고민이다.

배우는 카메라와 연출을 알면 연기에 도움이 된다.

지적이고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연기 스타일을 추구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또래의 청년들과 달리 이제 더 이상 다양한 사회경험을 직접 체험해볼 수 없는 이온입장에서 단편영화로나마 다양한 인간 군상을 경험하는 것이 나중에 좀 더 깊고 폭넓은 연기를 하는 데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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