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어디서 건방지게 밀당을!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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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은 막상 <아이돌> 작업이 끝나니까 헛헛한 기분이 들었다.
뭘 했다고 배역투사 후유증일까.
사실 심리적인 피로보다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쌓였던 육체적인 피로도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하루 종일 잠만 잤다.
하암.
하품은 나오는데 잠은 안 온다.
너무 많이 자서 그렇다.
머리는 일어나라고 명령하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침대에서 누운 자세를 이렇게 바꿨다 저렇게 바꿨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강철슈트 토니>의 테마음악 벨소리가 우렁차게 울려댔다.
“영재?”
죽마고우 이영재.
몇 달 동안 연락을 드문드문했지만, 너무 바빠서 만날 기회가 없었다.
예전에는 거의 매일 만나 놀았었다.
최근에는 누나에게서 영재 소식을 들을 정도로 서로가 바빴다.
- 야, 뭐하냐?
“누워서 잠을 더 잘까 좀 쉬었다가 다시 잠을 잘까 고민 중이다.”
- 븅신. 흐흐.
정겨운 목소리다.
오랜만에 통화했음에도 거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 그랬다.
시간적 공간적 어떤 거리도 친구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 수 없다.
- 촬영 쫑 했다며?
“응.”
- 왜 연락 안 했어?
“어제 끝났어.”
- 나와라. 밥 먹자. 내가 산다.
“장기라도 하나 떼다 팔아먹었냐?”
- 피땀눈물을 갈아 넣은 결과... 돈이 좀 생겼다.
“나 많이 비싸졌다.”
- 회? 소고기? 골라.
“회 굿!”
이온은 피식 웃고는 약속을 잡았다.
서울로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영재가 대화역 근방에 있다고 하니 바로 나가면 되었다.
이온은 세수만 하고 롱패딩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동네에서 먹는 건데 차려입을 이유가 없었다.
본래 외모를 꾸미는 것에 큰 관심이 없던 터라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도 그런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온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대화동 먹자골목으로 통하는 구역이 있다.
이곳은 고급스러운 한정식집부터 수십 년 경력의 요리사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 학생들이 좋아하는 분식집, 음악과 음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라이브 카페까지 다양하게 모여 있다.
대화역과 주엽역 사이에 위치해서 접근성이 우수하고 멀지 않은 곳에 생태공원과 일산 호수공원도 있다.
이온은 누나와 자주 이곳에서 외식을 하기 때문에 걸러야 할 곳과 추천할 곳을 나름 구분해 놓고 있었다.
먹자골목 입구에 도착하자 영재의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거라 무척 반가웠다.
웬일인지 영재는 꽤나 잘 차려입고 있었는데, 웃는 낯으로 이온을 반겼다.
“소개팅 했냐?”
“누굴 좀 만날 일이 있어서. 이 새끼가. 눈곱은 떼고 나온 거야?”
“머리는 안 감았지.”
“연예인이 되가지고. 잘한다.”
“연예인 같은 소리가 한다. 시끄럽고. 진짜 회 먹어?”
“아무 거나. 어차피 넌 술도 안 먹잖아.”
“스끼다시 쓸데없는 거 안 깔고 알차게 나오는 횟집이 있는데. 갈래?”
“앞장 서서 길을 열거라.”
이온은 피식 웃으며 거리를 걸었다.
사람이 늘 붐비는 곳이다.
저녁시간이라 연인이나 가족 단위가 많았다.
“돌아다니면 알아보는 사람 없어?”
“없어.”
이온이 고민도 없이 단박에 대답했다.
“왜 없지? <아이돌>로 뜬 거 아니었냐?”
“나랑 같이 출연하는 오찬기 알지?”
“안다고 할 수 있냐? 드라마에서 본 게 다 인데....”
“찬기가 메이크업 지우고 수수한 차림으로 네 앞으로 지나가면 알아볼 수 있겠냐?”
“.......”
“박무영 선배나 송대호 선배같이 스타면 몰라도 조단역 배우를 현실에서 바로 알아보기 쉽지 않을 걸?”
“그럴까?”
두 사람은 먹자골목 안쪽의 횟집에 자리를 잡았다.
곧 회와 단품 안주를 몇 개 주문했다.
“술 마시게?”
“맥주 두 잔은 가능하니까.”
어떤 술자리에서도 맥주 두 잔을 넘기지 않는 이온이다.
오늘은 그러기 싫었다.
오랜만에 죽마고우라고 할 수 있는 친구랑 술에 취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뭐 하냐, 요즘?”
“빨리도 묻는다. 여기저기 쑤셔보고 있지. 쉽지 않더라.”
“벌써 취업 준비하는 거야?”
“해외인턴 알아보고 있어.”
“진짜 인도네시아 생각하고 있냐?”
“그냥 외국계 계열 회사에 지원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
“무역관련?”
“뭐 그렇지.”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도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외국어 능력이나 스펙만으로 취업할 생각은 버리는 게 좋겠더라고. 교수님도 그러시더라 언어스펙은 도구에 불과할 뿐이고 경쟁력은 언어 플러스 자신만의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그건 너 같은 학벌 좋은 놈들에게나 해당되는 거고.”
“과 선배 중에 화학회사 해외영업하는 형이 있어. 그 형도 나처럼 4개국어 하거든. 그 형이 그러는 거야, 언어 능력이 실무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거 아니더라고. 더 중요한 게 화학관련 지식하고 협상력이라고 하는 거야.”
사실 자격증(전문직자격증 제외)은 한국의 우수한 학원시스템을 통해 금방 습득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는 정말로 쉽지 않다.
언어 관련 각종 자격을 취득한다고 해서 자신만의 차별성이 되는 시대도 아니고.
“그 형이 강조한 게 언어로 먹고 살려면 사람을 상대로 하는 업무능력이 필수라는 거야. 기업의 연륜있는 인사담당자들은 지원자 표정, 몸짓, 아우라, 말투만으로도 지원자가 사람에 대하여 얼마만큼의 대응력을 지니고 있는지 정확히 판단한대.”
“그런 업무능력이 거저 생기냐?”
“그래서 내가 고등학교 때 해외봉사 같이 다니자고 했잖아!”
“엄마가 안 보내줬잖아!”
“웃기시네. 언제는 어머니 말 잘 듣는 착한 아들이었냐?”
“나 정도면 효자야.”
“나 없다고 해외 워크캠프나 봉사활동 안 나가지 않았겠지?”
사람에 대한 대응력은 사람을 많이 상대해보면 어느 정도 좋아질 수 있다.
사람을 많이 만나다보면 성격도 조금 바뀐다.
이온이 나름 넉살이 좋은 것은 어릴 때부터 외국인을 비롯해 어른들을 많이 상대해 봤기 때문이다.
언어와 남미 문화에 서툴렀을 때 실수도 참 많이 했다.
그러면서 사람을 대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운 것이다.
“닥쳐! 재수 없는 놈아!”
“재수 안 한 놈이다. 이 자식아~”
“이걸 확! 어디서 같잖은 아재개그를!”
“싸움도 못하는 게 꼭 쫄리면 한 대 치려고 하더라. 걍 마시고 죽어.”
이온이 자신의 맥주컵을 영재의 소주잔을 부딪쳤다.
챙.
그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다.
“여보세요?”
- 나이온 배우 휴대폰이죠?
“그런데, 누구시죠?”
- 아, 나는 드라마 <비객>을 담당하고 있는 캐스팅디렉터인데.
본인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대뜸 반말이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 정승복. 혹시 액터앤스터디라고 알아?
“모릅니다.”
- 메이저 기획사인데... 거기 자회사인 유앤아이 캐스팅의 대표야.
그래서 뭐 어쩌란 건지.
자신이 캐스팅 회사 대표니까 반말을 해도 된다는 걸까.
어린 학생이나 뭣 모르는 배우지망생이라면 이런 고자세에 그러려니 했겠지만, 이온은 단역배우이기 전에 현역 스턴트맨이다.
비록 매니지먼트 업계에서 싸가지 없다고 찍혔다곤 해도, 신지균 선생님 소속사와 홍성욱 캐스팅디렉터가 설립한 기획사에서 큰 관심을 가진 신인 배우였다.
이제 막 액션캠프를 수료한 때였다면 이 같은 푸대접을 당연하게 여기고 무조건 겸손하고 저자세를 보였겠지만, 나름 연예계 경험을 해 본 입장에서 탐탁찮았다.
저절로 목소리가 까칠하게 나왔다.
“죄송하지만 지금 통화가 곤란합니다. 낮에 다시 전화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곱지 않은 말투가 들려오자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보통은 매우 들뜬 목소리로 전화 주셔서 감사하다든가 하는 반응이 나온다.
헌데 이런 시원찮은 대답이라니.
정승복 캐디는 괘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최근 방영되고 있는 <아이돌>을 본 제작진에서 리서치를 의뢰했기 때문에 평소처럼 욕부터 싸지르고 볼 수는 없었다.
정승복 캐디가 기분이 몹시 상한 태를 팍팍 내면서 말했다.
- MBS에서 내년 봄 편성이 확정된 퓨전사극 <비객>에서 캐스팅을 진행 중이야. 혹시 오디션 볼 의향 있어?
정 캐디는 <비객> 제작진에서 접촉해보라고 말했다는 것은 쏙 빼고 설명했다.
“무술연기가 필요한 배역입니까?”
- 그래.
“제가 오디션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뭘 어떻게 해. 나한테 말하면 되지.
“지금 곧바로 말씀드려야 합니까?”
- 왜 하기 싫어? <아이돌> 때문에 오디션 제의 좀 받나봐?
이죽거리는 목소리.
이온은 폭 하고 한숨이 새어나왔다.
“드라마 오디션에 대해 대략적인 사항을 알고 싶습니다.”
- 알겠어. 문자로 안내사항 남겨줄게.
“예. 감사......”
뚝.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온은 기분이 상했다.
제작진 앞에서는 간이고 쓸게고 다 빼줄 것처럼 구는 인간일 것이 뻔했다.
그런 주제에 힘없는 배우들에게 함부로 하고 갑질을 해대는 일명 양아치 캐스팅디렉터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캐스팅 제안 들어왔어?”
이온의 속도 모르고 영재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캐스팅 제안인지, 갑질인지.... 몰라.”
드륵.
스마트폰이 또 다시 진동했다.
장문의 문자가 한통 와 있었다.
정승복 캐디가 보낸 드라마 <비객> 오디션에 관한 안내사항이었다.
“영재야, 미안한데 나 전화 한 통만 하고 올 게.”
“난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해.”
이온이 스마트폰의 전화번호를 검색하며 횟집을 빠져나왔다.
- 이온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 나야 잘 지내고 있어요.
이온이 전화를 건 대상은 홍성욱 캐스팅디렉터였다.
-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 촬영 잘 하고 있어요?
“제 분량 촬영은 모두 마쳤어요.”
- 처음에 작은 배역으로 캐스팅 된 것으로 아는데... 정말 대단해요.
“감사합니다.”
- 혹시......?
자신의 회사로 들어오고 싶다는 말을 기대하는 홍성욱이었다.
“갑자기 전화 드려서 이런 거 물어봐서 죄송한데요....”
- 뭔데요?
“정승복 캐스팅디렉터란 분 혹시 아세요?”
- 유앤아이 대표 캐디 정승복씨요?
“그 캐스팅 회사가 액터앤스터디 자회사라고 하더라고요.”
- 알죠.
“다짜고짜 전화가 와서는 드라마 오디션을 보라고 하시네요.”
- 하하.
홍성욱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반발 찍찍 싸지르면서. 맞죠?
“......예.”
- 배우들 사이에서는 양아치 캐디로 통해요. 근데 워낙 잘 나가는 캐디라서 무명배우들도 어쩔 수 없는 그런 양아치 캐릭터라고 할까. 왜 더러워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그런 거 있잖아요.
이온도 어느덧 이 판에서 2년 가까이 된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인간, 여럿 봤다.
차라리 송하나 작가 같은 캐릭터는 양반이다.
비록 재수 없지만 강자나 약자나 똑같이 싸가지 없게 대하니까.
-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가 캐디한테서 직접 전화를 받는 경우는 보통 두 케이스에요.
이온이 귀를 바짝 열었다.
- 평소에 캐디가 관심을 두고 있었거나, 연출팀에서 리서치를 의뢰했거나. 아마 나배우가 <지옥의 악인들>에서도 한 씬 따먹고 곧 이어서 <아이돌>에서 조단역급 중에서 비중 있게 나와서 인물담당 조감독들이 궁금한 것이 많을 거예요. 이 바닥이 좁기도 하고 뻔한 데가 있어서.
“제가 업계에서 싸가지 없는 걸로 찍혀 있으니까, 아무래도 후자겠네요?”
- 그렇겠죠.
“처음 들어보는 캐디 성함이라 달리 물어볼 때도 없고, 면목 없지만 홍 캐디님께 전화드릴 수밖에 없었어요.”
- 면목 없기는요. 신인급들이 상대하기는 좀 버거운 스타일의 캐디이긴 해요. 그래도 조언을 하자면. 그런 사람도 경험해 보라고 하고 싶어요. 반말에 욕도 서슴없이 하는 사람인데, 계약이나 출연료 같은 문제로 장난치지는 않으니까.
“혹시 MBS의 <비객>이라고 아세요?”
- 캐스팅이 꽤 진행되었을 거예요. 제가 맡은 작품이 아니라서 나배우에게 어떤 캐릭터 오디션을 제안하는지는 모르겠네요.
“지금까지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어요. 감사합니다.”
- 알죠?
“제가 매니지먼트와 계약을 해야 한다면 홍 캐디님을 제일 먼저 고려할 겁니다.”
- 기대할게요.
홍성욱과 통화를 마친 이온이 다시 정승복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이온입니다. 오디션 보고 싶습니다.”
- 새끼가.... 어디서 건방지게 밀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