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어디서 건방지게 밀당을!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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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은 한동안 꼰대 잔소리가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짜증나지만 감수하기로 했다.
- 캐디들에게 찍힌 거, 나니까 응, 인마 오디션도 보게 해주고 하는 거지 응... 자식이 고마운 줄도 모르고 건방지게 말이야.....
이온은 한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렸다.
- 오디션 쪽 대본은 메일로 보내야 하니까 문자로 주소 보내. 일주일 후에 오디션 보니까 연습 열심히 해서 와.
“혹시 고정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죠?”
- 그건 어떻게 될지 몰라. 또, 또! 거참 건방지게...... 넌 신경 쓸 필요 없어.
정 캐디가 쌀쌀맞게 대답했다.
고정출연은 특정 장소나 상황에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단역이라도 연결 신이 생긴다.
마치 <아이돌>의 크리스티안처럼.
남들은 이런 고정출연을 바라지만 이온은 그 반대였다.
<아이돌>처럼 캐릭터도 입체적이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환영하지만, 단순히 감초역할이라면 무술팀들과 액션연기를 하는 것만 못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그 대답을 듣기 무섭게 전화가 끊어졌다.
이온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영재가 입을 열었다.
“하기로 했어?”
“그냥 오디션 보는 거야.”
“송하나의 드라마에 출연해서 여기저기서 많이 찾는 거 아니었어?”
“드라마 한 편으로 뜨는 줄 아냐?”
“단비도 허구한 날 오디션 보러 다니던데. 너도 그래야 하는 거야?”
“졸업반 될 때까지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 해.”
“고한별은 어때? 진짜 예뻐?”
“드라마에서 보던 그대로.”
“시즌2 기사 떴던데, 너도 나오는 거야?”
“몰라. 작가 마음이겠지.”
“시청률 잘 나오면 해외여행도 보내 준다며?”
"그런 말 없던데? 시청률이 잘 나 오는 건 맞는데, 무슨 <아포칼립스 조선>처럼 초대박이고 그런 건 아닌가봐.“
“오랜만에 함 뭉쳐서 연말 여행이라도 갔다 올까? 애들이랑?“
“애들 누구?”
“애들이 우리 애들밖에 더 있어?”
“아, 귀찮아.”
“야, 좀! 가자!”
“어디로?”
이온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영재가 씨익 웃었다.
불길한 미소다.
“제주도.”
“미친, 개멀잖아!”
“비행기 타고 왔다 갔다 하는데 뭐가 멀어?”
“안 돼.”
“여행경비 때문에?”
“제주도는 금방 돌아올 수 없잖아.”
“금방 왜 돌아와. 질릴 때까지 놀다 와야지.”
“액션아카데미 선배들한테 전화 오면 당장 촬영장으로 달려가야 하니까.”
“니들은 휴가도 없냐?”
“일 없을 때가 휴가지. 프리랜서가 정기적으로 쉬고 휴가 찾아 먹는 거 봤냐?”
“후우. 하여간 잘난 새끼가 뭐 빨아먹을 거 있다고 스턴트맨을 하겠다고.”
“이게 죽을라고 남의 직업을 폄하하고 있어.”
“그나저나 올해 수입은?”
“방영분이 좀 늘어서 간신히 다음 학기 등록금은 마련했다.”
이온이 자작하려던 영재의 소주병을 빼앗았다.
빈 잔을 채워주며 말을 이었다.
“다음 학기에 다시 과외를 시작해야 하나 고민이야.”
“연예인이 무슨 과외야. 너한테 배우는 학생이 공부가 되겠냐?”
“안 될 이유가 뭐가 있어?”
“이놈은 혼자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이럴 때보면 허당도 이런 허당이 없다니까. K-드라마 위력 모르냐?”
“<아이돌>은 OTT 서비스 되고 있지도 않은데, 무슨 K드라마를 들먹여...”
“아야쿠초 워크캠프 멤버들한테 너 드라마 출연한다고 하니까 아주 난리더라. 장현기랑 고한별이도 유럽 K-드라마 팬들한테 나름 인지도 장난 아니래. 거기다 송하나 작가 작품이라고 유럽 K-드라마 커뮤니티쪽에서 빨리 드라마 풀라고 난리도 아니란다.”
“오버는.......!”
“아마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인기가 있을지도 몰라.”
말도 안 되는 말이다.
한국에서도 못 떴는데 해외에서 뜬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스팀플렉스 유럽·중동·아프리카 가입자가 몇 명인 줄 아냐?“
“몇 명인데?”
“6700만 명 정도 될 걸?”
“그 사람들이 다 한국 드라마를 보진 않아.”
“전 세계 KPOP동호회원이 공식적으로 1억 명이라잖아. <아이돌>에서 한 물 간 아이돌이 특별출연하기도 하고.”
<아이돌>에 특별출연한 한국에서야 한물 간 것이지, 해외에서는 여전히 현역 KPOP 아티스트 대접 받는 이들이다.
“알겠어. 그만! 옆 테이블에서 자꾸 쳐다본다. 그만 얘기해.”
“여행은?”
이온도 훌쩍 떠나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친구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같이 안 가면 아마 한동안 툴툴거릴 것이 뻔했다.
“가자, 가자고. 가자니까?”
“시끄러. 알았으니까 그만.”
“오케이! 지금 애들한테 전화한다.”
“사무실 나가서 스케줄도 확인하고 오디션 일정도 소화하고. 날짜는 못 박지 마.”
이온이 승낙하자 영재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 모두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진 않았다.
“전화번호 딴 여배우는 없어?“
“있겠냐?”
“모솔 태세 쭈욱~ 유지하게?”
“여자나 소개시켜주고 디스를 하든 놀리던 해.”
영재가 히죽 웃었다.
이온이 정말로 여자가 아쉬워서 저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냥 버릇이다.
단 한 번도 이온이 여자를 사귀기 위해 따로 노력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매번 꽂힌 것에만 몰두할 뿐이지.
그래서 종종 생각하곤 한다.
진짜로 소개시켜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히죽.
영재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낄낄거렸다.
이온은 불안해졌다.
가끔 대책 없는 일을 벌이는 놈이 영재다.
군 전역 후에 얌전해지기는 했지만 그 본능은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2차 가자.”
“무슨 2차야? 노래방 안 가.”
“누가 노래방 가재? 누나 퇴근했을 거 아냐. 누나랑 한 잔 해야지.”
“허락은 니가 받아.”
횟집에서 저녁식사 겸 반주를 한 영재는 이온의 집으로 향했다.
퇴근한 이슬과 술판을 벌였다.
“술이 그렇게 좋냐!”
“이 풍진 세상 술 없으면 어떻게 버텨~ 그치 누나?”
“그럼 그렇고말고.”
“어휴~ 풍진 세상 같은 소리하고 계십니다요.”
결국 술판을 정리하는 것은 이온의 몫이었다.
✻ ✻ ✻
속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영재는 서울로, 이온은 파주로 향했다.
액션아카데미로 출근한 이온을 맞이한 이들은 캠프를 수료하고 마지막 관문 통과를 위해 땀을 흘리고 있는 후배 기수였다.
유명한 영화배우가 길태석 감독의 지도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액션아카데미에서 트레이닝을 받는 이들은 다양했다.
개중에는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는 아이돌도 있고 출연하면 최소한 중박 이상의 시청률은 보장된다는 톱 배우도 있다.
“형, 조현동은 임대한 감독 사무실로 안 옮겨갔네?”
이온이 한편에서 개인 운동 중인 조현동을 가리키며 형민에게 물었다.
“그대로 남아있을 건가봐.”
“진짜 얍삽하네.”
“거기로 가봐야 막내로 수발만 들 것 같으니까.”
“자리 잡히면 은근슬쩍 넘어갈 모양이지?”
“말해 뭐해. 말로만 의리 떠들지 진짜 이기적인 새끼라니깐.”
정말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조현동이다.
독립한 임대한 감독을 따라갈 것으로 예상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전형적인 기회주의자.
머리가 똑똑한 기회주의자라면 나중에 잘 나갈지도 모른다.
그럴 것 같지 않다.
“형은 요즘 어디 나가?”
“송관효 감독님이 하는 사극영화에 주로 나가고 있어.”
“액션이 많아?”
“다음 주에 떼다찌 찍을 거야. 송 감독님 찾아가서 참가하고 싶다고 말씀드려봐.”
“오케이. 고마워 형.”
형민과 대화를 마친 이온이 얼른 스케줄이 정리되어 있는 화이트보드로 달려갔다.
액션아카데미 소속 감독들이 현재 작업하고 있는 영화·드라마 및 광고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고, 각각의 촬영일정까지 적혀 있었다.
연말이 가까워오고 겨울이라서 그런지 로케이션 촬영은 많지 않았다.
그 중에 일주일짜리 용인 대장금파크 촬영 일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 촬영이 송 감독님이 하시는 건가....?’
마침 송관효 감독이 사무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감독님!”
이온이 송관효에게 달려갔다.
“얀마.”
“얀마 아니고 이온입니다.”
“누가 모르냐?”
“자꾸 그렇게 부르시면 꼰대 소리 들으신다니까요.”
“출연하던 드라마는 촬영 끝났어?”
“예!”
“다시 운동 열심히 하고 있어.”
“몹씬 찍으신다면서요?”
“되겠어?”
송관효의 말투가 어쩐지 심드렁했다.
이온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씩씩하게 대꾸했다.
“촬영하는 동안에도 하루도 안 쉬고 몸 만들었습니다!”
스턴트맨으로 촬영에 나갈 수 있으려면 무술감독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무술감독이 작품에 캐스팅하니까.
완벽하게 준비돼 있지 않으면 캐스팅될 수 없다.
그래서 체계적으로 몸을 만들고 스킬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무술감독은 이 분야 전문가다.
무술가이기도 하다.
후배가 몸 푸는 모습을 슥 훑어만 봐도 평상시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귀신 같이 알아차리는 사람이다.
“우일이한테 가봐.”
“넵!”
이온이 넙죽 인사하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곧장 박우일 선배를 찾아갔다.
“선배님! 송 감독님이 가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목검 가져 와봐.”
“몸 좀 풀고요.”
“기수생 봐주고 있을 테니까, 몸 풀고 내게 와.”
“옛!”
꼼꼼하게 몸을 푼 이온이 박우일에게 검술을 비롯해 다양한 액션연기 테스트를 받았다.
“나쁘지 않네.”
박우일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출연하는 영화나 드라마 없지?”
“다음 주에 퓨전사극 오디션 하나 볼 것 같아요.”
“또 정극연기야?”
“오디션 대본에서는 액션이 있는 것 같아요.”
“바짝 준비 해 둬.”
“퓨전사극 오디션이요?”
이온이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박우일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안 데리고 간다?”
“하하. 확실하게 준비해 놓겠습니다!”
이온은 <비객> 오디션을 보기 전까지 매일 액션아카데미로 출근해서 열심히 몸을 만들었다.
✻ ✻ ✻
송관효팀이 진행하는 사극 액션씬에 나가기 전까지 액션을 가다듬던 이온은 정작 <비객> 오디션 대본을 출력해 두기만 하고 방치해 뒀다.
오디션에 대해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A4 한 장 분량의 대본만으로 뭔가 준비할 만한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 하던 발성, 호흡, 화술, 감각의 기억, 관찰 훈련은 빼먹지 않고 할 뿐.
어쨌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온은 쪽 대본을 펼쳐들고 집중한 상태로 연습을 시작했다.
<비객> 통대본의 일부만 발췌한 쪽대본이라 전체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오디션 볼 인물의 상황 정도는 대사로 파악할 수 있었다.
등장인물은 광대패 출신일 것으로 추측했다.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라.]
이런 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광대패나 솟대쟁이패 놀이에서 땅재주를 부리는 것을 살판이라고 한다.
땅재주를 부리는 이를 살판쇠(땡재주꾼)이라고 한다.
물구나무서기 등 일종의 현대 기계체조와 비슷하거나 그보다도 강렬한 풍물반주에 맞추어 온갖 재주를 다하는 기예이며, 몸짓으로 트릭킹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액션 훈련을 하는 와중에 하루를 투자해 집중적으로 <비객> 오디션을 준비했다.
오디션 당일.
마포구에 위치한 <비객> 외주제작사에 도착한 이온이 정승복 캐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전화로만 목소리를 들었던 캐스팅 디렉터 정 캐디가 나타났다.
반말부터 뱉기에 배불뚝이 꼰대 아저씨를 예상했던 것과 완전 딴판이었다.
스타일 좋게 차려입고 단정한 헤어스타일의 멀쩡한 남자였다.
“네가 나이온이냐?”
“네.”
“음··· 알겠다.”
정승복 캐디는 눈살을 찌푸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꼬운 눈치에 이온은 순간 울컥했지만 참았다.
“올라가자.”
정승복이 앞장서서 건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