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쩌다 배우-86화 (86/127)

〈 86화 〉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지 모른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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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촬영 막바지가 되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분량이 늘어나면서 이온의 촬영 일정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다행히도 촬영 속도는 빨랐다.

한편 옥탑방 독백 장면 촬영 이후로 갑자기 연기도 늘었다.

대사나 표정 모두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본인은 느끼지 못했다.

그 변화는 씬스틸러 모임 배우 선배들과 한PD만 눈치 챘을 뿐이다.

“또요?”

이온이 질색했다.

그는 현재 청담동 헤어샵에 와 있었다.

탈색을 두 번이나 했는데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말을 직원으로부터 들었다.

“파란색이 은근히 까다로워요. 탈색 횟수나 시간이 사람마다 다 달라서....”

이온으로써는 촬영장 도착 시간도 있어서 마냥 탈색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이온 배우님처럼 머리카락이 두껍거나 멜라닌이 많은 경우에는 탈색을 많이 해줘야 해요. 아마 보라색 염색약을 살짝 섞어줄 수도 있어요.”

“고생하시는 건 아는데. 조금 서둘러주시면 고맙겠어요. 촬영장에 늦으면 안 되니까.”

“걱정 마세요. 혹시 몰라 두 시간 일찍 오시라고 한 거니까.”

“네.”

이온은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헤어샵 직원들에게 머리를 맡겼다.

탈색을 무려 4번이나 했다.

염색약은 파스텔톤 회색에 쨍한 파란색, 쨍한 보라색을 조금씩 섞어서 염색했다.

“색깔 진짜 잘 나왔죠?”

헤어디자이너가 흡족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온은 대답을 하기에 앞서 참고용으로 보여준 연예인 사진을 힐긋 쳐다봤다.

사진속의 컬러보다 좀 더 밝은 느낌이다.

“블루 컬러 어울리기 쉽지 않은데. 진짜 잘 어울리신다.”

“보통 떡진 블루라고 할까. 약간 회색기가 도는 파란색이 많이 나오는 편이에요.”

“골드도 어울릴 것 같지만, 블루로 염색하니까 진짜 십대 아이돌 같아요.”

2층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모두 몰려와 이온의 염색한 머리를 구경하고 한 마디씩 품평을 남겼다.

전문가들이 보기에 잘 나왔다고 하니 이온은 일단 안심이 됐다.

“얼마나 갈까요?”

“케바케에요. 빠르면 3~4일이면 눈에 띠게 빠진 티가 나고, 길게 간다고 해도 일주일이면 얼추 빠질 거예요.”

이온은 일주일 후에 검은색으로 다시 염색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머리색을 숨겨야 했고, 스턴트 일감을 소화하기 위해서도 원래 머리색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자, 이제 아이돌 메이크업 받으러 가시죠.”

아이돌만 따로 하는 특별한 메이크업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상파 방송3사의 때깔 즉 화면 톤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방송사별로 차별된 메이크업 톤이 존재했다.

케이블 음악방송의 화면 톤은 또 달랐다.

이온은 실제 음악방송 무대에서 촬영을 하기 때문에 그에 맞는 메이크업을 받는 것이다.

가격은 안 물어봤다.

촌스럽게 놀라는 모습을 헤어샵 직원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색이 <아이돌> 조단역 배우가 말이야.’

이온은 몰랐지만, 굳이 음악방송 톤에 맞춘 메이크업을 할 필요까진 없었다.

중요한 것은 드라마 촬영팀이 요구하는 스킨톤이지 해당 방송의 화면 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온은 <아이돌>을 촬영하면서 별의 별 경험을 다 해봤다.

세 달 넘게 간접적으로 아이돌 연습생 노릇을 해본 셈이다.

그 만큼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애썼다.

“배우는 자기가 살아온 궤적이 다 도움이 돼. 나 때는 사회운동가 배우들도 많았어. 나도 화염병 좀 던져 봤지. 그 뿐만 아니야. 예를 들어서 술 먹고 싸운 것도 배우하면서 도움 되더라. 도둑, 강도 말고는 경험 많이 해 보는 것이 나중에 다 도움이 돼. 죽은 역이야 죽어 볼 수는 없지만. 하하. 그 때 도움이 되라고 경험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때만큼 열심히 살았던 적도 없었어. 하루 한 끼 먹고 살고 그랬으니까. 자기 나름대로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하려고 했지. 어쨌든 소중한 시간들이었어. 대입시험 망치고 방황했던 것. 동네 친한 형한테 사기 당한 것. 그 모든 것들이 다 내 연기의 자양분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신지균이 해준 말이다.

뭐든 경험해서 손해 볼 것 하나 없다.

그것이 간접경험이라고 할지라도.

이온은 어색한 파란색 헤어스타일을 한 채 청담동 헤어샵을 나섰다.

전철을 타고 촬영장으로 이동할 순 없었다.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혹시라도 누군가의 스마트폰에 찍혀 SNS를 타게 된다면 큰일이다.

이온은 미리 불러 놓은 택시를 타고 청담동을 출발해 디지털미디어시티 BS E&M 센터로 향했다.

이온은 BS E&M 센터 로비에서 임시 출입증을 교부받아 2층에 위치한 멀티 스튜디오로 향했다.

멀티 스튜디오에서는 매주 목요일 오후에 방영하는 ‘뮤직카운트다운’의 이번 주 녹화가 끝난 무대세트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이돌> 제작진은 마지막 화를 위해 최고를 준비했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흠잡을 곳 없는 판을 깔아준 것이다.

남은 건 그 판에서 누구보다 격정적인 연기를 해내는 것.

화려한 무대를 제공해주었다. 그 위에서 학예회를 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안녕하세요!”

이온은 스튜디오에 도착한 후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했다.

“파란색 잘 어울린다.”

“진작 그렇게 하고 다니지.”

“진짜 아이돌 가수 같은데?”

이온의 헤어스타일을 본 스태프들이 덕담을 건넸다.

“이온은 댄서들과 안무 맞추고 있어. 현기 분량 치고 댄스 찍을 거니까.”

“옛. 피디님.”

언제나 촬영순서는 주인공부터다.

때론 주인공보다 엑스트라 위주로 찍기도 한다.

엑스트라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다.

오늘은 주인공과 엑스트라 부분을 동시에 촬영했다.

“스탠바이! 큐!”

한 PD의 사인에 방청객으로 출연하는 보조출연자들이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도 잊은 듯 박수와 함성을 보낸다.

또한 있지도 않은 스타들을 향해 풍선과 플랜 카드를 흔든다.

그런 방청객 사이에 장현기가 끼어 있다.

극 중에서 온갖 험한 경험과 더러운 꼴을 본 주인공은 자발적으로 기획사에서 나가기로 결정한다.

그 전에 자신과 함께 연습생 생활을 했던 크리스티안의 데뷔무대를 보러 온 것.

문제는 주인공이 회사와의 계약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 주인공처럼 회사와의 계약에 묶인 채 무기한 활동 보류된 경우는 생각보다 많이 있다.

회사에서 활동이 가망 없다는 판단을 내려 잠정적 해체가 됐어도 계약 기간이 남아있을 경우 멤버들은 소속사를 벗어나 새로운 활동을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도 쉽지 않다.

얼굴이 노출되는 아르바이트를 제한받을 때도 있고, 원치 않는 행사나 스케줄에 동원되는 경우도 흔한 일이다.

그렇게 장현기는 방청객 틈에 끼어서 지난 연습생 기간을 돌아보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큐!”

촬영팀은 장현기를 위주로 다양한 커트를 촬영했다.

[......!]

함께 연습하던 애들이 데뷔하는 모습을 보게 됐을 땐 말도 못하게 씁쓸할 수밖에.

내가 나갈 수도 있었던 음악방송...

내가 오르고 싶었던 무대...

내가 듣고 싶었던 객석의 환호...

모든 게 손에 닿을 듯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무대에 오른 건 그가 아니라 크리스티안이다.

“NG! 다시 한 번 갑시다!”

애초에 계획된 동선과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고, PD가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아 보였다.

그도 것이 FD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고생을 하고 있었다.

“보출분들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어쩌다 보니 바쁜 현장과는 다르게 이온만 붕 떠버렸다.

그래도 심심하지는 않았다.

무대 뒤편에서 댄서들과 최종적으로 안무를 맞추는데 여념이 없었다.

“방청객으로 출연하는 보출분들은 풍선과 치어풀만 흔드세요. 절대 소리 내시면 안 됩니다.”

“네에~”

방청객으로 출연한 보조출연자 한 명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소리 내시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대답도 하지 마세요. 아셨죠?”

“네에~”

하하하.

호호호.

웃음이 터졌다.

바짝 날이 서 있던 한PD조차 피식 웃음을 흘릴 정도로 약간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댄싱팀 나오라고 해!”

무대 뒤편에서 안무를 맞추고 있던 이온과 댄서들이 무대로 나섰다.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계속해서 카메라는 이온의 뒤통수에 위치했다.

보조출연자들을 빨리 찍고 보내야 했다.

이온과 댄서들을 화면 한 편에 걸고(O,S) 장현기나 방청석을 찍는 촬영이 한 동안 이어졌다.

이온의 연기는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이 장면에서는.

오로지 춤만 잘추면 된다.

실제 가수라면 노래할 때 연기를 해야 한다.

배우만 무대에서 연기하는 존재가 아니다.

무대에 서는 모든 이들은 연기를 한다.

심지어 유명 강연자들도 약간의 연기 스킬을 배우기도 한다.

암튼 이온과 댄서들은 2분 32초짜리 KPOP 음악에 맞춰 열심히 춤을 췄다.

설정상 메인 댄서인 이온이 크게 부각될 수 있도록 촬영했다.

‘....후우.’

<아이돌>에 출연하기 전에는 아이돌로 데뷔한 군대 후임 정섬에 대해 큰 감흥이 없었다.

이젠 데뷔한 아이돌들을 보면 그 팀이 인기가 있든 없든 너무 대견해보인다.

대중들이 모르는 화려함 뒤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은 거다.

특히 후배 정섬이 연습생 생활을 6~7년 버텼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그저 허황된 꿈만 쫓는 불나방인 줄 알았다.

아니다.

세상에 거저 얻는 것이란 없다.

‘남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지.’

배우의 삶도 다를 것이 없으니까.

연예인이라는 직업적 특성에서 오는 성공의 격차는 모 아니면 도다.

이 시장에 뛰어드는 지망생들에게는 너무 잔인할 만큼 극과 극이다.

연습생이 되기도 어렵지만 힘든 연습 시스템을 거쳤음에도 데뷔의 문턱을 넘지 못한 이들의 좌절감은 더욱 크게 남는다.

특히 데뷔 코앞에서 최종 탈락한 경우 말도 못할 상실감에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태어나 가장 열심히 해왔고, 가장 잘하는 일이 춤과 노래였던 이들이 데뷔라는 꿈을 잃어버렸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 있을까.

다른 꿈을 찾는 일 조차 절망적인 상황.

데뷔의 빛을 본 소수의 행운아들의 뒤에서 그림자가 되어버린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방황하다가 군대로 도망쳐 왔다는 정섬이 비로소 이해가 됐다.

한편으로 비보이팀에 지원해서 빽도 없이 당당히 선발된 것을 봤을 때, 굉장한 녀석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성인으로서 자립해서 먹고살 수 있는 자신만의 경쟁력을 키우는 시기인 십대에 아이돌이 되기 위해 춤, 노래에 올인한 아이들은 데뷔가 무산될 경우 허공에 붕 뜬 존재가 된다.

이건 국가대표가 되지 못했거나 재활이 어려울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한 운동선수 혹은 악기 연주자들의 사례처럼 1등이 되지 못한 수많은 예체능 학생들이 겪는 고민이기도 하다.

이온이 한국대 졸업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플랜B를 준비할 수밖에 없는 직업세계다.

누군가는 온전히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성공 근처에라도 가본다고 역설하지만.

그것은 지금과 같이 양질의 공급이 넘쳐나지 않았던, 수요와 공급의 차이가 크게 벌어지지 않았던 이온이 태어나기도 전 시대에 통했던 충고다.

“컷! 다시!”

실제 방영분에 들어갈 분량이 많아야 30초다.

그런 음악방송 무대 장면을 위해 반나절을 촬영했다.

촬영장을 전쟁터에 비유하자면, 배우라는 병사는 하나만 잘하면 되지만 연출가인 사령관은 무기, 배치 등등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

구상을 위한 큰 그림이 없으면 배우들 고생만 시킨다.

이온은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라고 들었고, 또 그런 걸 확인했다.

반만 맞는 말이었다.

연출자가 드라마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절대적이었다.

이온은 한PD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죄송해요.”

“뭐가?”

“그냥 이것저것......”

“수고 많았어.”

“저희 때문에 고생하시진 않으셨구요?”

“속 썩인 배우도 있고, 잘 따라와 준 배우도 있고... 뭐 그렇지.”

“고생하셨습니다.”

“인마. 너나 촬영 끝났지. 우린 아직 몇 주 더 촬영해야 돼.”

이온이 깜빡했다는 듯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네. 덕분에 많이 배웠어요.”

“혹시 송작가한테 뭐 들은 거 없어?”

“작가님께요?”

“시즌 2.....”

그걸 왜 자신에게 묻는 것인지.

<아이돌> 마지막 회에서 주인공은 워낙에 낙천적인 성격인 덕분인지 대형기획사에서의 데뷔를 포기한 선택에 대해서는 미련이 없다며 웃어보인다.

다른 꿈이 있어 회사를 나온 뒤 연습생 동기들이 데뷔하는 모습에 후회를 하기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뭔가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열린 결말이다.

만약 시즌 2가 제작된다면 KPOP의 또 다른 부분인 작은 기획사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아티스트들의 세계를 다루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그렇게 되면 이온이 연기했던 크리스티안이 다시 등장할 리가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렇게 예상하는 것이 타당했다.

“아마 시즌 2가 되면 현기 캐릭터가 작은 기획사로 옮겨가서 <비긴 어게인> 풍으로 풀지 않을까 싶은데..... 어쩌면 크리스티안이 안타고니스트로 변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혹시 몰라서 미리 침 발라 놓는 거야.”

어떻게 된 게 이쪽 판에서는 뭐만 하면 침을 발라놓는다고 표현한다.

더럽게.

“미리 김칫국 마시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준비는 해 둘 게요.”

“나중에 일 틀어졌다고 나 원망하지 말고.”

“원망 절대 안 해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다 송 작가 책임이야. 알지?”

하하.

이온은 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수고하십시오.”

“쫑파티 때 보자.”

이온은 오늘 촬영으로 <아이돌>에서 역할이 모두 끝났다.

이미 무술팀의 역할도 몇 주 전에 끝난 바 있다.

주연 배우보다 조연이 더 빛날 순 없다.

주연이 영화의 흐름을 이끌고 가는 역할이라면 조연은 말 그대로 이야기의 전개를 돕는 역할이니까.

영화와 드라마는 대본이라는 일종의 정해진 룰에 따라 움직인다.

현실은 좀 다르다.

정해진 대본대로만 움직인다면 삶은 무척 지루할 것이다.

한 편의 드라마에서 주연을 했다고 그 드라마 밖에서도 주연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조연을 맡았지만, 그 드라마 밖에서 주연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아이돌>에 참여한 어떤 배우는 크리스티안처럼 날아오를 수도 있다.

반대로 중간에 방출당한 캐릭터처럼 조용히 사라질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주인공처럼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버릴 수도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지 모른다.

연예계에서 자주 사용하는 속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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