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아이돌(Idol). (7)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마침내 드라마 <아이돌> 사전제작이 시작됐다.
1~2부에서 이온은 등장하지 않는다.
무술팀이 관여할 만한 액션 시퀀스도 없었다.
연출팀으로부터 받은 촬영 일정표에 따르면 이온은 10월 중순 이후 촬영에 합류하게 된다.
다행히 이온은 중간고사를 무사히 볼 수 있었다.
그런 후, <아이돌> 제작사로부터 드라마 출연 증빙 서류를 받았다.
또한 출석인정요청서를 작성해 교수들을 찾아다니며 결석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만에 하나 출석일수 미달로 낙제를 받을 수는 없었다.
“우리 학교는 재학 중인 연예인 학생을 위한 별도의 학사관리가 없네. 명문화된 규정도 없고 학칙 등에 출석에 관한 사항을 학과별로 다르게 운영할 수 있다는 위임 규정도 없다네.”
때문에 한국대는 재학생 중 연예인이 몇 명인지도 파악하지 않을 정도다.
“무조건 수업을 빠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능한 강의에 들어가겠습니다. 이번 학기 출석 조건은 충족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기말고사를 치르지 못할 수도 있어서 이렇게 교수님께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겁니다.”
“이번에 시험은 봤나?”
“예.”
“학칙이 정하는 출석일수를 채운다면야.......”
“제가 참여하는 작품의 연출을 철학과 졸업생 선배님이 하십니다. 작가도 송하나 작가라고 현재 가장 핫한 분이시구요.”
교수들에게 동문 PD나 송하나의 이름값은 중요하지 않았다.
“출석을 갈음할 정도로 충실한 과제를 제출해야 할 텐데,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할 수 있겠나?”
“주경야독 하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과제를 수행하겠습니다.”
몇 해 전, 비선실세의 자녀의 채육특기생 부정입학이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면서 주요 대학에 다니는 체육·연예 특기자의 학사관리에 대한 점검이 벌어졌었다.
당시 사건으로 인해 대학마다 체육·연예 특기자의 학사관리가 깐깐해지기 시작했다.
교수들은 제자의 연예계 활동에 대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낙제를 하게 되면 재수강을 하라는 투였다.
제적까지 각오하라고 협박조로 말하는 교수도 있었다.
이온은 과제로 출석을 대신할 수 있도록 끈질기게 교수를 쫒아 다니며 사정했다.
“언어 능력 하나만 믿고 사회로 나가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언어는 도구에 불과하고 경쟁력을 갖추려면 언어 외에도 자신만의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자네에게 자신만의 무언가가 배우란 말인가?”
“동기와 후배들이 군대를 다녀와서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을 떠나고 있습니다. 저는 해외연수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찾을 만한 활동은 많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도 저만의 무기를 찾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액션배우의 경험 역시 미래를 위해 언어능력 외 사회적 기록을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온으로서는 교수들이 제시한 2/3 이상 출석일수, 성의 있고 충실한 리포트 제출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무척 섭섭한 조치였지만, 도리가 없었다.
✻ ✻ ✻
촬영에 합류하지 않더라도 매일 연남동 댄스연습실에서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 오찬기로부터 아이돌 연습생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회사와 연습생 사이의 계약에서는 연습생이 좀 더 유리한 편이에요. 그걸 알고 악용하는 애들도 있어요.”
밀접면접부터 이어져 온 인연이라 이온과 오찬기는 무척 친해졌다.
“어떻게 악용하는데?”
“눈치 살살 보면서 이 정도면 대충 쉬엄쉬엄 다녀도 되겠는데? 하는 식이죠.”
“그걸 기획사가 그냥 놔둬?”
“계약기간에는 어쩔 수 없죠. 근데 계약 기간 끝나면 그렇게 행동한 연습생은 기획사들 사이에서 거의 제명을 각오해야 할 걸요.”
“회사끼리 그런 쪽으로 정보가 공유되나 봐?”
“그럼요. 당연하죠.”
데뷔는 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한 오찬기다.
반면에 군대 후임은 보이그룹 데뷔앨범 발표 이후 승승장구하고 있다.
잘나가는 아이돌의 생활은 그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 형, 말도 마. 죽겠어. 차라리 연습생 시절이 편했다니까.
운 좋게 아이돌 스타가 될 수 있다면야 짜릿하겠지만, 아이돌의 삶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모양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 위 3분을 위해 차량과 대기실에서 13시간 이상을 보내야하는 생활이 대부분이란다.
물론 이마저도 인기를 얻는 데 성공한 정섬 같은 아이돌 경우에나 그렇다.
데뷔를 했음에도 스케줄이 없어 내내 연습실과 숙소만 오가는 그룹이 전체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오찬기처럼 소속사에서 전략적으로 연기로 방향을 튼 경우는 운이 매우 좋은 편에 속했다.
- 한창 활동할 때 한 주의 음악방송 나가면 케이블까지 포함할 경우 비는 요일이 없어. 주요 음악방송만 하더라도 4일이 묶이거든.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부터 오후까지 수차례의 리허설을 하고 샵에 들러 의상과 헤어, 메이크업을 받아. 그렇게 하루 종일 시간을 대기실에서 버틴 끝에 3~4분간 무대에 오르는 거야. 모든 일정이 끝난 뒤에도 행사가 있거나 연습, 또 다른 촬영 일정이 있다면 숙소로 돌아가는 시간은 한없이 늦어져.
“잠은 좀 자냐?”
- 활동기간에는 자는 거 먹는 거 포기해야 돼.
“고생이 많다.”
- 우리 그룹은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선배 아이돌 멤버들보면 살인적인 스케줄도 모자라서 하루 스물 네 시간 내내 팬들의 카메라에 둘러싸여 지내는 것 같더라고. 유명해지고 팬들한테 사랑 받는 것은 좋은데 그 대가로 사생활을 완벽하게 포기해야 하는 건 좀 가혹한 것 같아.
“인기는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니까.”
- 형은 어때?
“우리도 마찬가지야. 대기 또 대기. 그러나 한 커트 찍고. 똑 대기. 뭐 그렇다.”
- 아참! 형, 혹시 오병장이 내 연락처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줘.
오병장은 공군 군악대 비보이 생활을 할 때 최악 중에서 최악의 선임이었다.
“그 인간 내 바뀐 전화번호 모를 걸?”
- 암튼, 형도 조심하고. 그 개... 자식이 대구에 댄스 학원 개업했다더라고. 유명 비보이 리액션 넷튜브 채널도 한다나 뭐라나.“
“그 인간하고 엮일 일 더 이상 없어. 너나 회사에 이야기 잘 해 놔. 괜히 그 인간 진상처럼 엉겨 붙으면 너만 피곤해진다.”
- 우와. 그 인간이 들러붙을 거 생각하면 끔찍하네.
“군대에서나 선임이지 사회 나오면 그냥 병신이야. 상대하지 않은 게 상책이다.”
- 형이 출연하는 드라마는 언제 방영해?
“겨울에.”
- Vnet 금토 드라마?
“응.”
- 활동기간하고 겹치지 않을 것 같네. 본방사수 할 수 있을 거야..
“고맙다.”
-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그래. 건강관리 잘하고. 자나 깨나 사람 조심해라.”
드라마 <아이돌>에 캐스팅된 연습생 출신이 아니더라고, 친한 동생인 정섬과 그를 통해 알게 된 걸그룹 연습생 파도, 물결, 진희를 통해 아이돌과 연습생의 실제 생활을 생생하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를 통해 자신이 연기할 배역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이고 풍부하게 캐릭터를 구축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인물담당 연재완으로부터 수정된 대본을 받았다.
새롭게 받은 대본에는 교포연습생A가 아니라 크리스티안이라는 이름이 적시되어 있었고, 회당 한 두 마디 대사도 새롭게 추가되어 있었다.
이미지단역이 아니라 조연급으로 신분이 상승했다.
“이 말은 일상생활에서 잘 안 쓰는 표현인데......?”
6부에 이온이 스페인어로 중얼거리는 대사가 새롭게 추가 되어 있었다.
번역기를 돌린 것인지 그도 아니면 스페인어 전공자가 번역을 해준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딘지 어설펐다.
완전히 틀린 표현이라고 볼 순 없지만, 실생활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아니랄까.
“이거 내 멋대로 바꿔서 대사 치면 송 작가가 난리 치겠지?”
김성식 배우 같은 경우도 토씨 하나 바꿀 수 없다며 체념하는데, 자신 같은 병아리가 함부로 대사를 수정해선 안 될 듯 싶었다.
그것은 스페인어 실력과 상관없는 부분이다.
암튼 이온은 수정된 대본을 가지고 차근차근 준비했다.
10월 말 경, 드디어 <아이돌>에서 첫 출연 날이 찾아왔다.
✻ ✻ ✻
세트장은 동시녹음을 위해서 소리가 웅웅 울리지 않게 건설된다.
또한 일종의 암막 같이 사방이 온통 검은색이다.
촬영 시 집중도를 높이고, 카메라 반사를 막는 효과가 있다.
이온은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스태프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인사했다.
“분장실로 가요.”
인물담당 연재완이 인사를 나누자마자 재촉했다.
“옷 먼저 갈아입는 게 아니고, 메이크업부터 해요?”
“의상은 나시티에 추리닝 아니었어요?”
“맞아요.”
“다른 배우들 오기 전에 미리 메이크업 해 둬요.”
분장실에는 선객이 있었다.
<아이돌>의 남자 주인공 장현기가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어딜 가도 눈에 띌 법한 훤칠한 키에 좋은 비율의 체격, 서글서글한 눈웃음이 인상적이다.
아역 배우 출신이지만, 이 외모에 소문난 노래 실력까지 갖췄으니 음악 드라마를 표방하는 <아이돌>의 안성맞춤이었다.
한때 대형 기획사에서 보이그룹 보컬 감으로 탐을 낸 적도 있었다.
본인이 가수에는 관심이 없어서 가수 데뷔는 불발 되었지만, 노래 실력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분장팀이 이온의 인사를 받았다.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분장팀 막내의 손짓에 따라 이온이 장현기의 옆자리에 앉았다.
“현기씨, 일찍 오셨네요.”
“아, 네.”
고사 뒤풀이 때 서로 인사를 나눴다.
단역배우로서가 아니라 무술팀의 일원으로 인사를 나눴기 때문에 장현기는 이온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본래 주연급 배우는 단역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는 편이다.
성격이 못 되서 그런 것이 아니다.
주연배우로서 갑질을 하는 것도 아니다.
보조출연자들이 출연진에게 함부로 말 걸지 않고 사진촬영을 부탁하지 않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그것과 유사한 일종의 에티켓 같은 거다.
감정에 몰입하고 연기 톤을 유지시켜야 하는 주연들이 단역들까지 친해져서 수다나 떨고 시시덕거릴 수는 없는 것이다.
가능하면 사전에 그런 분위기를 차단하는 것이다.
단역배우들도 잘 안다.
그들도 연기를 하는 입장이니 주연급 배우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연급들이 쌀쌀맞다고 기분 상하는 단역배우는 거의 없다.
장현기를 분장하던 팀장이 이온에게 다가와 피부 상태를 요리조리 살폈다.
“이온씨는 다크서클도 좀 넣고, 전반적으로 푸석푸석하게 갈 거야.”
“....네.”
사극촬영 때 수염은 붙여봤지만, 오늘처럼 각 잡고 메이크업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이온은 그저 자신의 얼굴을 분장팀에 맞길 뿐이다.
“그러다가 10부 넘어가면서부터, 뜨왁~ 미모가 폭발하는 거지.”
“......네.”
“걱정 마. 나만 믿어. 이온씨는 기본 바탕이 좋아서 망가뜨리기도 쉽고, 확 살리기도 쉽고, 그러니까.”
“종영할 때 사람 얼굴로 다시 돌려놔 주시겠죠.”
“호호. 그때 가면 카메라 마사지까지 받아서 아주 딴 사람이 되어 있을 걸?”
“기대하겠습니다.”
“머리 염색은 헤어팀과 완전히 이야기 끝났어?”
“10부까지 촬영 마치면 그때 가서 샵으로 한 번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샵에 가기 전에 우리한테 연락하는 거 잊지 말고. 스킨톤도 맞춰야 하니까.”
“네.”
정현기가 먼저 메이크업을 마치고 분장실을 나갔다.
이후로 조연급 배우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차분했던 분장실 분위기가 시끌벅적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메이크업을 마친 이온이 분장실을 나와 자신이 오늘 촬영할 장소인 세트 A동으로 향했다.
2층으로 이루어진 스튜디오에는 모두 다섯 개의 세트가 지어졌다.
각종 연습생 트레이닝 시설, 사장실과 오피스, 연습생 합숙소 등이다.
보컬 트레이닝 룸 세트에서 촬영준비가 한창이었다.
아마 주인공인 장현기 등장 분량을 먼저 찍게 될 것이다.
이온은 세트A 동에 나 있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건 뭐 세트장이 아니라 진짜 댄스 연습실인데?”
절로 감탄사가 터졌다.
드라마 촬영이 처음이 아님에도 실제처럼 꾸민 소품 하나하나가 마냥 신기했다.
댄스연습실 세트 반대편으로 나가자, 한쪽에 다음 화 소품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직접 뭔가를 제작하던 소품팀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온은 발길을 돌려 다시 댄스연습실 세트로 돌아왔다.
아직 조명도 없고, 카메라도 들어와 있지 않은 텅 빈 촬영 세트.
이온은 세트 중앙에 가만히 서서 최면을 걸었다.
‘이곳은 세트가 아니라 진짜 댄스연습실이다.’
어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오로지 배우만의 시간.
이온은 연재완이 찾을 때까지, 댄스연습실 세트에 우두커니 서서 촬영할 장면을 상상하고 시뮬레이션 했다.
배우가 촬영장에 도착해 자신이 촬영할 공간을 미리 둘러보는 행위.
바쁘고 분주한 촬영현장에서 쉽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배우에게는 그런 행위가 매우 의미가 있다.
처음 맞이해 낯선 공간을 자신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니까.
베테랑 배우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이온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배우로써 첫 촬영에서 그런 경험을 했다.
차후 루틴으로 자리 잡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아주 바람직한 행동이랄 수 있다.
“우리 연습생들, 댄스연습실로 모두 모여주세요!”
이온을 포함해 십여 명의 배우들이 세트 A동으로 우르르 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