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아이돌(Idol). (5)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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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드라마 <아이돌>의 대본 리딩이 있는 날이다.
그런데 이온은 대본 리딩 장소가 아니라 엉뚱한 곳에 와 있었다.
“슛 갑니다!”
“조용!”
“레디~”
현재 이온은 영화 촬영현장에 와 있었다.
최소망 감독이 참여하는 스릴러영화다.
<아이돌> 제작진은 이온을 대본 리딩에 부르지 않았다.
비중이 큰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나와 있는 대본 상에는 이온이 연기할 배역이 꽤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그런데 대사 한 마디 없다.
지문에서만 등장한다.
이름도 없다.
그냥 교포 연습생A이다.
- 교포 연습생A가 헤드폰을 낀 채 구석에 홀로 떨어져 있다.
이런 식이다.
실제 촬영에 들어가면 크리스티안이라고 불릴 예정이다.
대사가 새로 생겨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작가와 PD가 그렇다니까 이온은 그런가 보다 했다.
대본 리딩에 참여하지 못해서 섭섭하냐고.
전혀 아니다.
그 보다 더 값어치 있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흥얼흥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긴장 안 하지?”
최소망 감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힘 빼는 저 만의 루틴인데요.”
이온이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바하지 마. 까불까불 대지 말고.”
“넵!”
이온이 찌릿찌릿한 느낌을 받으며 대답했다.
온몸에 털이란 털은 다 곤두섰다.
잠시 후에 자신이 하게 될 대역 때문이다.
간단하다면 간단한 스턴트다.
물론 위험성은 결코 작지 않다.
이온이 대역으로 수행해야 할 스턴트는 교통사고 장면이다.
장신 배우 전문 대역을 수행하는 송관효 선배가 지방에서 촬영 중이고, 베테랑 스턴트맨 대부분이 촬영이 잡혀 있어서 막내급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기왕에 막내급에서 캐스팅할 것이라면, 최소망 감독 입장에서는 <아이돌>에 출연할 예정인 이온을 테스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롱 테이크로 안 가고 나눠서 찍을 거야. 동작을 크게 하지 않아도 돼.”
수십 번 들은 말이다.
최소망 감독이 자신의 스턴트에 안심이 되지 않는 것을 잘 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니 잔소리처럼 들렸다.
“스태디캠 더블 액션부터 찍을 거니까, 정 감독님하고 시뮬레이션 하고 있어.”
“넵!”
이온은 내심 들떠 있었다.
대본 리딩에서도 배울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장만 할 것 같진 않다.
대본 리딩은 배우들이 모여 처음으로 전체적으로 맞춰보는 중요한 행사다.
또 연출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전체적인 맥락에서 들을 수 있는 자리다.
상견레 성격도 있다.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를 구경할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배우가 연기하는 가장 즐거운 현장은 촬영장이다.
또한 연기가 가장 빨리 느는 곳도 현장이다.
이온으로서는 대본 리딩에 참여하는 것도 좋지만, 오늘처럼 현장에 나와서 대역을 하는 것이 더 좋았다.
“이안아~ 슛 가자!”
촬영을 앞둔 이온이 침착하게 날뛰는 마음을 다스렸다.
“준비 됐습니다!”
순경복장을 한 이온이 용의자를 쫒아서 골목길을 질주한다.
그의 등 뒤에서 스태디캠 카메라가 똑같은 속도로 달리며 뒷모습을 잡는다.
좁은 골목에서 넓은 동네 길로 막 나오는 순간.
끼익.
쿵!
달려오던 야채장사 트럭과 순경이 정통으로 부딪친다.
트럭에 치인 순경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이 짧은 커트를 모두 세 개로 나눠서 촬영했다.
스턴트더블인 이온의 얼굴이 노출되어선 안 되기 때문에 뒤에서 또 약간 비스듬히 마지막으로 부감으로 촬영했다.
편집으로 기존 배우와 섞으면 감쪽같은 사고 장면이 만들어진다.
스턴트맨과 트럭이 부딪치는 순간, 그 타이밍에 부상당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크고 작은 사고가 주로 발생하는 시점은 바닥에 쓰러질 때다.
이온은 보호대도 없이 트럭에 부딪쳐 바닥에 떨어지는 장면을 촬영했다.
진짜 아팠다.
그런데도 안 아픈 척을 해야 했다.
병원에 실려 갈 정도가 아니면 대부분의 액션배우들이 그렇게 한다.
액션배우에게 부상은 영광의 상처다.
자잘한 고통과 부상은 금방 기억에서 지워진다.
그런데 액션 배우로서 안 좋았던 기억은 다른 배우들을 다치게 할 때다.
그런 경험은 오랫동안 안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자식이 겁이 없어!”
촬영을 무사히 마치자, 최소망 감독이 타박했다.
사실 최소망 감독은 불안하지는 않았다.
이온을 믿는 것이 아니다.
야채창수 트럭을 운전했던 F1팀의 정지융 감독을 믿었다.
베테랑 중에 베테랑이면서 대한민국 최고 자동차 스턴트 전문가였으니까.
“감독님도 제가 트릭커였던 거 아시잖아요. 트릭킹은 깡입니다. 간단한 백덤블링도 겁을 집어먹으면 못하잖아요. 그런 트릭킹을 10년 넘게 해왔어요. 제가 중학교때부터 1일 1깡이 생활화됐다니까요.”
“하여간 말이나 못하면....”
“합격이죠?”
“응.”
“예스!”
이온이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최소망 감독이 액션을 담당할 <아이돌>에서 무술팀 막내로 합류할 수 있게 됐다.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무술팀으로도 참여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좋아하는 이온을 향해 최소망 감독이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애들한테 욕 많이 먹어. 너무 막 굴리는 거 아니냐고 불만이 많지. 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형들한테 들었어요.”
협박성 말에도 이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최소망 감독이 이온의 볼을 꼬집어 주욱 늘렸다.
“으이구! 어디서 막냇동생 같은 놈이 들어와서는.”
“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내 말만 잘 들으면 다치지도 않고 좋은 경험 많이 쌓을 거야. 근데 내가 솔직히 걱정도 된다. 니가 까불까불해서... 덜렁댈까봐.”
“제가 얼마나 침착한데요. 쾌활한 척 하는 건, 몸에 힘을 빼려는 저만의 루틴이에요.”
“이온아~”
최소망 감독이 다정한 어조로 이름을 불렀다.
“예. 감독님!”
“너무 튀지 마. 때론 적당히 묻어갈 줄도 알아야 돼.”
“......?”
“2년 차에 너처럼 일 많이 하는 경우 거의 없어. 막냇동생이 너무 잘나가면 장남은 뭐가 되겠냐?”
비유가 좀 이상했다.
“아무리 우리가 가족 같이 지낸다고 하더라도 진짜 가족은 아니잖아요.”
실력으로 당당하게 기회를 잡은 것뿐이다.
본인들 입으로 스턴트 업계는 적자생존이라고 하지 않았나.
실력이 없으면 도태된다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갈고 닦으라고 충고한 것이 선배들이다.
적당히 묻어가라는 충고는 모순이다.
물론 누군가를 음해하고 짓밟고 공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경쟁하진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눈치가 보여서 업계 평균적인 레벨을 유지하기 위해 묻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그 만큼 기회도 오는 법이잖아요.”
기회를 살리고 말고도 본인에게 달려 있는 것이고.
✻ ✻ ✻
드라마 <아이돌>은 당당하게 내 꿈의 출사표를 던지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외적인 스토리라인은 그렇다.
그런데 청소년들의 우상, 연예계의 반짝반짝 빛나는 별, KPOP 아이돌의 성공담에 연연하지 않는다.
꿈을 먹고 자라는 어린 아이돌 지망생들의 아름답고 가슴 훈훈한 도전기.
아니다.
드라마는 아이돌 신화나 화려한 청춘의 성공기를 부각시키지 않는다.
차라리 청춘의 실패에 대한 보고서 같다.
실패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청년들의 고뇌와 갈등을 들여다본다.
KPOP 산업과 그 곳에서 주인공인 아이돌.
송하나는 마냥 짜릿하지만은 않은 이 롤러코스터에 대한 환상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차라리 <아이돌>은 실패한 꿈과 그것과 이별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특별한 안내서 같다.
송하나 작가는 연예 기획사에서도 청춘을 걸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연습생들에 대한 책임감이 요구되지만, 스타를 꿈꾸는 지망생들도 스스로에게 냉정해져야 한다고 주문하는 것 같다.
과연 1% 이하의 가능성에 걸어도 후회하지 않을 절실한 꿈인지, 자신에게 수많은 기회비용을 투자할 만큼 빛나는 재능이 있는지 말이다.
- 꿈을 위해 매진하는 청춘들은 아름답다. 그런데 미련 없이 다른 꿈을 꾸기 위한 용기도 필요하다. 누군가는 젊은 친구들에게 새로 시작하는 법을 알려주거나 그런 이들에게 격려를 보내고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실패와 도전을 거듭하는 이 시대 청춘들의 한 단면을 <아이돌>을 통해 보여 줄 예정이다.
최근 송하나 작가가 매체 인터뷰에서 밝힌 드라마 <아이돌>의 출사표다.
낭만적이고 사랑스러운 청춘 드라마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프롤로그부터 아이돌 출신 슈퍼스타의 불행한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현재의 아이돌 트레이닝 시스템과 업계 전반의 좋은 점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입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때론 잔인할 정도로 비정하고 비즈니스 논리를 현실감 있게 묘사하기도 한다.
등장인물 각각의 욕망들이 충돌하는 냉혹한 약육강식의 세계.
Vnet 채널의 모기업 산하 음악방송이 내보내는 아이돌 서바이벌 판타지는 드라마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다소 우울하고 비관주의적인 세계관은 장르와 연출로 상업성과 흥행성을 보완하려고 한다.
드라마 속에서 선보이는 음악과 퍼포먼스는 현직 KPOP 전문 포로듀서팀과 아티스트, 크리에이터들이 협업을 한다.
최정상급 음악계 스태프들이 모인 만큼 남다른 퀄리티로 뮤직드라마로서의 매력을 보여줄 예정이다.
또한 어린 연기자들의 미숙함을 보완하기 위해 성인배역에서 쟁쟁한 배우들을 쓸어담듯 캐스팅했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연습생 생활은 정말 끔찍했어. 매일같이 울었던 기억이 가장 먼저 나. 내가 고통스러운 트레이닝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무대에 서고 싶다는 꿈 하나 때문이었어. 학교까지 휴학하고 올인 했던 그 회사에서 나는 반드시 데뷔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이온은 대본을 넘겨보며 대사를 입으로 내뱉어보았다.
자신이 맡은 배역은 대사가 없다.
따라서 다른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읽었다.
대본을 소리 내서 읽어보는 것은 대사를 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극의 흐름을 체화하기 위해서다.
암기과목처럼 대사를 외우려 해서는 안 된다.
전반적으로 흐르는 극의 분위기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음.”
이미 이온 본인이 연기할 배역에 대한 감정의 맥락과 논리를 구축해 놓았다.
병풍으로 출연할 테지만.
현장에서 연출자의 디렉션을 확인하고 플랜B 혹은 수정을 해서 연기하면 된다.
지문에 분명히 써져 있다.
모든 연습생을 압도하는 비보잉 실력이라고.
그 부분 하나만 살려낼 수 있어도 첫 배역을 소화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거다.
“짧은 지문만으로는 감정변화도 알 수 없고, 콘티를 보기 전까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알 수도 없고. 그래도 구구절절한 대사가 없어서 부담은 없네.”
연기 경험이 적은 신인으로서는 감정 골이 깊은 인물을 연기하기가 어렵다.
발성, 화술 등의 기본기를 잘 닦아놓았다고 하더라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사까지 없으면 발연기 소리 듣기 십상이다.
“침묵은 어떤 대사보다 임팩트가 있다.”
송하나가 가르쳐 준 것이다.
이온은 심리적인 배우가 아니라 신체를 활용하는 배우다.
대역이 아닌 첫 배역 연기에서 대사 없이 분위기와 태도만으로 표현하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액션배우들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니까
‘선배들이 말하는 후까시 잡는 연기도 Outside In의 일종이지.’
특급배우들에게 다이얼로그는 하나의 지표일 뿐이다.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어떤 배우는 분위기에 맞는 대사를 떠올린 후에 대본의 대사와 비교한 후 자신만의 대사로 체화시킨다.
연출자의 성향에 따라 대본을 완벽하게 구현해야 할 경우가 있고, 배우 본인의 재량에 맡겨질 때가 있다.
스타작가는 자신의 대본에서 토시 하나 바뀌는 걸 무척 싫어한다.
특히 송하나 작가가 그렇다.
이온은 3부~6부까지 4권의 대본을 받았다.
대본을 받고 가장 먼저 한 것이 자신의 분량을 확인 한 것이다.
그리고 형광펜으로 등장하는 씬은 노란색으로, 교포연습생A가 언급된 지문에는 붉은색으로 칠했다.
노란색으로 칠한 장면은 생각보다 많았다.
주로 연습실과 합숙소 장면이다.
주인공이 등장하는 복도, 화장실 등에서도 간간이 등장한다.
붉은색으로 칠해진 지문을 보면 특별히 복잡한 블로킹이 없다.
모두 4권의 대본을 확인하고 보니 캐릭터의 비중이 새삼스레 느껴진다.
얼마 전 출연했던 <지옥의 악인들>의 조폭 똘마니 역할보다는 비중이 훨씬 커졌다.
대사가 없든 있든.
이온으로서는 반갑기만 하다.
좀 더 오래 카메라 앞에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좀 더 다채로운 연기를 해볼 수 있다는 부분이 마냥 좋았다.
펄럭.
이온이 페이지를 넘기며 대본을 소리 내서 읽었다.
비록 지문에만 등장하는 배역일 뿐이지만, 촬영현장에 나가기 전에 대본을 통째로 외울 작정이다.
그래야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보면서 자신이 생각했던 캐릭터와 연기 톤 등을 비교해 볼 수 있을 테니까.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것.“
송하나 작가가 정상에 오르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이온의 생각은 달랐다.
왜 정상까지 반드시 절벽을 기어 올라가야 할까.
조금 돌아가더라도 또 천천히 가더라도.
길을 내면서 계단을 하나하나 쌓으면서 가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는 뛰어내리거나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러나 차곡차곡 계단을 놓고 올라가게 되면, 정상에서 내려오게 될 때 계단으로 안전하게 내려오면 된다.
혹시 내려오다 계단에서 구를 것만 조심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상을 향해 절벽 같은 지름길로 올라갈 생각을 한다.
그런 걸 모험이니 도전이니 포장한다.
일찍 정상에 올라가 봐야 일찍 내려올 일밖에 없다.
정상에 올라가는 길은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절벽을 기어올랐다고 해서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