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이미지단역.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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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에 위치한 Bboy X-Unit 크루의 연습실.
이온의 비보이 스승 격인 닉네임 샤인이 운영하는 곳이다.
드라마 <아이돌> 오디션은 일주일 후.
이온은 액션아카데미 퇴근 후, 이곳으로 와서 밤늦게까지 비보잉을 가다듬고 있다.
비보이는 혼자 활동하기 정말 어렵다.
일단 연습실이 있어야 하고, 정확한 피드백도 받아야 한다.
이름값이 조금이라도 있는 비보이는 모두가 연습벌레다.
기본적으로 하루 5시간 정도의 연습을 거르지 않는다.
공연이 있거나 배틀이 잡혀 시간을 낼 수 없는 경우에도 잠을 안자고 새벽에라도 한다.
오늘 헤드스핀 열 바퀴를 돌 수 있다고 해도 내일도 그 수준을 유지하리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쉬면 감을 잃는 것이 비보잉 기술이다.
오광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온이 연습실을 크게 한 바퀴 걸은 뒤 상체를 서서히 움직였다.
본격적인 파워무브로 들어가기에 앞서 스탭을 밟던 이온이 연습실 바닥으로 낮게 몸을 던졌다.
휙.
머리와 어깨로 몸을 지탱해 다리를 들어 올리더니 순식간에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았다.
이어 한 손을 짚고 뒤로 넘는 기술(레인보우)에 이어 체조기술에서 연유한 토마스를 연이어 선보였다.
빙글빙글.
윈드밀에 이어서 나인티나인으로 프리즈를 했다.
오광택은 이온의 동작 하나하나,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날카로운 눈으로 분석했다.
“읏차!”
이온이 한차례 시범을 마치고, 오광택에게 다가왔다.
“형, 어때?”
“스턴트 하면서 파워무브도 꾸준히 연습하고 있나봐?”
“빡세게는 못하고, 감을 잃지 않을 정도만 겨우겨우 하고 있어.”
“풋워크-토마-윈드-프리즈를 끌다가 쓰로잉 비슷하게 플로어를 하고 파워무브로 다시 갔다가 나인티 프리즈 또다시 파워무브에서 윈드 프리즈까지...... 오디션 용으로 짠 거야?”
“응.”
“속도는?”
“배틀도 아니고 그냥 적당히 돌려고.”
“플로어가 세련되고 나름 괜찮긴 한데, 너한테 안 맞는 거 같아.”
플로어는 동작과 동작 사이를 매끄럽게 연결시켜 주는 고리 역할을 하는 무브다.
꼭 연결고리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고, 다양한 응용기술로 흐름을 이어주거나 반전시키거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때 사용되기도 한다.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거 같지?”
“플로어 자체는 괜찮아. 근데 불편해 보여.”
“급조해서 짠 거라서 그런가?”
“잘 나가다가 플로어에서 확 죽어. 내용은 그대로 가져가면서 좀 더 쉽고 편하게 가져가는 게 어떨까?”
벌떡.
오광택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다짜고짜 이온이 짰던 비보잉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이온이 했을 때보다 훨씬 박력이 있었다.
당연한 거다.
현직 비보이이며 그걸로 밥벌이는 하는 사람이니까.
“어때?”
“형이 만든 게 훨씬 간단하면서 시원시원한 것 같아.”
“바꿔서 한 번 해 볼래?”
이온은 오광택이 바꿔 준 플로어로 몇 번 연습을 해보았다.
자신이 짠 것보다 훨씬 쉽고 몸에도 잘 붙는 느낌이다.
완전하게 숙달될 때까지 몇 번이고 연습했다.
“요새 공연은 안하지?”
“배틀에 더 집중하려고.”
“메이저팀과 합치는 건?”
“별로.”
메이저팀에 소속되면 각종 대회를 나가서 이름값을 좀 더 수월하게 받을 수가 있다.
당연히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메이저 크루들은 자체적으로 뮤지컬을 기획해서 공연계로 진출하기도 한다.
해외진출도 용이하다.
사실 공연도 좋지만 거의 대부분의 비보이들은 배틀에 더 집중하려고 한다.
배틀만이 그들이 춤을 추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안무가 제안은 없어?”
“왜 없겠냐? 5대 기획사에서 다 컨택이 왔었다.”
“거절했어?”
“응.”
“아휴~ 형, 그래서 먹고 살겠냐?”
“점점 비보이를 포함해서 스트리트 댄스 입지가 줄고 있어. K-POP 가서 돈 벌 때가 아니야.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후배들도 키워야 하고.”
K-POP의 영향으로 안무가들이 미디어에 많이 노출되고, 코레오크래퍼(안무가)씬 자체가 커지면서 댄서들 대우가 좋아졌다.
문제는 장르별 불균형이다.
K-POP은 음악에서 뿐만 아니라, 춤 영역에서도 온갖 장르를 다 빨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비보이들도 K-POP 안무가로 전직하는 추세가 가속화 되고 있는 실정이다.
“형 같은 네임드들이 안무가씬으로 많이 진출해야 하지 않나? 그래야 K-POP과 비보이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수월해지지 않을까?”
“내가 넌 줄 알아? 이 배신자야. 타 장르 한다고 엄청 욕할 걸?”
“비보이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며?”
“그래서 올림픽 메달리스트 만들어보겠다고 이러고 있잖아.”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보이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어딘가에서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500만 비보이를 육성중인 중국에서 한국의 전설들이 K-POP 아이돌 못지않은 유명세를 얻고 있는 것이나, 신예 비보이가 각종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있다거나.
일반 대중들은 잘 모른다.
안타까울 뿐이다.
배신자인 이온이 스트리트댄스 세계를 두고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었지만.
“암튼 드라마에 꼭 캐스팅 돼서 비보이의 좋은 점 팍팍 홍보 좀 해라.”
뽑혀도 단역이다.
비보이 홍보는커녕 시청자들에게 인상을 남길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안녕하세요!”
어느새 저녁반 수강생들이 하나둘 연습실을 채웠다.
수강생들은 스트레칭 하는 것도 잊은 채 처음 보는 비보이의 화려한 파워무브를 감상했다.
이온은 각종 무술과 기예 고수들로부터 1년 넘게 트레이닝을 받다보니, 비보잉과 트릭킹까지 실력이 늘었다.
춤이자, 곡예이자, 스포츠 그리고 예술이기도 한 이것들은 몸을 어떻게 쓰는가 문제일 것 같지만, 사실 그에 못지않게 상상력도 중요하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기술들도 월드클래스들은 자신만의 비기로 승화시켜 선보인다.
이온은 그 정도까지 아니다.
짝짝짝.
수강생들이 이온에게 박수를 보냈다.
화답해줄 여유가 없었다.
이온이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제부터 오광택과 수강생들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수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사무실로 들어온 이온은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몇 통과 메시지가 와 있었다.
‘홍 캐디......?’
부재중 전화 가운데 캐스팅 디렉터 홍성욱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여보세요? 홍 캐디님?”
- 아, 이온씨.
“운동 중이라 전화 온 걸 못 봤습니다.”
- 왜 말 안했어요?
“무슨......
- 송하나 작가의 <아이돌> 오디션 본다면서요?
단비가 말했을 리가 없다.
신지균과 최소망 감독 역시 동네방네 소문낼 인물이 아니다.
액션아카데미의 절친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체적인 방송계 정보망으로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 조단역 10명, 이미지단역 20명 뽑는 오디션 보는 거 맞죠?
“자세한 것은 몰라요.”
- 조감독이 연락 안 했어요?
“오디션 날짜, 장소 그리고 준비할 것만 알려주던데요?”
- 그럴 줄 알았어. 이래서 회사가 있어야 돼.
“......”
- 오디션으로 남녀 포함해서 모두 서른 명을 뽑아요.
이온은 가만히 홍성욱의 말을 듣기만 했다.
- 혹시 주인공 욕심이 있다면 기대 접는 게 좋아요. 언론에 공개하진 않았지만, 일찌감치 내정되어 있었으니까.
경험삼아 참가하는 오디션이다.
언감생심, 주인공 배역에 대해서는 기대는커녕 한 톨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 여자 캐릭터보다 남자를 더 많이 선발할 겁니다. 주로 이미지단역이 많고, 조·단역은 대여섯 명 정도 선에서 선발할 거예요.
이미지단역(모델)은 한국에만 있는 개념이다.
단역과 엑스트라 사이의 어중간한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다.
단역과 이미지단역의 차이는 대사의 유무다.
현장에서 드물게 애드리브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지옥의 악인들>에서 이온은 액션배우이기도 했지만, 이미지단역이었다.
대사가 없기 때문에 엑스트라와 동일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다.
명백히 다르다.
이미지단역들은 대사만 없을 뿐이지 주조연 캐릭터들과 같은 장면에서 연기를 한다.
주조연의 연기에 리액션(반응)하는 연기를 해야 하고, 그런 모습이 직접적으로 한 화면에 잡힌다.
때로는 이미지단역이 클로우즈업으로 잡힐 수 있다.
물론 엑스트라보다 더 많은 출연료를 받는다는 점도 차이점이다.
- 캐스팅 디렉터로서 한 마디 조언을 하자면 경험이 연기를 만들어요. 혹시 이미지단역으로 뽑힌다고 해서 실망할 것 없어요. 상대방에 반응하는 것도 연기에요. 주조연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거라서 배우로 입문할 때 많이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이온이 실망할 이유는 없다.
신지균을 쫒아 다니며 꽤 많은 연극배우들을 봤다.
그들은 연극무대에서는 연극배우다.
단편이나 독립영화에서는 주연배우를 하기도 한다.
상업영화나 TV드라마에서는 단역배우의 위치다.
어떨 때는 엑스트라와 비슷한 역할을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대사가 없다고 해서 배우가 아니냐? 네가 연기한 배역은 너의 노력의 시간이 만들어낸 거다. 그 경험들이 어느 순간에는 다 자산이 되어 돌아올 거야. 어떤 매체에서건 다시 부르고 싶은 배우가 되도록 언제나 최선을 다 하는 게 중요해.”
신지균 선생님이 이미지단역 역할만 주구장창 들어온다고 투덜대는 후배에게 한 말이었다.
일반인들은 이미지단역과 보조출연을 구별 못할 수도 있다.
액션배우도 마찬가지다.
스턴트 외에 정극연기를 소화하더라도 이미지단역의 애매함은 물론이고 조연과 단역 사이 어디쯤이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액션배우란 포지션 자체가 없다.
중요한 것은 어느 작품에 어떤 배우 포지션으로 구분되든, 배우가 아닌 것은 아니라는 거다.
- 오디션에는 어떻게 가기로 했어요? 누가 같이 가요? 혹시 단비가?
“특별히 준비해 갈 의상이나 소도구도 없고. 혼자 전철타고 갈 생각이에요.”
- 임시로 일일 로드매니저 한 명 붙여줄까요?
“괜찮습니다.”
- 아직 내 제안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액션아카데미를 그만 둘 순 없을 것 같아요.”
- 언젠가 일을 봐줄 스태프가 필요한 날이 꼭 올 거예요. 그때 함께 할 수 있길 기대할게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온은 스턴트가 주특기가 되는 액션배우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평범하게 사는 건 물 건너갔다고 볼 수 있다.
비보이와 트릭킹 외에 취미도 별로 없었다.
분명히 공부만 파진 않았을 것 같은데, 운동 없는 삶이 상상이 안 된다.
결국 연기자가 된들, 액션을 떼어낼 수 없는 그런 배우의 길일 듯 싶다.
물론 앞날은 누구도 알 수 없는 법이지만.
✻ ✻ ✻
드라마 <아이돌> 오디션 당일.
평소대로 이온은 액션아카데미에 출근해 운동을 했다.
점심시간에 맞춰 조퇴를 했다.
동료들에게는 오디션 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동기 샘물이 이온의 화려한(?) 패션을 보며 물었다.
“오늘 비보이 공연 있어?”
아닌 게 아니라, 이온은 평소 추리닝패션 대신 스트릿웨어로 갈아입었다.
비보이는 자신의 무브와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패션을 선호하는 편이다.
이온은 스냅백 모자와 나시티, 신발을 블랙으로 통일시킨 스타일에 청색 데님 팬츠로 컬러감을 더했다.
청색 바지를 통해 자칫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올 블랙 스타일을 피했다.
평소에 액세서리를 하지 않는 이온이다.
오늘은 심플한 액세서리로 패션의 맛을 더한 것이 눈에 띈다.
심플한 블랙 팔찌와 시계를 액세서리로 활용하며 컬러에서 통일감을 줬다.
토끼발 목걸이 대신 긴 골드 체인 목걸이로 비보이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살렸다.
“겸사겸사.”
“어디서 하는데? 버스킹이야?”
“아니. 그냥......”
“지방인가 보구나?”
“내일 봐.”
“공연 잘 하고. 다치지 말고.”
오디션이 열리는 장소는 상암의 드라마 프로덕션 사무실이 아닌 역삼동의 유명한 댄스연습실이었다.
역삼역 1번 출구를 빠져 나온 이온이 5분 거리에 위치한 건물에 도착했다.
현직 아이돌 및 연예인 전문 레슨을 하는 곳답게 오디션 장은 매우 시설이 쾌적해 보였다.
이미 건물 앞과 복도에는 딱 봐도 배우로 보이는 잘생긴 학생들과 개성 있는 외모를 가진 학생들이 먼저 와서 서성이고 있었다.
댄서로 보이는 이들도 상당히 많이 눈에 띄었다.
“십대 역할 아니었어?”
“꼭 고등학생이 배역을 연기할 이유는 없지.”
“배우가 많을 줄 알았는데, 댄서가 더 많이 보이는 것 같지?”
“그러게.”
“저기 저 사람, 혹시 오찬기 아냐?”
“오찬기? 원마스? 아이돌도 오디션 보러왔나 봐.”
“나 쟤 아는데. 수원에서 진짜 유명한 비걸이야.”
연기 지망생들로 보이는 이들끼리는 이미 친한 관계인 모양이다.
삼삼오오 모여 쑥덕거렸다.
그 외에 댄서들은 서로 안면이 없는지 서로 겉돌았다.
이온 역시 안면이 있는 이가 없다보니 낙동강 오리알처럼 떨어진 의자를 찾아 앉았다.
다들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오디션은 아마 치열한 싸움이 될 것이다.
여기에 모여 있는 이들은 기본 적으로 연기에 욕심을 가지고 있다.
어중간한 애들은 이 자리에 없다.
거기에 이미 아역으로 TV에 출연해본 연기자도 있고, 아이돌 출신도 있으며, 지방에서 꽤나 유명한 비보이·비걸은 물론이고, K-POP 커버댄서도 오디션 명단에 들어있었다.
“번호표 안 받으신 분 저한테 와서 받아가세요.”
의자에서 엉덩이를 뗀 이온이 인물조감독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