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머리가 복잡해?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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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서 이온에게 많은 변화들이 찾아오고 있다.
나름 업계에서 잘나가는 캐스팅 디렉터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다.
모터사이클 스턴트맨의 전설 해리 굿맨을 동경했다가 스턴트맨이 된 송관효 선배가 자신의 팀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하기도 했었다.
결정적인 것은 드라마 오디션을 보게 됐다는 거다.
그 모든 문제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한국대 복학이다.
학교생활과 스턴트맨 생활을 병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했다.
서양사학과 절대 만만한 학과 아니다.
물론 이온은 대학원 진학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따라서 졸업 가능한 학점과 성적만 유지하려고 했었다.
입대 전까지는 나름 성적도 잘 관리했다.
사실 제적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고 해도 1년 후 재입학이 가능하고, 몇 년 후에 여유가 생겼을 때 재입학을 신청한다고 하더라도 허가해 줄 가능성이 영 없는 것도 아니다.
후우.
이온의 입에서 삐죽 한숨이 새어나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걸 고민하지 않았다.
인생에 있어서 별다른 균열이 발생하지 않았었으니까.
그런데 강제로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입장을 돌아보게 되는 일이 최근에 연달아 생겨버렸다.
그 영향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스턴트에 머물지 않고 연기까지 확장한 것은 좋았다.
문제는 연기에 점점 흥미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게만 보면 고민할 거리가 전혀 아니다.
액션배우는 스턴트와 연기를 동시에 수행하는 직업이니까.
다만 그 흥미의 크기가 점점 커가고 있다는 것이 고민이다.
‘한국대냐 유학이냐 놓고 고민할 때보다 더 골치 아프네......’
액션캠프에 합격했을 때만 해도, 길어도 2년, 그 시기까지 자신의 재능과 실력검증이 안 되면 깔끔하게 손을 털고 원래 준비하던 길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남들은 좀처럼 경험해보지 못하는 스턴트맨의 생활을 해본다는 것도 큰 메리트로 다가왔었다.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때나 외국기업에 입사할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문제는 이미 수렁에 빠져버린 것 같다는 거다.
그것도 매우 깊이.
액션배우의 삶이라는 수렁에 말이다.
예정했던 2년을 채웠을 때도, 이 직업세계에서 썩 만족할 만한 장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었더라도 쉽게 못 떠날 것 같다.
미련을 갖게 될 것이 확실했다.
이온은 스턴트맨과 연기를 배우는 현재의 삶에 꽤나 만족하고 있었다.
‘형들은 지금까지 해 온 것이 아까워서라도 악착같이 버티는데 말이지.’
어찌 보면 동료 스턴트맨과 달리 배부른 고민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액션배우 아니면 안 된다는 절실함과 치열함이 있었으니까.
한국대 서양사학과.
최종목표가 교수라면 석사까지 적을 두고 박사를 외국 나가서 하면 된다.
한국의 어지간한 대학교 서양사학 교수진들 대부분이 한국대와 연관이 매우 깊다.
그 말은 서양사는 한국대가 꽉 잡고 있다는 것과 같다.
안 그런 분야에 과연 있기나 할까 싶지만.
어쨌든 석박사 과정 기간이 꽤 오래 걸리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교수되기 나쁘지 않은 학과가 한국대 서양사학과다.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만 하면, 이온은 언젠가 지방 어딘가의 대학에서 서양사를 강의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안정적인 미래.
지금의 처지에서 보면 분명 달콤한 미래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다 일뿐인가 하는 회의도 든다.
이런 저런 곳에서 영입제안이 들어온 최근에는 더더욱.
패기와 꿈을 가득 품은 젊은 자신이, 굴곡진 세상사에 굴하지 않고 현실의 높은 벽에 온몸을 부딪쳐 가면서, 때론 좌절도 하고, 오뚝이처럼 일어나 다시 도전하는 삶.
지극히 현실주의자였던 이온의 포부라곤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그렇게 침대 위에서 뒹굴며 복잡한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가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이어서 누나 이슬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누구세요?”
“언니! 우리 왔어!”
이슬이 아파트 문을 열어주자, 손님들이 호들갑을 떨며 인사를 했다.
이온이 잘 알고 있는 목소리들이었다.
‘누나, 나 잔다고 해.’
헛된 바람일 뿐이었다.
똑똑.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방 주인의 허락도 없이 곧바로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여사친 이수경이었다.
“거실로 나와.”
이온은 귀찮은 태를 팍팍 풍기며 거실로 나왔다.
이미 거실 바닥에는 온갖 음식들이 한상 거하게 차려져 있었다.
순간 누나의 생일을 잊고 있었던 것 같아 아차 싶었다.
아니었다.
누나 이슬의 생일은 겨울이고, 지금은 초여름이다.
“쉬고 있는데 갑자기 쳐들어와서 뭐 하자는 거야?”
이온이 짜증을 냈다.
심사가 복잡한데다가, 모처럼 휴일에 연락도 없이 떼로 몰려왔으니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수가 없다.
“무슨 날도 아닌데 뭘 이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왔어?”
“너 먹으라고 가져온 게 아니거든! 언니 먹으라고 가져온 거거든? 그리고 말 좀 예쁘게 하면 어디가 덧나?”
수정, 단비, 다경이 이온을 사납게 째려봤다.
“이리 와서 앉기나 해.”
누나의 말에 얌전히 자리를 잡고 앉는 이온이다.
“우리가 왜 왔게?”
단비가 각종 전통시장표 음식들의 포장을 뜯으며 물었다.
“어디 가성비 좋은 재래시장 맛집이라고 발굴했어?”
아닌 게 아니라, 떡볶이부터, 만두, 튀김, 왕족발, 순대, 즉석 핫바, 꽈배기, 각종 떡까지 정말 잔칫상 저리가 할 정도로 다양한 메뉴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냈다.
“송하나 작가 신작 오디션 본다며?”
“니들은 니들 삶에 좀 집중하면 안 되겠냐? 관심 좀 꺼.”
단비 대신 수정이 말을 받았다.
“충분히 우리 삶에 집중하고 있어. 남는 시간에 네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거지.”
“넌 이 돼지들 먹여 살리려고 직장 다녀?”
“이 돼지들이 나중에 돈 벌게 되면 그때 나 먹여 살리겠지.”
이슬과 단비야 서구적인 골격이라서 많이 먹어도 별로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헌데 수정과 다경은 전형적인 한국 여성 평균의 체구다.
도대체 저 많은 음식들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마치 먹방이라도 찍는 것처럼 진지하게 음식을 흡입하고 있는 두 친구를 내버려두고 이온이 다시 단비를 향해 물었다.
“누나한테도 아직 말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신지균 선생님한테 다음 주에 드라마 <아이돌> 오디션 볼 거라고 조언 부탁했다며?”
신지균을 소개시켜 준 것이 단비였다.
단비는 신지균의 대학로 술친구 멤버다.
“어떻게 이런 중요한 이슈를 남한테 듣게 만드냐?”
“니들은 뭐 내 혈육이냐? 남 찾게?”
“피는 안 섞였지만 자매나 마찬가지지.”
“니들은 XX, 난 XY야. 어디서 자매로 엮으려고.”
“닥쳐. 이게 요새 좀 잘나간다고 형제자매 간의 의리를 부정하려고 하네.”
“우리 온이, 언니들한테 강제로 겸손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이온이 한마디 하면 여사친 삼인방이 저마다 한마디씩 반격했다.
그때 이슬이 나섰다.
“음식 앞에 두고 입을 왜 쓸데없는 기능에 사용하고 있냐? 본래 작업에 집중 해.”
“넹~”
이슬의 말에 여사친 삼인방이 다시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신지균 선생님은 뭐라셔?”
단비가 꽈배기를 한입 베어 물며 얄밉게 말했다.
하지만 이온은 나무라지 않고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잘하라고. 연기할 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힘 빼고, 말하듯이.”
붙으라고 응원을 해주셨지만, 내심 떨어지길 바랄 지도 몰랐다.
오디션에서 수십 번 떨어져봐야, 그걸 통해 얻는 것이 분명 있다고 믿는 분이니까.
“첫술에 배부를 수 없어. 제아무리 송하나 작가님이 널 낙하산으로 꽂아주고 싶다고 해도 주인공이 소속된 회사의 캐디 파워가 쎄면 어쩔 수 없을 거야. 송하나 작가님이 점찍은 캐릭터도 분명히 캐디랑 다른 출연자 소속사에서도 다 탐을 낼 테니깐.”
“드라마에서는 작가가 짱 먹는 거 아니었어?”
바나나페이지에 다니고 있는 이수정이 물었다.
“작가 권력이 제일 센데...... 주인공이 누구냐, 그 주인공 소속사가 어디냐, 소속사에서 지분 투자를 했냐, 아시아 시장을 보고 기획한 거냐, 그 이상 글로벌 시장까지 염두에 두었느냐에 따라서 캐스팅에도 여러 알력이 존재하나봐. 사실 나도 술자리에서 선배님들 하시는 말씀 주워들은 거라서 자세한 내막은 몰라.”
“나는 중국물만 안 묻으면 다 용서할 거야. 더럽게 재미없어도.”
수정이 왕족발을 뜯으며 말했다.
그녀는 최근 2030대의 반중정서를 대변하듯,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한국의 대학에서 외국유학생을 대거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전체 외국인유학생이나 교환학생 비율 중 무려 45%를 중국인 유학생이 차지하고 있다.
수정이 재학 중일 때 많은 수업에서 중국인 유학생들과 조별과제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안 좋은 경험을 많이 했다.
수정뿐만 아니라, 2030세대가 일본보다 중국에 대해 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동북공정, 정치인의 선동, 한한령 및 치졸한 문화예술 차단정책, 인터넷 댓글부대 이간질 기타 등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미 수년 전부터 대학에서 혹은 일상생활 속에서 알게 모르게 그들 세대와 중국인들 간의 갈등 내지는 불편한 감정이 차곡차곡 쌓여온 결과였다.
어쨌든지 간에.
“다른 건 몰라도 송하나 작가님은 중뽕 무지하게 싫어할 걸?”
“그럼 다행이고.”
“아마 이번 <아이돌> 드라마에서도 중국 제품 PPL 집어넣는다고 하면 다 뒤집어엎을 거야.”
“그 정도야?”
“예전에 중국 엔터하고 판권 때문에 마찰도 있었고, 표절은 지들이 한 주제에 도리어 송작가님이 표절했다고 뒤집어씌웠었나봐.”
“그 드라마가 뭔데?”
“몰라. 기억 안 나.”
잠시 대화에서 빠져있던 이온이 단비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디션 팁이나 이것만은 꼭 알아둬야 한다, 뭐 그런 거 없어?”
“기본적인 것은 블로그나 넷튜브 같은데 많이 올라와 있으니까 찾아서 보면 되고. 선배님들이 내게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어.”
“뭔데?”
“뽕을 맞아야 된다고들 해.”
마약을 하란 말은 아닐 터.
이온의 예상대로 선배들이 단비를 어둠의 세계로 인도하진 않았다.
“제일 먼저 연기를 보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잖아. 스스로가 만족 못 한 상태에서는 남을 만족시킬 수도 없다. 뭐 그런 말을 자주 하더라고. 배우는 자기 연기가 최고라는 오만함도 가지고 있어야 해. 안 그러면 상대 배우에게 잡아 먹혀버리니깐. 너도 촬영장 많이 나가봐서 이제 좀 눈치 까지 않았어?”
“뭘?”
“이 바닥에서 휘둘리기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거.”
나르시즘과는 다른 개념인 것 같다.
“힙합의 스웩 같은 건가?”
이슬은 동생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입 밖으로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동생이 자신만큼이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걸 잘 알기에.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에 들어서는 거야?”
“<지옥의 악인들>에서 애드리브 성격이었지만, 대사도 쳐봤어.”
“성우정 선배님 나오는 영화?”
“응.”
“와! 액션아카데미 감독님들한테 이쁨 무지하게 받는 모양이구나? 2년차에 아주 그냥!”
“송관효 선배님이 다쳐서 급하게 내가 땜빵한 거야.”
“막 머리가 복잡하지?”
단비의 물음에 갑자가 거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치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었다는 듯이.
“그 말은 지금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나는!”
“미투!”
“미쓰리!”
“미포!”
“창피하게 초등학생도 안 할 드립 좀 치지 마. 나까지 수준 떨어지는 것 같잖아.”
“우리는 전반적으루 하향평준화 됐어. 이제 더 떨어질 수준 없어.”
“돼지들아. 쫌 조용히 먹어. 내 동생 진지해.”
이슬의 말에 여사친 삼인방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음식 뜯고 씹고 맛보는 소리만 들여왔다.
이슬이 동생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배우를 하면 너도 더 행복해지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럴까?”
“배우라는 직업이 뭐야? 광대잖아. 광대는 남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고. 또 위대한 광대가 되면 감동을 줄 수도 있고.”
“날 응원해주고 사랑해주는 분들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해해 주실까?”
희귀병을 앓던 이온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의 희생은 물론이고 대부와 의료진들 그리고 미국의 어린이재단과 교포 이모들이 애를 많이 썼다.
이온은 그들로부터 입은 큰 은혜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또한 자신을 응원해주고 항상 따뜻하게 지켜봐주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허투루 살 수 없다.
살아서도 안 되고.
“누나, 나는 말이야. 권용찬 감독님처럼 최고가 될 순 없어도 최고로 노력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될 자신은 있어.”
“그럼 됐지 뭐. 널 보살펴준 그 분들은 네가 뭘 해도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실 거야.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누나의 격려가 고민의 일부분을 덜어준 것 같았다.
진짜 하고 싶은 일, 평생을 바칠 일을 찾은 것 같다.
물론 백퍼센트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