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삶은 우연한 사건으로 바뀐다!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이온은 학구파가 아니다.
그렇다고 무식하게 몸으로 부딪치며 깨우치는 스타일도 아니다.
세상에는 수천 년 동안 온갖 똑똑한 사람들이 경험하고 고민했고 그 결과를 정리해 놓은 지식의 보고가 엄청나게 많다.
대표적인 것이 책이다.
이온은 몇 달 동안 닥치는 대로 영화 관련 서적을 읽었다.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베냐민의 문예 이론을 탐독했다.
소쉬르와 라캉, 프로이트를 두고 씨름했다.
광대한 미학사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앙리 조르주 클루조, 클로드 샤브롤 류의 거장들 영화에도 심취했다.
그 외에 온갖 영화를 닥치는 대로 구해서 봤다.
지식의 과포화 상태에 접어든 건 그래서였다.
'아는 게 없어서라기보다는 보는 눈이 없어서......‘
이 모두 강박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예술가로 살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족쇄를 채우고 스스로 올가미에 머리를 밀어 넣은 꼴이다.
힙합만 듣던 이온이다.
그런 주제에 클래식을 들었다.
영화 이외 분야로까지 내적 지평을 넓혀가려고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수많은 책을 읽어가면서 많은 이론과 지식을 머릿속에 저장했다.
어느 정도 알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알수록 모르겠는데 영화라는 예술이었다.
무서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이론에 갇히게 될까봐.
그걸 막아준 인물이 배우 신지균이다.
이온과 신지균은 묘한 관계다.
어딘지 무협소설 속 스승과 제자 같다 랄까.
신지균은 세심하게 연기를 지도하고 수업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저 이리저리 이온을 데리고 다니고 술자리마다 동석 시킨 것 뿐이다.
틈틈이 연기 부분에서 잘못된 버릇이 드는 걸 지적해주긴 했다.
중요한 것은 배우로써 갖추어야 할 여러 덕목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이다.
신지균을 따라서 참석했던 대학로 연극배우들의 술자리에서는 돈 주고 살 수 없는 배우들의 다양한 경험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이온은 본격적으로 연기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워낙 어릴 때부터 격렬한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위험하긴 해도 계속 운동을 할 수 있는 스턴트맨이 그저 좋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연기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
리얼한 액션 동작과 함께 제대로 된 감정 몰입을 위해서다.
이온은 무술 감독이 지시하는 대로 동작만 하는 것이 싫었다.
“배우의 감정을 이어받아서 톤을 유지시켜야 돼.”
선배들로부터 귀가 따갑게 들은 말이다.
단순히 위험한 장면을 대신 하는 스턴트가 아닌 액션으로 연기하는 배우라면 극중 인물의 캐릭터를 파악하고 상황에 맞는, 감정이 담긴 액션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배우 같은 연기력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다.
연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래서 연기를 잘한다고 평가받는 배우들의 연기를 훔치기 시작했다.
아니 흉내 내기 시작했다.
“액션!”
[내가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 처먹어! 니들은 생각하지 말라고 했잖아, 형이 시키는 것만 알아서 하라고! 니들이 생각해 버리면 한 박자 늦춰지는 거야. 한 박자 늦춰지고 일 시작하면 이미 늦은 거야. 알아? 돌대가리 새끼들아!]
촬영현장 밖에 있던 성우정과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성우정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리고 이온은 그의 연기를 보면서 느꼈다.
저건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배우란 직업이 다른 사람을 표현하는 직업이지만, 마치 성우정이란 사람은 완전히 사라지고 영화 속 박형사란 새로운 사람이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악역 전문배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도창학 배우는 성우정의 잡아먹을 듯한 기세에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영화에서 매번 보던 식상한 표정인데......’
카메라나 연출이 도창학 배우 연기의 디테일을 다 담아내지 못했던 것 같다.
촬영현장에서 지켜본 도창학은 굉장했다.
성우정이 대사를 잘근잘근 씹어서 내뱉는 것 같다면.
도창학은 낮고 음울하게 툭툭 대사를 던졌다.
[뭐요. 이걸 어쩌라구......]
촬영 직전 여러 번의 테스트부터 지긋지긋하게 봐왔던 소품 서류다.
헌데 도창학은 난생 처음 본다는 듯 능청스럽게 건성으로 서류를 들춘다.
세상에 대해 불만이 무척 많을 것 같은 얼굴의 도창학 배우다.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 난 것 같다.
무표정하게 있으면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이 그냥 재수 없어 보인다.
그런 얼굴인 주제에 낮게 목소리를 깔자 담이 약한 사람은 절로 움츠려 들 것 같다.
[거기 적힌 조직이 지금 수원에서 버티고 안 나가고 있어. 오늘 중으로 넘어가서 정리해. 우리에게 상호협조라는 것은 없어. 그냥 날려버려.]
[어디 애들인지 알아야 날리든 조지든 담그든 하지. 쓰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존댓말이 사라지고 시비조로 대꾸하는 도창학이다.
[불안해? 알아서 판단해서 호남식구들 좀 데려가든지.]
도창학이 대사를 이어가려는데.
“컷!”
감독이 촬영을 중단시키고 배우들에게 다가갔다.
“박형사가 일방적으로 찍어 누르는 게 심심한 것 같지 않으세요?”
감독이 성우정 배우에게 물었다.
“그렇다고 창학이가 대드는 것도... 뒤에 올 반전에 김을 빼는 거 아닐까?”
보통 신인급 감독과 연륜이 좀 있는 스타배우가 작업할 때, 많은 부분에서 상의를 할 수밖에 없다.
특히 현장에서 갑자기 콘티가 바뀌거나 애드리브가 만들어질 경우에는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좋다.
물론 감독이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자칫 스타배우에게 주도권을 모두 내줄 수도 있다.
“조감독!”
“예. 감독님.”
“혹시 특효나 소품팀에 맥주병 준비한 것 없냐고 물어봐.”
“슈가글라스(설탕유리병)요?”
“응.”
“확인해 보겠습니다.”
조감독 대신 연출팀 막내가 얼른 소품팀에게 달려갔다.
“똘마니 하나가 내 머리에 맥주병 깨는 거야?”
“크게 바꿀 건 아니고. 맥주병이나 소주병으로 박형사 머리 깨는 것만 하나 추가하면 어떨까 하고요.”
“쓰레기 형사가 손수건 가지고 다니는 것도 웃기잖아.”
그렇게 말한 성우정이 촬영현장을 슥 눈으로 훑었다.
그러던 중, 약간 지저분한 수건 하나를 발견했다.
“저기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창고를 떠나면 어떨까?”
“진짜로 얼굴 닦지는 마세요. 나중에 분장으로 지저분한 간지는 따로 낼 테니까.”
박형사는 지역의 소규모 조직폭력배들과 악어와 악어새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급조된 더러운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행동 하나로 인해서 주인공 박형사가 영화 엔딩까지 결코 더러운 이중생활을 멈추지 않을 것이란 암시와 함께 다음에 이어질 씬에서 동료 형사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얼굴이 깨끗하지 않은 박형사가 유독 도드라져 보이면서 좀 더 긴장감을 고조시킬 수가 있게 되었다.
“오케이.”
감독이 장보람 무술감독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술감독님 생각은 어때요?”
“합 자체가 복잡하지 않아서 금방 바꿀 수 있어요. 근데 대역이 대사 애드리브도 쳐야 합니까?”
“보자보자 하니까 보자기로 보여. 씨발! 정도? 그런 뉘앙스로 적당히 애드리브 치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장보람이 촬영장 한 편에서 대기 중인 송관효와 이온에게 다가왔다.
“합이 약간 바뀌었어. 막내는 연기 좀 해봤냐?”
벌떡.
이온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연기‘라는 말 때문이다.
송관효가 이온 대신 입을 열었다.
“형. 몰랐어요?”
“뭘?”
“이온이가 요새 신지균 선배한테 연기 배워요.”
“그랬냐?”
“액션에 감정을 담으라고 하셔서 기초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이온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대사 칠 줄 알겠네?”
할 줄 안다.
감독님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자신할 순 없지만.
“처음에 어깨를 잡는 액션은 뺄 거야. 대신 맥주병으로 우정이형 대가리 깨는 게 들어갈 거야. 애드리브로 보자보자하니까 이 개새끼가! 정도 쳐주면 돼.”
“......예.”
비록 이온이 대규모 군중씬 경험밖에 없지만, 액션연기를 할 때마다 온갖 쌍욕부터 애드리브를 마구 뱉어낸 경험이 있었다.
표일재로부터 배운 나름 현장에서의 실전연기 연습 방법이랄까.
대사를 치는 게 두렵거나 떨리지는 않았다.
이온은 멘탈이 강한 편이다.
이른 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에 더해 중학교 때 처음 비보이 크루에서 자신을 음해했던 녀석부터 가장 최근의 임대한 무술감독과 심동혁 선배까지.
스물여섯의 짧은 인생 동안 무수히 많은 이들이 이온을 시기하고 음해하고 저주했다.
‘나를 저주하는 자들이 꼭 나를 해롭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온은 그렇게 믿었다.
멘탈만 튼튼하고 흔들리지만 않으면, 못된 이들의 저주가 도리어 영양제 노릇을 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할 수 있겠지?”
“예.”
“끊어서 갈 거니까. 겁먹을 거 없어.”
이온은 대답 대신 어깨를 털고, 허리를 돌리며 몸의 긴장을 이완시켰다.
송관효가 500ml 생수병을 가져왔다.
고가의 슈가글라스 맥주병 대신 리허설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촬영팀이 다이얼로그 분량을 촬영하는 사이 이온은 새롭게 추가된 맥주병 내려치는 액션을 연습했다.
발목이 좋지 못한 상황에서도 송관효는 열심히 이온과 합을 맞춰주었다.
“맥주병 내려칠 때 손목 쓰는 거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송관효가 매우 살갑게 기초적인 것부터 고급 노하우까지 아낌없이 지도를 해줬다.
이온이 이 팀의 일원처럼 여겨졌다.
본래 액션아카데미 선배들은 막내 기수에게 정을 잘 안 준다.
위험한 직업이다.
돈벌이도 그다지 안정적이지 않다.
생활도 매우 불규칙하다.
그런 이유들로 후배가 언제 도망갈지 모른다.
때문에 정을 잘 안 준다.
심화교육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 선배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 막내 기수들이 거울 앞에서 발차기를 하고 있으면 선배들이 지나가면서 그런다.
“저기서 발차기 만 번 차고 있어.”
어떤 선배는 발차기를 보여주고 쿨하게 가버린다.
체육관 밖에서 연습을 하고 있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돌리고 감사인사도 받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선배도 있다.
정은 안 주는데 은근슬쩍 챙겨준다고 해야 할지.
일단 심화교육까지 끝이 나고 같이 촬영을 다니게 되면 그때부터 조금씩 선배들이 정을 주기 시작한다.
암튼 스턴트맨 세계는 일반 회사와 다르다.
몸을 부딪치는 곳이라서 그런지, 일단 한 팀이 되면 사람간의 끈끈함이 있다.
위험한 일이다보니 서로 챙겨주는 부분도 크고.
그게 이온은 좋았다.
“무술팀 오빠~”
160Cm도 안 되어 보이는 의상팀 막내 두 명이 이온을 찾아왔다.
그녀들은 알록달록한 꽃무늬 셔츠와 배바지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이온의 얼굴이 워낙 동안이다 보니 상투적인 정장 조폭 패션을 입힐 수가 없었다.
“이건 드래곤 패턴 셔츠인데요. 아이돌이 입었던 거예요.”
이온은 서너 벌의 조폭 패션 셔츠를 자신의 몸에 일일이 대보이며 의상팀이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의상팀은 빨갛고 노란 색이 들어간 꽃무늬를 입히려고 했다.
“단역이 이렇게 알록달록한 옷 입어서 튀어도 되나......?”
“튈 리가 없어요. 절대!”
확신의 찬 의상팀원이다.
“성우정 선배님이랑 붙는 씬이잖아요. 무술팀 오빠가 쫌 잘생긴 편이긴 해도 성우정 선배님 앞에서는 그냥 오징어예요.”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수천만 원짜리 명품 옷을 입는다 한들 색 바랜 점퍼 차림의 성우정 앞에서는 존재감마저 사라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최종적으로 알록달록한 색상의 용 무늬가 인상적인 셔츠가 낙점됐다.
지나치게 화려한 셔츠였다.
“셔츠는 이걸로 하고. 배바지는 90년대 조폭 스타일로 입으시면 될 것 같아요. 미감님이랑 실장님 두 분 다 더 화려한 거 입어도 된다고 하셨거든요.”
“예.”
“혹시 귀걸이 하세요?”
“귀 뚫은 자국만 남아 있을 걸요.”
송관효가 끼어들었다.
“귀걸이, 목걸이, 시계 다 빼. 엎어치기 당할 거라서 다칠 수가 있으니까.”
“네. 감독님~”
송관효는 이번 작품에서 장보람과 함께 공동무술감독 크레디트를 받을 예정이다.
그래서 호칭도 감독이라 불렸다.
암튼 의상팀이 이온이 입을 의상을 전달하고 떠났다.
“척추 보호대는 안 차도 되죠?”
“응.”
“깍두기 머리는요?”
“한 씬 나오고 끝이야. 촬영 전에 헤어팀한테 뭐 좀 머리에 발라달라고 해.”
전신 거울이 없어 알록달록 조폭 셔츠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주로 고등학교 교복이나 사극 복장만 입고 액션연기를 해왔던 이온으로써는 속칭 조폭패션으로 빼입고 나자 절로 캐릭터에 빙의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후우.
이온이 남몰래 심호흡을 했다.
이제 다이얼로그 두 커트만 찍고 나면 이온의 차례다.
이온은 장보람 감독이 부를 때까지 촬영장 주변을 맴돌며 액션씬 합을 시뮬레이션 했다.
수많은 명배우들이 말한다.
배우의 원동력은 두려움이라고.
바로 그 긴장감과 두려움을 즐길 줄 알아야만, 흥분과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스턴트는 반대다.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두려움이 생기면 틈이 생기고 실수가 발생한다.
무모해선 안 되지만 배짱이 두둑해야 한다.
두 분야가 완전히 다른 것 같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유념해야 할 것도 있다.
바로 자신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좋은 연기와 소위 멋진 그림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
스턴트맨들은 앞에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뒤에 있는 사람들이다.
스타가 될 수 없다.
스타를 돕는 사람들이다.
1인자나 2인자라기 보다는 3인자나 4인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안다면 이 사람들이 결코 뒤에만 머물거나 혹은 주변에만 머무는 사람들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되고, 전면에서 조명 받아도 될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