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삶은 우연한 사건으로 바뀐다!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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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평구.
남매가 오랜만에 고모를 만나기 위해 인천으로 내려왔다.
이슬이 현관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스피커를 통해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
“나야, 문 열어.”
인터폰으로 이슬의 얼굴을 알아본 사촌동생이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휴지세트를 든 이슬이 성큼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양손에 바리바리 물건을 든 이온이 뒤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어쩐 일이야? 전화도 없이.”
사촌동생 김윤기가 현관에서 남매를 맞이했다.
“이온이한테서 물건이나 받아.”
“뭐야? 뭘 이렇게 많이 사왔어?”
김윤기가 이온의 왼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받아들었다.
봉지 안에는 소형 에어프라이어부터 세제, 각종 탈취제, 한우갈비 세트 등 온갖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어? 그렇게 오라고 엄마가 노래를 부를 때 코빼기도 안 비추더니.”
“명절 때 인사드리러 왔었잖아.”
“누나가 병원 일로 바쁜 건 아는데, 자주 좀 와라.”
“그래서 이렇게 왔잖아.”
“이사 온 지가 언젠데 이제야 오냐?”
“먹고 살기 바빴다 왜!”
윤기가 남매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이슬 역시 싸우자고 덤비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살갑고 화목하게 안부 묻고 하는 것이 서로 낯간지러울 뿐.
이온이 주방 식탁에 싸들고 온 물건을 내려놓고 윤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고모랑 고모부는?”
“엄마는 미용실, 아버지는 곧 퇴근하실 시간이야.”
고모는 전에 살던 동네에서 미용실을 하고 있었고, 고모부는 이 지역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고모부는 주야간으로 교대가 반복되는 고된 일이었지만, 휴일 외에 단 하루도 일을 거른 적이 없었다.
고모는 외환위기로 가세가 급격하게 기운 이후로 겨우 미용실을 열어 삼남매를 공부시켰다.
“일찍 문 닫고 들어오시라고 해.”
이온이 비닐봉지에서 한우갈비 세트를 꺼내 윤기에게 보여줬다.
척하면 착이었다.
“오케이!”
윤기가 얼른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귀가를 종용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매에게 사망보험금이 남겨졌었다.
고모 내외는 외환위기로 생활고를 겪는 와중에도 조카들에게 남겨진 재산을 탐내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들의 자식도 건사가 힘든 상황이었기에 남매를 떠안을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도 혈혈단신의 조카들을 챙기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가진 고모내외였다.
남매는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고 고모내외를 원망하지 않았다.
사망보험금과 할머니와 함께 살던 반지하방을 탐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겼다.
이온이 한국대에 입학 했을 당시에 등록금에 보태라고 돈을 내놓았던 고모내외였다.
당연히 거절했다.
금전적인 도움 전혀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피붙이 하나 없는 남매에게 가족으로써 사이좋게 지냈으면 바람뿐이다.
드르륵.
이온의 뒷주머니에 꽂아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송관효 감독이었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할 이유가 없었다.
이온이 별 일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예, 감독님.”
다짜고짜 용건부터 묻는다.
- 이온아, 지금 어디냐?
“고모님 댁에 와 있어요.”
- 오늘 인천에 간다고 하지 않았냐?
“지금 인천 부평이에요.”
- 집안에 중요한 일 때문에 간 거야?
“고모가 이사를 하셨는데, 바빠서 못 찾아뵙다가 오늘 누나와 시간 내서 왔어요.”
- 그랬구나.
“왜 그러시는데요?”
- 내가 학익동에서 영화를 찍고 있거든.
“장보람 감독님이랑 작업하시는 <지옥의 악인들>이요?”
- 맞아. 근데 내가 발목이 좀 좋지 않아서 대역을 못하게 생겼어.
“성우정 선배님은 대역 없이도 곧잘 하시지 않던가요.”
- 원래는 우정이형하고 나하고 나눠서 액션 구다리를 찍기로 했어. 근데 내가 발목에 문제가 생겨버렸지 뭐냐.
“많이 다치셨어요?”
“일상생활에는 크게 문제될 건 없는데, 다친 부위가 부어올랐다.”
많은 스턴트맨들이 이런 식이다.
병원에서는 최소 2주간 휴식을 취하며 회복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대부분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이틀 정도 찜질하고 침 맞고는 다시 현장으로 힘차게 달려간다.
그러니 작은 부상을 끊임없이 달고 살 수밖에.
“......”
이온은 설마 자신에게 대역을 맡기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무리 급해도 이제 2년차를 막 넘긴 막내에게는 주연급 대역을 거의 맡기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 우정이형 대역은 장 감독님이 대신 하더라도 현장에서 손 발 맞춰줄 사람이 필요하거든. 지금 이 시간에 부를 사람이 없다.
“지금 바로 합류할까요?”
- 그래 줄 수 있어?
“현장이 어디인지 톡으로 남겨주세요. 택시 타고 바로 갈게요.”
- 부평에서 택시비 많이 나올 거야. 여기 현장에서 연하대역이 가까우니까 전철 타고 오면 돼.
“알겠습니다. 현장에서 뵐 게요.”
이온이 통화를 마치자 윤기가 참지 못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영화 찍으러 가야 돼?”
“갑자기 대역하기로 한 선배가 컨디션이 안 좋다나봐.”
“성우정 나오는 영화야?”
“응.”
“자식! 출세했네.”
윤기가 이온의 등을 팡팡 두드리는데 이슬의 짜증스런 말이 들려왔다.
“출세는 무슨 출세야. 남 대신 쥐어터지고 대신 다치는 일인데!”
윤기가 단박의 이슬의 말에 반박했다.
“성우정 대역은 뭐 아무나 하는 건가? 안 그러냐, 이온아?”
“난 아직 연차도 안 되고 실력이 부족해서 주인공 대역은 못해. 연습 상대 해주러 가는 거야.”
“그래도 지금까지 여기저기 많이 출연했다며?”
“형, 미안한데, 내가 지금 이야기 할 여유가 없어. 지금 바로 현장에 가봐야 해서.”
“아참 그렇지! 얼른 가 봐.”
“누나가 나 대신 고모랑 고모부한테 안부 전해줘.”
고모댁에 들어 온지 10분도 안 돼서 떠나는 이온이다.
현관으로 배웅을 마온 이슬이 걱정을 담아 말했다.
“다치지 말고. 진짜 위험한 건 선배들이 하게 냅둬. 괜히 오지랖 떨지 말고.”
“위험한 건 안 시킨다니까.”
그때 현관이 열리며 사촌누이들이 들어왔다.
“어? 언제 왔어? 아니, 어디 가?”
“일 하러.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 누나한테 들어.”
“이온이 성우정 나오는 영화 찍으러 간대.”
“진짜?”
“대~박!”
사촌 누나들의 호들갑을 뒤로 하고 이온이 재빨리 현관을 나섰다.
비록 고모 가족과 갈비를 뜯으며 오순도순 회포를 풀 순 없지만, 이온의 발걸음은 경쾌하기만 했다.
오랜 만에 나가보는 촬영현장이다.
그것도 처음으로 영화촬영장에 불러 나간다.
땜방이든 뭐든 무슨 상관.
엄청난 군중씬도 찍어보고, 카 체이싱, 일명 조폭 떼다찌(군중액션)도 촬영해 봤지만, 모두 드라마들이었다.
종합예술의 끝판왕이라는 영화다.
과연 그 현장은 어떨지 기대가 되는 이온이다.
✻ ✻ ✻
연하대 정문 바로 앞에 위치한 대형 물류창고 단지.
적색 벽돌과 흰색 콘크리트로 이뤄진 창고 10개 동이 있는 물류 단지는 내·외부와 공터에 세트를 설치할 수 있어 다양한 분야의 촬영지로 각광받는 곳이다.
교도소 외관 장면뿐만 아니라, 뮤직비디오, 예능 프로그램까지 많은 매체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 유명한 곳이다.
이온이 도착했을 땐 온갖 장비차량들과 승용차들이 넓은 공터에 가득 주차되어 있었고, 촬영스태프들이 장비차량과 촬영현장을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이봐, 학생!
이온은 물류단지 입구 경비에게 출입을 제지당했다.
“저요?”
“어디가!”
“영화 촬영팀입니다.”
“배우야?”
고모댁의 집들이 겸 인사차 내려오느라 추리닝패션이 아니라 사복을 차려입은 이온이다.
그런 이온을 경비아저씨가 배우로 오해했다.
“무술팀입니다.”
그때 무전기를 허리춤에 차고 있는 또래의 남자가 얼쩡거리고 있는 모습이 이온의 눈에 들어왔다.
“저기요!”
이온의 부름에 남자가 돌아봤다.
“혹시 <지옥의 악인들> 제작부나 연출부세요?”
무전기 남자가 이온에게 걸어왔다.
“제작부 맞습니다. 뭘 도와드릴까요?”
“장보람 감독님 무술팀 막내에요. 여기 경비아저씨가 제가 일반인인 줄 아시고 못 들어가게 하시네요.”
“그래요? 잠시만요.”
자신을 제작부라고 소개한 남자가 무전기에 대고 뭐라고 소곤거렸다.
잠시 무전이 오가고, 남자가 이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이름이 나이온 맞으세요?”
“네.”
“저기 하얀 건물 뒤로 돌아가면 빨간 벽돌 창고들이 나와요. 거기서 촬영하고 있어요. 무술팀도 그쪽에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네. 고생하세요.”
이온이 경비에게도 인사를 하고, 제작부가 알려준 곳으로 걸어갔다.
야간이지만 창고가 모여 있는 지역은 대낮처럼 환하게 밝았다.
오늘 촬영에 처음부터 합류했다면 일일이 돌아다니며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인사를 했을 터.
한창 촬영 중이라 이온은 조용히 스태프 사이로 스며들었다.
꾸벅.
이온이 장보람 무술감독에게 넙죽 고개를 숙였다.
“왔냐?”
송관효는 왼쪽 신발을 구겨 신고 있었는데, 살짝 발을 절고 있는 것을 봐서는 왼발목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병원엔 가보셨어요?”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금이 간 것도 아닌데 당장 병원에 안 가도 돼.”
센척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책임감 때문이다.
정말 큰 부상이 아니면, 대부분의 부상을 숨기고 촬영에 임한다.
자신들의 역할이 끝나면 그때 가서 티 내지 않고 병원으로 향한다.
그런 걸 당연시 한다.
이온은 스턴트맨 선배들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따질 수도 없다.
한없이 미련하고 바보 같아 보여도 저런 모습이 한국 영화·방송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의 프로정신이란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스턴트맨뿐만이 아니다.
다른 스태프나 배우들도 그렇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아내가 출산을 해도, 자녀가 병원에 입원해도 예정된 촬영을 모두 마친 후에야 움직인다.
신이 내려준 사명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한 직업일 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 분야 사람들은 삶의 일순위에 직업 활동을 놓는다.
아직 이온은 그 정도까지 미치진 않았다.
하지만 삼년차, 사년차, 오년차... 그렇게 흘러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선배들처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 우정이형하고 뭘 맞춰줘야 하는지 충분히 연습 해 둬.”
발목이 좋지 않은 송관효 대신 무술감독인 장보람이 직접 이온을 지도했다.
간단한 동작이다.
이온이 장보람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장보람이 이온의 손목을 잡아 비틀려고 시도 한다.
이온은 그보다 반박자 빠르게 장보람의 멱살을 쥐려고 다른 손을 뻗는다.
장보람은 그런 이온의 품으로 파고들며 벼락처럼 엎어치기를 한다.
별 것 아닌 합 같아 보인다.
속도와 타이밍을 잘 맞춰야 다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 촬영에서 엎어치기 당한 배우가 바닥에 떨어지느냐 혹은 책상이나 소파 같은 물건에 던져졌다가 이차로 바닥에 나뒹굴게 되느냐에 따라 속도와 타이밍 모두 새롭게 짜야할 경우도 있다.
“날 따라와.”
장보람 감독이 이온을 데리고 성우정 배우가 대기하고 있는 차량으로 향했다.
“형, 우리 무술팀 막내.”
장보람이 성우정 배우에게 이온을 소개했다.
나이를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잘생겨진다 싶을 정도로 미남의 정석을 보여주는 영화배우 성우정.
미모, 중후함, 연기, 인성까지 완벽한 그는 액션 연기까지도 출중했다.
심지어 시나리오와 연출 또 제작에도 손을 대는 등 다재다능을 과시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나이온입니다.”
“어, 그래. 반갑다.”
성우정 배우의 어투는 매우 나긋나긋했다.
이온은 그가 매우 거칠고 야성적이며 부패한 형사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헌데 말투가 친절하고 선량했다.
메소드 연기 방법론에 입각하면 있을 수 없는 모습이다.
카메라에서 떨어져 있어도 캐릭터에 어느 정도 들어가 있어야 하니까.
“니가 관효 대신 날 도와줄 거니?”
“예. 선배님!”
“그래, 잘 부탁한다.”
성우정 배우가 장보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바로 합 맞춰봐야 하는 거야?”
“형은 금방 익히니까. 이따가 야식 먹고 천천히 맞춰보는 걸로 합시다.”
“액션부터 안 찍고 드라마부터 친대?”
“어차피 내일부터 내리 액션 구다리만 찍잖아요. 오늘은 가볍게 몸만 푼다고 생각하세요.”
“대역은 여기... 이온이라고 했나?”
“예! 나이온입니다.”
“더블은 이온이가 관효 대신 하는 거야?”
“아니요. 내일 관효 발목 상태 보고, 정 뭣하면 제가 해야죠.”
“장감독은 이제 살 쪄서 내 더블하면 바래 날 텐데?”
“제가 무슨 살이 쪄요?”
“쪘어. 단독으로 무술 감독 크레디트 몇 편 받더니 살 만 한 가봐? 배에 기름기도 차고.”
성우정 배우와 장보람 감독이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았다.
벌써 여섯 작품 째 함께 작업을 하다 보니, 두 사람은 형아우로 지내는 사이다.
가끔 골프도 함께 치는 등 사석에서도 곧잘 어울린다.
장보람 같이 특정 배우의 대역을 전담하다시피 하는 액션배우들은 사석에서도 자신이 전담하는 배우와 자주 어울릴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전담 배우와 식단까지 공유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송관효가 이온과 조현동에게 벌크업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
성우정 배우처럼 키가 크고 몸매가 슬림한 배우를 전담하려면 스턴트더블 역시 항시 그에 맞는 몸을 유지해야 하는 거다.
감독 주변을 얼쩡거리던 매니저가 차량으로 돌아왔다.
“우정이형, 촬영 곧 들어갈 것 같아.”
“그럼, 밥 값 하러 가야지.”
성우정 배우가 촬영장 한편에 마련된 모니터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아직 촬영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우정은 자신을 위해 마련해 준 디렉터스 체어에 자리를 잡았다.
‘확실히 탤런트와 영화배우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어떤 탤런트는 연출부가 부르기 전까지 자신의 차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헌데 성우정 같은 배우들은 연출부가 굳이 부르지 않아도 알아서 촬영장으로 미리 와 있거나, 톱스타가 하지 않고 절대 시키지도 않는 스탠드 인까지 자청하기도 하고, 아예 촬영장을 벗어나지 않고 모니터스테이션에 머물며 대본을 보거나 감독과 대화를 나눈다.
함께 일하고 싶은 배우.
막내 스태프까지 자신의 든든한 동반자라고 믿으며 존중하는 배우.
이온은 운이 좋았다.
첫 영화 촬영현장에서 인성으로나 사생활로나 후배 영화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배우의 액션을 서포트 할 수 있게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