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연예인병 걸렸다 싶으면 안 본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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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추리닝 패션’은 백수 패션의 상징이었다.
낡고 후줄근한 이미지가 떠올랐던 과거와 달리 언젠가부터 애슬레저 붐을 타고 위상이 달라졌다.
참고로 애슬레저는 운동과 여가를 뜻하는 '애슬레틱'과 '레저'의 합성어다.
스타일을 더하며 화련한 변신에 성공한 트레이닝복 시장에 명품 브랜드도 가세했다.
명품 브랜드들의 트레이닝 팬츠가 100만 원을 호가하는 고가임에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온이 파란색 삼선 트레이닝복을 입고 동부이촌동에 나타났다.
명품 아니다.
중저가 국산 브랜드의 트레이닝복이다.
청색 ‘추리닝‘은 연예인도 소화하기 쉽지 않다.
키, 체형 등에 따라서 자칫 촌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헌데 이온은 무리 없이 소화했다.
밤밤 바라라밤밤.
스마트폰에서 <강철슈트 토니>의 메인 테마곡 벨소리가 흘러나왔다.
- 필승! 어디 쯤 오고 계시지 말입니다.
“제대한 지가 언젠데 군바리 흉내는...... 이촌역에서 내려서 걸어가고 있어.”
- 동생 몇 명 같이 왔는데, 괜찮지 형?
“같은 팀 멤버야?”
- 아니. 연습생 동생들.
“상관없어. 근데 괜찮냐?”
- 뭐가?
“데뷔했다며?”
- 근데?
“시국이 시국이잖아.”
- 아~ 불매운동 하는 거?
“그래. 연예인이 일본인마을에서 얼쩡거리다가 걸리면 욕먹는 거 아니냐?”
- 리틀도쿄도 다 옛날 말이야. 미군기지 이전하고 일본사람들이 상암이나 마포로 많이 이사 가서 실제 일본사람도 얼마 안살아.
“그러냐?”
- 저녁은 한식 먹을 건데 뭐.
“그럴 거면 용산이나 이태원에서 볼 걸.”
- 암튼,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
이촌역에서 내려 거리를 걷다보면 자주 일본어를 들을 수 있었다.
다 옛날 말이다.
일식 상권이 형성돼 있는 동부이촌동 먹자골목에서도 일본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서울일본인학교 주변으로 이사를 떠난 사람이 많아진데다, 한일관계 악화로 가족을 동반한 주재원이 줄어든 탓이다.
전반적으로 동네 활력이 떨어져서인지 먹자골목에서 내국인 손님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이온이 먹자골목 안쪽에 위치한 한 카페로 들어갔다.
꼴에 연예인이 됐다고 모자에 안경을 쓰고 있는 군악대 후임이 손을 흔들며 맞이했다.
동생들과 함께 나왔다고 하더니 세 명과 함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벌떡.
군악대 후임의 연습생 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제는 동생들이 모두 고등학생 정도 나이대의 여자애들이라는 것.
“형, 왔어?”
“응.”
이온이 테이블에서 잠시 머뭇거리자, 일행 중 가장 앳된 얼굴의 소녀가 자신의 자리를 이온에게 양보했다.
“다들 서 있지 말고 앉아요.”
“네~”
아이돌 연습생은 원래 이렇게 교육을 받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가 예의가 바른 것인지 모르겠지만, 평범한 십대 소녀들 같지 않은 태도와 몸가짐이었다.
살짝 부담스러웠다.
“내숭떨지 마, 이것들아~”
군대 후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녀들이 일제히 눈으로 레이저를 쐈다.
“섬아, 일 년 만이지?”
이온과 정섬이 악수를 나눴다.
공군 군악대 비보이팀 후임 정섬.
감히 눈도 못 마주치던 새까만 후임이었다.
“형?”
“왜?”
“연예인이야? 민간인 되더니 얼굴이 확 폈다?”
“미친 놈. 데뷔는 네가 했지 내가 했냐?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동생들 인사나 시켜줘.”
“애들아, 인사해. 내가 Naz(힙합 MC) 다음으로 존경하는 형님이야.”
세 명의 연습생 소녀들이 배꼽인사를 했다.
“반가워요. 이온이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물결이에요.”
이온에게 자리를 양보했던 베이비 페이스의 소녀가 첫 번째로 인사했다.
얼굴은 어려 보이지만, 볼륨 넘치는 반전 몸매의 소유자다.
“안녕하세요. 파도에요.”
숏커트 헤어스타일에 보이시한 패션, 액세서리 등이 딱 봐도 래퍼 지망생이다.
“안녕하세요. 진희에요. 제가 여기서 제일 어려요.”
마지막으로 자신을 소개한 친구의 목소리가 좋다.
보컬인 모양이다.
딕션이 또렷하다.
듣는 사람 귀에 꽂히는 중독성 있는 목소리.
타고난 것인지 훈련의 결과인지 알 순 없지만, 가수에겐 축복이다.
친구인 단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엄청나게 질투했을 그런 재능이다.
“참고로 파도 언니하고 저하고 다 본명이에요. 예명 아니에요.”
“나도 이온이 이름이고 성이 나에요. 이씨 아닙니다. 이온음료할 때 그 이온이에요.”
까르르르.
소녀들이 웃었다.
진짜 웃겨서 웃는 걸일까.
이온 좋으라고 가식적으로 웃어주는 것은 아닐까.
알 수 없다.
“근데요. 아일랜드 오빠랑 친구 사이가 아니라 형이에요?”
“공군 복무할 때 형아우 먹었어요.”
“우와. 아일랜드 오빠도 겁나 동안인데, 이 아저씨는 더하네. 그치 진희야?”
막내 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물여섯이 아저씨는 아니지 않을까요?”
개그를 친 것도, 웃을 타이밍도 전혀 아니다.
까르르.
소녀들이 또 다시 웃었다.
“형, 모솔이라며?”
“누가 그래?”
“정득 병장님이.”
“서정득?”
“응.”
이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정득 역시 이온의 군악대 비보이팀 후임이다.
현재는 한국의 3대 비보이 크루에 소속되어 있다.
올림픽 팀배틀 멤버로 나갈 가능성이 높은 비보이기도 하다.
“혹시 말이야. 남자 좋아해?”
“내가 모솔인 것은 찐한 연애를 하지 않았을 뿐. 연애방식이나 성향하고는 아무 관련 없어 인마.”
대학입시에 집중하느라 여자 친구 한 번 안 사귀어본 사람이 이온만 있을까마는 대체로 이온이 지금까지 연애를 해보지 않았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형, 애들 예쁘지?”
“그러네.”
“반응이 시원찮다?”
“애기들이잖아.”
이온이 그렇게 대답하자 정섬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내뱉었다.
“물결이는 열아홉이야. 생일 지나면 성인이 된다구.”
“아, 그래?”
“형, 외모는 애송이 같이 여전한데, 급 늙은 것 같다. 스턴트맨으로 갈아타더니 도대체 사회에서 무슨 물이 든 거야?”
“원래대로 민간인이 된 거지 무슨 물이 들어.”
정섬이 연습생 삼인방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형 비밀 하나 알려줄까?”
“뭔데요?”
“이 형이 딱 보면 여자 여러 명 사귀었을 것 같지? 아직 한 번도 여자를 사귀어본 적 없다.”
“네에?”
삼인방이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이온을 빤히 쳐다봤다.
이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뭐 먹을래?”
소녀들이 외쳤다.
“족발이요!”
연습생 삼인방의 맏언니격인 물결이 동부이촌동 맛집에 대해 다각도로 검토와 숙고 끝에 결정한 음식점으로 향했다.
“마늘과 보쌈 중자 하나, 웰빙 보쌈 중자 하나, 냉채 족발 대자 하나, 돌솥비빔밥 세 개, 파전, 그리고 콜라, 사이다 주세요.”
주문을 마친 진희가 메뉴판을 덮었다.
“저기...... 너희들 혹시 먹방 찍을 거야?”
“아니요.”
“지금 시킨 거 다 먹을 수 있어?”
“다 먹고 메밀 막국수도 먹을 건데요? 안 되나요?”
진희가 크고 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안 될 건 없는데......”
“걱정 마세요. 국물도 안 남기고 다 먹을 자신 있어요.”
“섬이는 맥주 한 잔 하든가.”
“아냐. 형이 술 안 마시는데 혼자 무슨 재미로.”
“근데 연습생 때 별명이 아일랜드였냐?”
“활동명이야.”
“졸라 구리다?”
“데뷔가 갑작스럽게 진행되면서 어쩌다보니 그렇게 정해졌어.”
“회사는 어디야? 유명한 회사야?”
“형도 내가 아이돌 서바이벌 출신인 건 알지?”
“알지.”
“최종 바로 직전에 미끄러졌었는데, 최종에 올라간 애 중에서 중국에서 온 애가 갑자기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서 데뷔 팀에서 결원이 생겼었나봐. 마침 그때 내가 전역을 한 상태였고, 서바이벌 오디션 마지막 탈락자이기도 해서. 여차저차 합류하게 됐지.”
“STAR-G야?”
보이그룹이든 걸그룹이든 중국인 멤버를 유독 선호하는 회사가 STAR-G였다.
“아니. 빌리브미라고.”
“큰 회사야?”
“BPS 선배님들이 소속되어 있는 회사 알아?”
“메가뮤직인가 하는데?”
“거기랑 BS E&M랑 합작한 회사야. 대기업이야.”
“잘 됐네.”
“아차! 잠깐만......!”
정섬이 가방을 뒤져 CD앨범을 꺼냈다.
“이거 초회 한정판이야. 형 주려고 특별히 챙겨 놨어.”
이온이 CD와 DVD가 포함된 정섬의 데뷔 앨범을 건네받았다.
디지털 싱글 정도 냈을 줄 알았는데, 정식 앨범을 낸 모양이다.
“자식, 출세했네.”
“나중에 내가 잘 나가면 우리팀 뮤직비디오에 형이 출연해주면 좋은데. 정득이형이랑 같이.”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삼인방이 동시에 정섬을 쳐다봤다.
설명을 바란다는 듯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내가 알기로 이 형이 우리나라에서 파워무브 세 손가락에 들어.”
또래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한국의 현역 비보이 전체로 따지면 스무 명 안에 들까말까 하는 정도.
그 숫자에 포함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다.
“어제 아일랜드 오빠가 보여줘서 이온 오빠 트릭킹 하는 것도 넷튜브에서 봤어요. 배틀 붙은 상대가 엄청 유명한 사람이었다면서요? 조회수도 많고 댓글도 3천 개 넘게 달렸더라고요.”
진희가 아는 척을 했다.
“뮤비든 공연이든 불러만 줘. 파워무브 트릭킹 스턴트 다 해줄게. 너희가 걸그룹으로 데뷔해도 마찬가지야.”
“나중에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비록 음식값이 만만치 않을 것 같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여기면 된다.
이온이 동생들 밥 사주면서 치사하게 밥값 따질 성격도 아니지만.
“하이픈(hypen)? 문장부호 그 하이픈?”
“응.”
“무슨 아이돌 그룹 이름을 이런 걸로 지었냐? 활동명도 아일랜드더니.”
“하이픈이 기존 단어를 연결해서 새로운 의미의 단어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우리도 기존 음악들을 연결해 우리 만에 개성 넘치는 음악을 만든다는 의미야.”
말도 잘 갖다 붙인다.
이런 걸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던가.
“노래도 해?”
“메인 댄스와 서브 랩.”
“랩도 할 줄 알아?”
“형이 내가 랩하는 걸 못 들어봐서 그래.”
정섬이 자신의 랩 실력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하나씩 테이블로 서빙되기 시작했다.
며칠 굶기라도 한 것 같다.
연습생 삼인방이 전투적으로 족발에 달려들었다.
“언니 그만 좀 떽떽거려 쫌. 제발~ 플리즈.”
“언니한테 떽떽? 와, 이게 지금 음식 앞에서 위아래도 없이. 언니가 오냐오냐 해주니까 오마니로 보여? 이눔에 기집애야, W&Y 같았으면 어린 게 버릇없다고 매일 욕먹고 어디 숨어서 질질 짜다가 못 버티고 그만뒀을걸. 이 바닥에 성격 나쁜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겉으로는 호호 웃으면서 뒤로 호박씨 까고. 은따 시키는 애들이 널렸어 이것아. 넌 이 언니들 만나서 진짜 연습생 생활 날로 먹는 줄 알아~”
“우와! 파도 언닌 족발 먹으면서도 랩을 해.”
“근데 플로우, 라임 다 개허접이란 게 함정.”
“내 말이!”
입은 하나인데 수다와 식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 같다.
족발 접시가 빠르게 비워졌다.
‘걸신이라도 들렸나......?’
비쩍 마른 소녀 셋의 식욕 전투력이 상당했다.
아직까지는 연습생 신분이어서 그런지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나, 보쌈을 입안 가득히 우겨넣는 모습이나 털털하기 그지없다.
한마디로 게걸스럽다.
그런데 워낙 비주얼들이 뛰어나다보니 흉하지 않다.
물결은 이제 고2다.
남미 혈통이라도 섞인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완벽한 콜라병 몸매일 수가 없다.
막내인 진희는 전형적인 걸그룹 연습생답게 과하게 말랐다.
사람 같지 않을 정도로 가냘프다.
래퍼 지망생이라고 소개한 파도 역시 말라도 너무 말랐다.
다만 파도는 분위기가 진짜 깡패다.
사이다를 마실 뿐인데, 걸크러쉬가 느껴진다.
목소리에도 리듬감이 있다.
원래 그런 것인지 생활 속에서도 훈련을 하는 것인지 알 순 없었다.
“이온님. 아니 오빠야!”
“응?”
“생굴 하나 시켜도 되요.”
“시켜.”
“누룽지도요!”
“물어보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서 먹어.”
이온이 보기에 연습생 삼인방은 걸그룹을 해선 안 된다.
당장 먹방계로 나가도 잘 될 것 같다.
갈비집이나 일식 먹으러 갔으면 낭패를 볼 뻔했다.
지금까지 먹은 족발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스러웠지만. 어쨌든.
막내 진희가 장이 묻은 젓가락을 쪽 빨아먹고는 이온을 쳐다봤다.
“저기요. 이온 오빠~”
“응? 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게 아니구요. 진짜 4개국어 할 줄 알아요?”
“외국 나가서 일상생활에 불편함 느끼지 못 할 정도. 그 정도 실력은 되는 것 같아.”
삼인방이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이온을 쳐다봤다.
이온은 대수롭지 않게 족발을 집어먹을 뿐.
“나중에 걸그룹 데뷔하면 이온 오빠가 통역해주면 좋겠다.”
“이 바보야. 저 오빠, 한국대 다닌다고 하잖아. 한국 최고 대학 나와서 겨우 걸그룹 쫒아 다니면서 통역이나 하고 앉아있겠냐?”
“핑크 언니들처럼 월드스타가 되면 이온 오빠가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아까 분명히 스턴트맨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몰라.”
“뭔지 몰라도 엄청 잘난 오빠인 것 같아.”
이온의 군대 후임인 정섬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불편함 없이 자랐다.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 아이돌 연습생으로 기획사에 픽업되었다.
중소기획사 에이스로서 케이블 음악방송이 진행한 서바이벌 오디션에도 나갔다.
그리고 최종 바로 직전에 탈락하는 아픔을 맛보았다.
최종 명단에 들지 못하자, 도망치듯 입대했다.
뛰어난 비보이 실력과 아이돌 연습생 경력으로 인해 공군 군악대 비보이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말년 병장 나이온을 만났다.
춤이든 랩이든 다 놓아버리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매사에 자꾸만 뒤로 물러서게 되고 점점 소극적으로 변해가려고 할 때.
“축제를 앞둔 농부가 일을 열심히 할까 아니면 적당히 대충대충 할까?”
“......?”
“정말 미친 듯이 몇 배로 열심히 일 할 걸. 왜? 축제라는 약속된 휴식이 있으니까.”
“......!”
“우리에겐 죽음이라는 약속된 휴식이 있어. 농부가 축제를 앞두고 몇 배로 더 열심히 하는 것처럼 우리도 미친 듯이 한 번 살아봐야지. 안 그러냐?”
당시 병장이던 이온이 회식자리에서 이등병이던 정섬에게 해준 말이다.
여러 가지 바리에이션이 있다.
가령 우리에겐 휴가라는 약속된 휴식이 있다 그러니 가서 뭣 빠지게 헤드스핀 돌고 와라 하는 식으로.
어쨌든 뻔한 말이다.
하지만 그 뻔한 말을 군대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하필이면 방황하고 있을 때, 엄청 공부도 잘하고 파워무브도 잘 추고 4개 국어까지 하는 미친 능력자 고참이 해줬다.
정섬은 머리에 번개가 내려치는 것 같은 큰 감명을 받았었다.
“미친 듯이 한 번 살아봐야지 않겠냐?”
당시를 회상하던 정섬이 중얼거렸다.
“뭐라고?”
“언젠가 은퇴라는 약속된 휴식이 있을 거 아냐.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걸 한 번 신나게 해봐야지 않겠어?”
“뭐래 자식이......”
“오늘 같은 날 술 한 해야 죽여주는 건데.”
“나중에 음방 1위 찍으면 거하게 한 턱 쏴. 그때는 정득이도 불러.”
계산대에서 족발집 사장님이 먹방 찍는 넷튜브들이냐 물었다.
족발만 20만 원 가까이 나왔으니 그렇게 물어볼 만도 했다.
“잘 먹었습니다!”
“혹시 나중에 보더라도 연예인병 걸렸다 싶으면 안 본다.”
이온은 SNS를 하지 않기 때문에 걸그룹 연습생 삼인방에게 연락처를 알려주고 헤어졌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
많은 이들이 데뷔조차 못하고 연예계에서 퇴장한다.
아니면 인고의 시간을 버티고 이겨낸 끝에 짧은 행복을 맛볼 수도 있다.
지금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즐길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 힘든 시간을 사랑하는 방법이라도 깨우치기를.
그래서 연예계를 떠나서도 자신의 인생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이온은 토끼발 목걸이에 손바닥을 대고 후배 정섬은 물론이고 연습생 삼인방 모두의 앞날에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했다.
열 번, 백 번 힘들더라도 한 번의 행복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 아닐까.
힘든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인생이 된다.
그 힘든 시간까지 사랑하지 않으면, 버틸 재간이 없다.
힘든 시간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지 않은 것과 같다.
아픈 시간도, 방황한 시간도, 고난의 시간도, 즐거운 시간도.
그 모두가 우리네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