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뭐야 이 웅장한 스케일은!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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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은 표일재와 함께 매일 두 시간씩 합을 맞췄다.
도검을 다루는 방법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창술도 배웠다.
<태왕 광개토> 촬영 시에 쓸 수도 있기에 당장에 활용할 수 있는 기본 찌르기만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승마도 연습해 두어야 할까요?”
“당장은 할 필요 없어. 3년차까지는 안 시키니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할 수 있었다.
“나중에 고정 수입이 생기면 궁술도 배워두면 좋아. 양궁 말고 국궁으로.”
“어디 가면 배울 수 있어요?”
“일산 산다고 했지?”
“예.”
“가까운 곳에 덕양정하고 비호정이라고 있어. 문의해 봐.”
표일재의 외모만 놓고 보면, 현직 조폭이거나 강력계 형사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락부락한 외모와 달리 성격이 좋았다.
같이 일하기에 나쁠 것 같지 않다.
더 겪어봐야 알겠지만, 며칠 간 경험한 느낌은 그렇다.
임대한이나 심동혁으로 인해 성격 나쁜 선배들이 많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지금까지 경험한 선배들을 봤을 때 안심이 된다.
“형, 혹시 미리 대본 볼 수 없어요?”
“무슨 대본?”
“저희가 촬영하게 되는 드라마 대본이요.”
“현장 가면 브리핑 해 줄 텐데?”
“그래도 대본을 봐 두어야......”
“별 내용 없을 걸?”
“......?”
“차라리 콘티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되면 됐지. 대본 봐서는 별 도움 안 될 걸? 드라마나 영화나 대본에는 별 묘사가 없어. 몇 줄 안 되는 지문을 가지고 무술감독이 연출을 하는 거야.”
지난 드라마 촬영을 경험하며 알고 있던 바다.
그럼에도 이온은 스토리를 알고 작업에 접근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믿었다.
“알았어. 있어 봐.”
즐겁다.
단순히 몸을 쓰고, 위험한 도전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것이.
액션연기를 통해 스토리를 구현한다는 것이.
비보잉이나 트릭킹도 공연 안무를 구성할 때 스토리를 고민하기도 한다.
그 외에 프리스타일이나 배틀은 실력을 뽐낼 뿐이다.
비록 수습기간인 관계로 운신의 폭이 좁아 답답한 일이 많지만.
충분히 재미다.
재미난 인생을 산다는 것.
꼭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적성에 맞는 직업에서 맞이하는 소소한 즐거움들.
‘하루하루 실력이 느는 재미가 쏠쏠해.’
거대한 성취나 행복을 추구하다가 현실에 치여 허우적거리고 싶진 않다.
궁극적으로 남들이 하지 않는 도전과 모험을 하겠지만, 그때까지는 안전제일.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대부 역시 단 몇 초의 공중점프에 도전하기 위해 몇 년을 준비하지 않았던가.
“영상콘티는 나중에 다 같이 모여서 보는 걸로 하고, 일단 이 거.”
사무실에 다녀온 표일재가 대본을 내밀었다.
이온이 받아 표지부터 확인했다.
창사특집 판타지역사드라마 <태왕 광개토> 제 1화라고 적혀 있었다.
오랜만에 스케일이 상당히 큰 사극이 제작되는 것 같다.
조선이 아닌 시대를 다룬다는 것은 방송사와 제작진 모두에게 큰 부담이다.
게다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를 다루는 것이니 최소한 과거에 제작되었던 공영방송 정통사극보다 만듦새나 스토리가 한층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 읽으면 19기 석현이형한테 반납해. 그 형이 퍼스트니까.”
“고마워요 형.”
“고맙긴. 너도 몇 달 있으면 수습 딱지 뗄 텐데.”
“열심히 하겠습니다.”
“살살 해 인마.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했는데, 살과 뼈를 다 갈아 넣을 작정이냐?”
매일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이온에게 걱정이 담긴 말을 남긴 표일재가 자기 할 일을 찾아 멀어졌다.
무술팀은 기본적으로 감독, 퍼스트(무술지도), 세컨드(보조 및 대역) 세 명으로 구성된다.
퍼스트가 무술감독을 대신해 실무를 총괄한다고 보면 된다.
대작인 경우에는 공동무술감독과 세컨드 어시스턴트가 보강되어 팀을 꾸린다.
액션아카데미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어떤 작품이든 자체적으로 소화가 가능하다.
암튼 이온은 빠르게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액션이 들어가 있을 법한 장면마다 빼곡하게 메모가 되어 있었다.
제 1화는 태자로 책봉되기 전까지 어린 담덕의 모험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약관도 되지 않은 담덕이 요동성을 함락시키려던 후연의 태자 모용보와 대결을 펼치는 것으로부터 드라마가 시작된다.
담덕의 기개와 지략으로 모용보는 꼼짝하지 못하고 퇴각한다.
제 2화는 태자 책봉을 앞두고 왕궁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모험을 겪게 되고, 충직한 수하까지 얻게 된다는 스토리가 전개된다.
요동성 전투 시퀀스에 X 표시가 되어 있었다.
촬영을 마친 표시가 아닐까 추측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번에 참여할 전투씬은 대규모 공성전은 일단 아니라는 것.
서른 명이 동원되는 액션 장면이 작은 규모는 아니지만, 사극에서는 스케일이 큰 액션 시퀀스도 아니었다.
쥐뿔도 모르는 이온의 기준에서 그렇다.
서른 명의 액션배우와 주연 배우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스펙터클한 전투씬도 연출할 수가 있다.
이온에게는 아직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암튼 담덕은 왕궁까지 수행하기로 하던 이들까지 따돌리고 홀로 길을 나선다.
마치 유랑자처럼 고구려 땅 곳곳을 지나친다.
그 과정에서 부패한 성주와 그의 동생이 파락호들과 함께 성 밖의 마을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팔아먹는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일부러 그들에게 붙잡힌 담덕은 약간의 행운, 뛰어난 무력, 기지까지 발휘해서 노예로 팔려갈 백성을 구원하고 부패한 성주와 일당들을 벌한다.
‘딱 판타지네.’
이온은 역사학도다.
다만 전공이 서양사학이다보니, 한국사까지 꿰뚫고 있진 않다.
다만 역사를 다룬 창작물에서 픽션과 팩션 혹은 퓨전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문외한은 아니다.
일단 이온이 알고 있기로 담덕,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광개토대왕은 만 12세 즈음에 태자에 책봉되고 만 17세에 즉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담덕이 어린 나이에 후계자가 된 것으로 볼 때 후계구도와 관련해 큰 장애물이 없었다고 볼 수 있고, 왕위를 놓고 경쟁할 만한 라이벌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드라마처럼 요동성 전투 이후로 유랑객 행세를 하며 노예 신분이 되었다가 풀려난다거나 말갈의 공격으로부터 고구려의 성을 구한다든가 태자 책봉을 막으려는 고구려 내부 세력의 음모에 고난을 겪고, 심지어 후연과 백제까지도 담덕을 노리는 등의 스토리는 명백히 작가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난과 시련은 영웅 이야기에 빠질 수 없다.
약방의 감초다.
문제는 이런 설정과 스토리는 항상 개연성 시빗거리가 된다.
자칫 역사왜곡으로 공격당할 수도 있다.
역사적 허구물인 드라마는 의미가 있는 과거 사실을 선택해 작가의 상상력과 문체로 형상화한다.
맞는 말이다.
다만 사료가 명백하고 학계에서 통설로 인정되고 있는 역사의 기본 줄기는 지키는 가운데 작가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의 사실만을 다루게 되면 교과서적이고 지루하기 때문이고, 반대로 작가의 상상력으로만 역사를 다루게 되면 비록 재미와 흥미를 줄 순 있어도 역사를 왜곡했을 때 시청자나 관객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영화와 TV드라마가 K-Drama란 장르로 해외에서까지 넓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고증과 역사적 사실을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현재 한국의 정통 사극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드라마 제작비는 어마어마하게 증가했지만, 간접광고(PPL) 등이 어렵고, 시청률 확보가 어려워 제작비 조달 및 회수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퓨전 사극을 통해 중장년층과 젊은 층을 동시에 공략하다가 최근에 와서는 판타지에 무게를 싣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스턴트맨 입장에서 대하사극은 꽤나 안정적인 직장이다.
공영방송에서 정통사극이 부활한다면 수많은 중견연기자와 단역, 액션배우들을 먹여 살릴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럴 낌새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암튼 이온은 대본을 읽은 후에 19기 선배를 찾아가 반납했다.
“원래 대본은 같이 일하는 드라마팀 아닌 사람들하고 돌려보는 거 아냐.”
“죄송합니다. 스토리가 너무 궁금해서......”
“나중에 일 할 때 대본 간수 잘 해. 괜히 유출되면 X된다.”
“예.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끼리야 식구이기도 하고 같이 액션도 짜니까 서로 돌려볼 수 있는 거야. 같은 팀 아니면 시나리오 보여주지 마.”
“예. 선배님.”
지난 번 <도련님을 부탁해>의 분장팀이 대본을 보여준 것은 같이 일하는 스태프로 알고 있어서였던 모양이다.
또 하나 알게 됐다.
액션아카데미 소속 스턴트맨끼리는 외부에 유출하지 않는다는 믿음 하에서 대본이나 시나리오를 돌려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암튼 자식이 유별나다니까.”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다.”
사무실을 빠져나오는데 박충원 선배와 마주쳤다.
안색이 썩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방 촬영은 잘 마치셨습니까?”
“말도 마라. 더럽게 빡시다. 내가 이래서 드라마는 안 하려고 했는데. 사수가 웬수다 웬수야. 하지 말로 그렇게 말렸는데 기어코 일을 잡아서는.”
“감독님은 같이 안 오셨습니까?”
“나보다 더 바뻐. 그건 그렇고 계좌번호 좀 알려주고 가라.”
“......?”
“저번에 대역 출연한 거 있잖아. 내 통장으로 입금됐어.”
이온이 박충원에게 계좌번호를 불렀다.
그러자 곧장 모바일 계좌로 돈이 들어왔다.
원천징수를 제외하고 받은 금액이 36만원이 조금 못된다.
이온으로서는 많은 것인지 적은 것인지 가늠이 잘되지 않았다.
“너는 초짜라 이번에 6등급 받은 거야. 방송등급은 아냐? 알려주기도 귀찮아. 검색해 봐. 스턴트맨은 보통 10등급을 받아. 다음부터 대역이나 액션연기를 하게 되면 너도 10등급을 받을 수 있는데, 보통은 일반 연기자 기준으로 돈을 받을 거다. 경력이 좀 쌓여야 대역이나 조금 어려운 액션연기를 할 테니까.”
참고로 박충원은 지난 <도련님을 부탁해> 이진훈 대역 하루 촬영에 70만 원을 받았다.
지상파 출연료 등급 상 10등급 미니시리즈 기준에 해당한다.
탤런트 즉 드라마에 출연하는 연기자들 출연료는 크게 두 가시 방식으로 정해진다.
주연과 조연급 배우 중에서 초특급은 회당 얼마라는 정해진 출연 계약을 맺는다.
극소수의 슈퍼스타들은 회당 1억 이상도 보장 받는다.
반면에 일부 조연급 배우와 단역배우는 편성시간(방영시간+광고시간)을 기준으로 출연료를 받는다.
즉 일일, 주말, 단막극, 미니시리즈, 특집극 등으로 지급기준이 나눠져 있고, 사진이나 음성 출연료 또한 별도로 금액이 정해져 있다.
장면 재사용, 재송신, 해외수출 등도 또 나눠진다.
케이블 채널 또는 종합편성채널의 출연료 정산은 또 다르다.
케이블과 종편의 경우 지상파 방송사의 기준표보다 10~40%까지 출연료가 적다.
이렇듯 노동시간이 아닌 편성시간 기준으로 출연료를 정산 받는다는 점이 일반인에게 낯설지만 방송업계의 오랜 관행이다.
“잘 쓰겠습니다.”
이온이 고마움을 표했다.
마치 공돈이 생긴 것 같았다.
“내가 주는 거냐? 제작사가 주는 거지. 수습기간이기도 하고 갑자기 데리고 나간 거라서 내 통장으로 입금된 거고. 이번에 종편 촬영 나가면 네 계좌로 바로 쏴줄 거야. 아, 방송 쪽은 세달 있다가 입금 되는 건 알고 있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돈 왜 안 주냐고 물어보지도 않은 거구나?”
“실습이라 돈 안 받고 하는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이놈이 의외의 구석에서 허당이었네?”
“......!”
하도 수습 딱지 뗄 때까지는 돈 벌 생각하지 말라고 강조하기에 그런 줄 알고 있던 이온이다.
어쨌거나 이제라도 알았으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액션아카데미를 포함해 스턴트 업종의 시스템은 일종의 인력사무소 같다.
평소에 액션아카데미로 출근해서 운동하다가 작품 의뢰가 무술감독 개인 혹은 사무실 차원으로 들어오게 되면 무술감독을 통해 소속 스턴트맨이 캐스팅돼서 촬영 현장에서 일을 한다.
소속 스턴트맨들은 액션아카데미로부터 월급을 받는 시스템이 아니다.
모두 프리랜서 개념으로 일한다.
따라서 영화, 드라마, 광고, 기타 작업마다 그에 따른 출연료가 천차만별이다.
참고로 박충원 정도 연차가 드라마에서 70만원, 영화에서 80~100만원, 광고 및 뮤직비디오에서 200~300만 원 정도에 출연료를 받고 있다.
무술감독급이 대역을 하게 된다면 120만 원 정도를 받아간다.
대략 5년 차 된 액션배우가 부상 없이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면 연봉 5000까지 충분히 벌수가 있다.
물론 부상도 없어야 하고, 캐스팅도 꾸준히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22기랑 합 맞추고 있냐?”
“예.”
“너는 누구랑 맞춰?”
“표일재 선배님이 봐주고 계십니다.”
“일재형? 그 형 잘하지. 네가 사극 액션이 약한데 잘 됐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 잘 배우고. 합천에 다치지 말고 잘 다녀와라.”
“수고하십시오.”
이온이 박충원에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스턴트맨으로 처음으로 번 돈 36만 원.
새삼스럽게 누나 속옷 사다주는 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
이미 과외 첫 월급으로 고가의 화장품을 선물했으니까.
“형민이형, 나 좀 도와줘.”
“뭔데?”
“드라마 첫 출연료가 들어와서 우리 25기 동기하고 교육팀 선배님들께 커피 한 잔씩 돌리려고.”
“출연료 얼마나 된다고 커피를 돌려.”
“괜찮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커피전문점으로 향하는 동안 형민은 출연료 액수에 대해 물었다.
이온은 박충원에게 들은 내용을 그대로 들려줬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방 커피전문점에 도착했다.
커피 종류 말고도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빵이나 쿠키, 샌드위치 같은 것들도 있어서 종류별로 주문했다.
커피와 간식거리를 한보따리 싸들고 액션아카데미로 돌아와 이온은 교육팀 선배들에게 형민은 동기들에게 커피와 간식을 전해줬다.
“이거, 이온이가 쏘는 거야. 현동씨는 이거 좋아한다고 했지? 카라멜 마기아또.”
이온은 조현동만 특별하게 제일 비싼 커피를 사줬다.
그가 예뻐서도 화해의 신호도 아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했다.
그 속담을 실천 한 것 뿐.
작전상 후퇴라고 할 수 있다.
파국을 막기 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