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뭐야 이 웅장한 스케일은!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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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다.
여전히 무술감독들은 막내 기수를 캐스팅해주지 않았다.
이온 역시 <도련님을 부탁해> 이후로 어떤 현장에도 나가보지 못했다.
그저 매일 파주로 출근해 열심히 고급 기술을 배우고 훈련만 반복할 뿐이다.
‘대단한 사람들이야.’
이온은 선배 스턴트맨들을 보며 존경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다.
다들 스턴트에 미쳐 있는 것 같다.
그들에게 반깁스할 정도의 부상은 부상도 아닌 듯 싶다.
손이나 발목에 반깁스를 한 선배들도 병원 지료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 어김없이 출근한다.
“집에 있어봐야 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술을 마실 수도 없고. 놀아도 사무실에서 노는 게 마음 편해.”
말은 그렇게 해도 사무실에서 놀지도 않는다.
가벼운 근력운동을 하거나 최소한 스트레칭이라도 한다.
스턴트의 기본은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다.
쉴 때도 운동을 하거나 스트레칭을 하면서 끊임없이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스턴트맨들은 아침마다 일정이 없어도 함께 스트레칭을 하고, 가벼운 액션동작으로 몸에 열을 낸 후 점진적으로 복잡한 액션연기를 연습한다.
부상과 실수를 줄이기 위해 ‘컨디셔닝’을 하는 것이다.
그런 후에 넷튜브의 액션모음집 등을 시청하며 동료들과 토론을 한다.
틈틈이 막내 기수에게 자신의 노하우나 기술을 전수해주기도 한다.
10년 이상 된 베테랑이라고 해서 놀지 않는다.
1분짜리 액션 장면을 위해 최소 6시간을 집중해서 연습한다.
영화나 드라마, CF, 뮤직비디오까지 다양한 매체에서 요구되는 터프하고 화려한 액션을 무리 없이 표현하려면 연습 외에는 별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저기 말이야.”
조현동이 동기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모았다.
물을 마시거나 수건으로 땀을 훔치던 동기들이 조현동을 쳐다봤다.
심화교육을 두 달 앞두고 25기는 여섯 명 밖에 남지 않았다.
이들이 정예멤버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 중에 스턴트만 하려고 온 사람 있어?”
생뚱맞은 질문이다.
질문하는 타이밍이 늦어도 한참 늦었다.
궁금했다면 교육캠프에서 물었어야 했다.
어쨌든 25기 동기들이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그래도 이왕하는 거 배우 해야지. 조연이라도.”
“난 엑스트라라도 좋은데.”
합기도 유단자 출신의 맏형이랄 수 있는 양선동, 검도를 포함해 다양한 무술을 연마한 김재원이 차례로 대답했다.
“난 스턴트만 할 거야.”
유도 선수 출신이면서 인상만으로 상대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 수 있는 오도훈의 대답이었다.
“나도. 배우는 관심 없어.”
조금 시크하게 답하는 유일한 스턴트우먼 이샘물이었다.
“스턴트맨이라고 대역만 하지는 않아. 그래서 난 가장 임펙트 있는 등장인물. 언젠가 주인공을 할 거야.”
포부를 밝히는 조현동이었다.
동기들이 ‘오오’ 하며 박수를 쳤다.
일반적으로 멋쩍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조현동은 자신만만했다.
조현동이 남은 두 사람, 이온과 형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형민씨와 막내는?”
이온이 25기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것이 맞다.
그런데 대선배나 무술감독들이 막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갈 수 있지만 동기들까지 막내라고 부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이온이다.
“제 이름은 나이온입니다. 미안하지만, 이름을 불러주겠습니까? 조현동씨?”
“뭐야 새꺄? 조현동씨?”
“교육캠프 동기라는 사실 빼고 기수 동기라는 사실 빼고 우리 사이에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까? 주인공을 하든 조연을 하든 배우 쪽으로 나가려면 어차피 액션아카데미에서 떠날 것 같은데. 동료로서 호칭 부분에서 서로 예의를 지키시죠.”
액션아카데미를 나가면 어차피 동료도 아닐 테니까, 서로 친한 척 하지 말자는 의미다.
“보자보자 하니까. 이 새끼가! 싸가지 없이, 어디서!”
“이 새끼 저 새끼 하지 마세요. 나이가 벼슬입니까? 댁이 비보이나 트릭커 선배입니까? 뭔데 나한테 함부로 말을 합니까?”
벌떡.
조현동이 발작했다.
친절하고 고분고분하면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 심리다.
이온도 지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조현동과 대치했다.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 누가 더 손해인지.
“나이도 어린놈에 새끼가. 내가 운동밥을 먹어도 몇 끼를 더 먹고, 빠따를 맞아도 몇 대를 더 맞았는데! 건방지게!”
여기서 욕설이 이어지거나 부모님이 소환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이온이 폭발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두 모여 봐!”
최창민 무술감독이 체육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스턴트맨들을 소집했다.
액션아카데미 운영위원이자 상남자 중에 상남자 최창민 감독은 얼마 전 종합편성채널의 퓨전판타지사극의 촬영을 시작했다.
후다닥.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기수별로 정렬했다.
“다음 주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 동안 합천에서 드라마 <태황 광개토>의 전투씬을 촬영할 예정이다. 서른 명이 필요해.”
웅성웅성.
후배 기수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오랜만에 대규모 전투씬에 나가는 기대감이 표출된 것이다.
“19기부터 25기 막내까지 다른 촬영 스케줄이 없는 사람은 가급적 참가하도록 하고. 특히 막내들은 웬만하면 전원 참가하도록. 대규모 전투씬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실제 현장에서 무술팀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예!”
고참을 뺀 후배 기수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21기까지는 알아서 준비할 수 있지?”
“예.”
“22기가 막내 기수와 조를 이루도록 해. 촬영 전날까지 동선과 합을 모두 맞춰놓도록 준비하고.”
“옛!”
“날씨가 쌀쌀하다 작은 부주의나 실수로 다칠 수도 있어. 만만하게 생각하지 말고 철저히 준비하도록 해.”
“예!”
“해산!”
고참 스턴트맨들이 체육관의 한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화이트보드 빼곡히 적혀 있는 각종 촬영스케줄들을 확인했다.
고참은 참여할 프로젝트를 선택할 수가 있다.
반드시 최창민 감독의 작품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다만 선택할 수 있는 다른 프로젝트들이 많을 경우에 그렇다.
후배 기수들은 흩어지지 않고 제자리에 남았다.
먼저 23기와 24기 선배들이 짝을 이뤄 흩어졌다.
그리고 22기와 25기만 남았다.
“22기 표일재다.”
표일재는 기수에서 박충원보다 늦지만, 나이는 더 많았다.
때문에 평상시에는 박충원이 표일재에게 ‘형’이라고 부른다.
다만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될 경우 박충원이 코디네이터급이기 때문에 어시스턴트인 표일재가 그의 직위와 경력을 존중했다,
사실 막내 기수에서 벗어나면 기수니 서열이니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형아우 하기도 하고, 나이 많은 후배가 기수 높은 동생에게 선배 대접을 깍듯이 하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가족 같은 분위기다.
임대한 라인을 빼고.
그들은 특정 학교와 특정 격투기 종목이라는 인맥으로 인해 고리타분한 서열놀이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래봐야 70여 명(25기 제외)의 액션아카데미 식구 가운데 대세를 이루진 못한다.
“오다가다 대화를 해본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을 거다.”
“......!”
25기는 반응 없이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렇다고 부동자세를 취하진 않았다.
짝다리 짚는 것만 조심했다.
“막내들은 공격측, 22기가 수세측이다. 내용을 전달받지 못해 정확하게 군대 간 전투인지, 토벌전인지, 자객인지, 궁수가 포함되는지 알 순 없지만. 일단 경험이 없는 후배들은 공격조로 합을 맞춘다. 다 대 다 몹씬 전투는 감독님 지휘 아래 연습하는 것으로 하고 우리는 짝을 이뤄 소규모 합을 맞춰보기로 한다.”
표일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22기 선배 네 명이 동시에 이온에게 다가왔다.
이온을 파트너로 삼겠다는 의사표현이다.
다른 동기에게도 선배들이 다가갔지만, 조현동과 이샘물에게는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다.
“샘물이는 날 따라와.”
22기 스턴트우먼 선배들이 25기 유일한 스턴트우먼인 이샘물을 데리고 갔다.
이번 대규모 전투씬에는 스턴트우먼은 참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되자 조현동만 민망한 상황이다.
혼자 지목을 받지 못했기에.
‘......X발!’
조현동의 귀가 벌게졌다.
동기들이 일제히 조현동을 쳐다봤기 때문이다.
“거기, 한국대!”
“네, 선배님!”
“넌 나하고 합을 맞춰.”
“옛!”
“쟤는 내게 양보해주라.”
동기들끼리 후배 하나를 놓고 신경전을 벌여서 좋을 것이 없다.
따라서 표일재가 나서서 정리했다.
다른 이들도 크게 불만이 없었다.
선배들이 이온에게 유독 몰려든 이유는 별 것 아니다.
그들은 이치열, 송관효 같은 감독급 선배들이 왜 이온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궁금했다.
함께 조를 이루게 되면 혹시 그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 호기심 때문이었다.
어쨌든 유치한 짝짓기 해프닝이 끝났다.
지목을 받지 못했던 조현동도 짝을 찾았다.
“저 선배님. 합은 각자가 알아서 짜는 겁니까?
“너 몇 살이야? 군대 갔다왔다고?”
“스물넷입니다.”
“선배니 뭐니 집어치우고 형이라고 불러. 임감독 같은 꼴통이나 서열놀이하고 자빠졌지 대부분은 다 편하게 지내니까.”
“네. 형.”
“한국대라고 부를 수도 없고. 이름이 뭐냐?”
“나이온입니다.”
“그래 이온이. 암튼 합은 내가 짤 테니까 넌 고민 안 해도 돼.”
당연한 거다.
이온이 짜봐야 어린애 장난 수준밖에 안 나올 테니까.
“일단 네 수준을 봐야하니까 열 합 정도만 맞춰보자.”
이온이 목검 두 개를 가져왔다.
“사선베기, 한 번 더, 다음에 내가 찌르기 들어가면 왼쪽으로 허리 틀고 다시 상단 내려치고.....”
스턴트맨이 몸만 쓰는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은 몸보다 머리를 더 많이 쓰는 직업에 가깝다.
고려해야 할 것도 많고, 매 상황마다 미리 계산하고 외워야 할 것은 더 많다.
합이라고 하는 것도 그저 동작만 외워서 되는 것도 아니다.
액션 합이라는 것이 일정한 박자와 호흡으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변칙도 있다.
때문에 센스도 중요하다.
“어라?”
간단하게 합을 맞춰본 표일재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온의 실력이 엉터리가 아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자식이, 곧잘 한다?”
이온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선배들이 네가 칼 잡으면 폼이 날른다고 해서 어떻게 잡아주나 고민했거든.”
검술을 펼칠 때 폼이 나르는 것처럼 뜬다.
쓸데없이 화려하고 군더더기가 많다는 의미다.
때론 검이 가볍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칼을 휘두를 때 가급적 크게 크게 하라고 하셔서......”
“앵글이나 화면 사이즈에 따라 다 달라. 카메라와 가까운 곳에서 칼을 크게 휘두르면 바래(가짜 티)날 가능성이 매우 높지. 카메라에서 멀어질수록 동작을 크게 해주는 게 좋고.”
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영화를 찍어본 적도 없고, 겨우 마네킹 대용 같은 대역만 경험했을 뿐이지만, 권용찬 감독이 알려준 책을 시작으로 몇 권의 영상 관련 서적을 독파했다.
잘 만든 액션영화도 참조하면서 기초적인 화면 구도, 앵글, 렌즈와 화면의 상관관계 등을 알아 가고 있었다.
“이번 액션 합에서는 칼을 길게 길게 빼줘. 어차피 너와 나는 출연자 10번 대라서 카메라에서 가장 먼 곳에서 칼춤 추고 있을 테니까.”
“예. 형님.”
“진짜 춤춘다는 게 아냐.”
“그 정도는 압니다.“
이온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또 시작이다.’
이온을 좋게 보는 선배들은 모두가 수다쟁이들 같다.
아니면 유난히 친절하고 너그러운 성격이든가.
표일재 역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할리우드 액션에 대해 환상이 있을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건데. 걔들 액션은 진짜 간단해. 대신 정확하지. 사실 우리보다 액션이 쉬워. 오죽하면 권 감독님이 미국에서 액션 배우 한다면 나이 환갑 넘어도 가능할 것 같다고 하시겠냐? 실제 칠순 먹은 할배들도 잘만 액션 영화 찍고 있기도 하고.”
“아, 네.”
“우리나라 액션 스타일은 미국처럼 정확한 느낌보다 생동감이라고 해야 할까 어떤 필을 중요시한다고 할까. 내가 때리면 넌 왼쪽으로 피해. 그 다음에 넘어져. 그리고 굴러. 그런 식으로 미국 애들은 합을 철저하고 정확하게 계산해. 근데 우리는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해. 외국 사람들이 우리 액션보고 환장하잖아?”
“리얼리티 때문이죠. 실제 싸우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듣는 사람이 너무 가만히만 있으면 말하는 사람의 기운이 빠진다.
적당이 장난을 맞춰주면 신이 나는 법.
특히 배울 점을 말할 때는 추임새를 넣으면서 흥을 돋울 필요가 있다.
“몸의 감정....... 이거 감 잡기 진짜 어렵거든. 솔직히 나도 아직 잘 몰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액션 연기라는 게 정확도보다는 실감 나게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거야. 그러니까 칼을 휘두르든 찌르든 막든 기계처럼 딱딱 맞추는 것은 기본이고 그 액션마다 감정을 실어야 한다는 거야.”
막연한 이야기다.
이온은 액션 연기라는 것이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무술감독이나 선배들은 추상적인 개념을 가르친다.
이번에는 액션이 몸에 대화가 아니라, 몸에 감정을 담는 것이란다.
“어렵네요.”
“그래서 베테랑 선배들에게 지도 받고 함께 연습해야 하는 거야. 난 아직 그 정도 레벨은 아니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늘은 네 실력 파악하는 것 정도만 하자. 힘 빼고 해. 무리 안 할 거야.”
“네.”
경험이 많지 않은 스턴트맨들이 간과하기 쉬운 위험요소들을 베테랑 선배들은 경험과 감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 해보는 액션이나 처음 겪는 환경에서는 반드시 선배들의 도움을 받고, 함께 팀을 이뤄 연습해야 한다.
와이어액션을 하기 위해 장비를 한 번 더 점검해 안전을 확보하거나, 사극의 경우 칼이나 날아오는 화살의 방향을 미리 파악해 부상위험을 피하는 일은 기본이다.
자신의 안전은 물론, 파트너의 안전까지 생각해야 할 때가 많다.
이럴 때는 몸보다는 머리를 더 많이 써야 한다.
최고의 운동선수 대부분이 머리가 좋다.
연기 잘하는 배우 또한 머리가 좋다.
당연히 머리를 잘 쓸 줄 아는 사람이 스턴트도 잘한다.
지능이 높은 것과는 상관없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기술을 뛰어넘어 예술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식이나 신체 능력보다 공감능력, 정서적인 면이 훨씬 더 중요하겠지만.
그런 부분은 누가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깨우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