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데뷔 인 듯 데뷔 아닌 듯.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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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뭔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눈으로 익히고 머릿속에 하나하나 저장시켰다.
사소한 것도 하나라도 놓칠 새라 머리에 새겼다.
“안녕하십니까?”
“응. 그래.......”
이온은 촬영장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먼저 인사했다.
“누구? 우리 스탶인가?”
“스턴트팀입니다.”
“아, 그래? 막내가 새로 왔나보네.”
스태프 가운데는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외모의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이온은 개의치 않았다.
얼굴에 미소를 띠고 열심히 인사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걸 몸소 실천했다.
물론 웃는 얼굴에 침 뱉는 비정한 직업세계도 있다고 들었다.
적어도 <도련님을 부탁해> 촬영장은 그렇진 않은 것 같다.
OTT를 통해 시청했던 예전의 드라마에서는 액션배우가 감독이나 주인공에게 무시 받는 장면이 있었다.
이온이 직접 촬영현장에 와서 본 느낌으로 그 드라마와 완전히 달랐다.
어떤 일을 하든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경우는 없는 법이다.
물론 과거 스턴트맨들이 ‘으악새’니 ‘방망이’라니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온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라 별로 와 닿지는 않았다.
어쨌든 촬영현장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반응은 어째 무덤덤하다.
사실 스턴트팀 막내가 스태프들과 말을 섞을 레벨은 아니다.
말 걸어주면 성은이 망극하다고 해야 할 처지다.
이온은 일종의 인턴기간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의사로 치면 수련의 1년차 과정이랄까.
아직 배우는 단계다.
따라서 박충원 정도 기수의 선배가 현장 분위기를 익히도록 돕고, 업무보조 정도만 시킨다.
게다가 언제 그만 둘지 모르기 때문에 굳이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소개시켜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온은 열심히 인사했다.
“아까 인사했잖아요.”
“아, 그랬습니까? 어쨌든 수고가 많으십니다.”
호호호.
여자 스태프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손에 에어퍼트를 들고 있는 것으로 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것으로 추측했다.
스턴트맨답지 않게 곱상하게 생긴 청년이 말까지 예쁘게 하니 그녀로서는 이온을 나쁘게 볼 이유가 없었다.
“자식이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싹싹하게 잘 처신하네.”
박충원이 칭찬했다.
액션아카데미 소속 스턴트맨이 많기도 하고, 무술감독이 13명이나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사수·부사수 개념이 만들어진다.
싹싹한 후배는 누구나 탐을 낸다.
실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런 이들은 막내를 벗어난 이후 연차가 쌓여가면서 골라서 촬영장에 나갈 수도 있다.
반면에 일종의 수습기간이라 할 수 있는 막내 생활 동안 태도가 불량하거나 문제를 일으키거나 가르쳐서 될 싹수가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무술감독이 불러주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도태된다.
드르륵.
도로에 세워져 있던 견인차가 특수촬영용으로 제작된 트레일러를 들어 올려 뒤로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가 트레일러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승용차가 트레일러 위에 자리를 잡자, 촬영팀이 카메라와 렌즈박스 등을 옮기고, 조명팀은 견인차에 설치된 발전기에 선을 연결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드라이빙 장면을 이런 식으로 찍는 거구나.’
이온은 차량의 실내 장면을 촬영하기 위한 준비과정을 유심히 살폈다.
승용차 딱 한 대를 올릴 수 있는 넓이의 트레일러에는 조명과 카메라를 설치할 수 있는 약간의 여유 공간이 있을 뿐, 많은 인원이 탑승할 수가 없는 구조였다.
트레일러의 폭은 대략 차선 하나를 채울 정도.
“선배님, 우리도 저기 올라가서 촬영할 때가 있습니까?”
“차량 내부에서 파이트씬 찍지 않으면 올라갈 일, 거의 없어.”
이온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 보닛이나 지붕 위에 매달리는 등 위험한 장면에서 대역을 하게 된다면, 저런 장비에 탑승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쪽에 슈팅카 보이지?”
이온이 박충원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반적인 박스트럭 사이에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는 포스의 차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육중한 픽업트럭을 개조해서 앞, 지붕, 후면에 튼튼한 탑승대가 붙어있다.
탑승대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촬영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특수차량인 것 같았다.
“저 차에 크레인이나 지미집을 올리거든. 아, 크레인이나 지미집이 뭔 줄 모르겠구나.”
“알고 있습니다.“
“알아?”
“권 감독님이 영화의 이해라는 책을 보라고 해서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실무적인 것은 잘 몰라도 이론이나 개념은 공부해 두었습니다.”
박충원이 역시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역시라는 의미에는 ‘한국대생은 달라‘ ‘똑똑한 녀석‘ 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렉카가 아니라 진짜 도로 위를 달리는 차의 보닛에 매달리는 액션을 연기해야 돼. 그러니까 저쪽의 슈팅카와 호흡을 주로 맞추게 되지. 저 슈팅카가 우리가 연기하는 달리는 차의 앞·옆·뒤에서 따라오면서 촬영을 하게 되니까.”
이온은 박충원의 가르침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저장했다.
사실 이런 정보도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다큐멘터리, DVD 부록 등을 보면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생생한 현장감을 담고 있는 선배의 말이 더 확실하게 와 닿았다.
자신의 경험담까지도 엮어서 이야기해주니까.
“그리고 요즘은 VFX가 워낙 발전해서 실제 공도에 나와서 위험한 장면 촬영하는 일보다 세트에서 하는 추세로 바뀌고 있어.”
“그래서 와이어액션 열심히 연습하라고 하셨던 거군요?”
“와이어 차는 거 익숙해져야 돼. 안전장치 차고 연기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거든.”
레카 촬영 준비가 완료되면서, 촬영 대기 장소에 활기가 도는 것 같다.
아이돌 출신의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메이크업을 확인 받고, 트레일러 위로 올라갔다.
배우가 승용차 운전석에 자리를 잡으면서 촬영 스탠바이.
PD로 보이는 남자가 무전기에 ‘출발‘을 외쳤다.
레카가 촬영용 트레일러를 끌고 도로로 나아갔다.
“차에 가 있자.”
“대기 안 하고요?”
“아마 한 두 시간 안에 안 끝날 거야.”
“......?”
“아까 뭐라고 그랬지? 방치? 우리 이제부터 방치 당하는 거야. 하하.”
박충원이 웃으며 자신의 차로 향했다.
이온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차에 올라탔다.
박충원의 말대로 됐다.
두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방치됐다.
누구도 두 사람을 찾지 않았다.
촬영용 레카가 대기 장소로 자주 왔다가, 뭔가를 점검하고 다시 도로로 나갔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 다시 돌아왔다.
그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됐다.
스턴트팀은 자신들이 해야 할 촬영까지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다.
만약 조연배우나 보조출연자가 왔다면 그들도 같은 신세였으리라.
박충원은 연신 전자담배를 빨아댔다.
가끔 차에서 내려 어디론가 다녀왔다.
믹스커피를 두 잔 타오기도 하고, 박카스와 우루사를 가져오기도 했다.
과자 같은 간식도 가져왔다.
“원래 이런 심부름은 네가 하는 건데, 첫날이니까 내가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농담이야. 레카씬 찍을 때는 간식테이블을 안 깔아놔. 막내인 네가 제작부한테 가서 달라고 해봤지 안 줘. 이따 장소 이동하고 혹시 야외에 간식테이블 깔면 알려줄게.”
“예. 선배님.”
“밤은 잘 새는 편이야?”
“하룻밤 정도는 별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영화는 좀 덜 한데, 드라마는 진짜 힘들어. 촬영의 한 70% 정도가 밤에 이뤄지는 것 같더라.”
스턴트 및 액션장면이 그렇다는 말이다.
범죄는 주로 밤이나 외진 곳에서 벌어지니까.
“짬이 10년 이상 된 선배들은 한 5~6년은 밤낮이 바뀌어서 살았을 걸. 진짜 욕 나오는 건 40시간 연속 촬영할 때였어.”
과거에 비해 촬영 환경과 여건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해도 지상파 방송의 쪽대본 관행이 없어지지 않는 한 무리한 제작시스템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기본촬영 외 추가수당 지급 개념이 정착되었다고 해도 그에 맞춰 또 다른 편법이 만들어지게 마련.
여전히 영화와 드라마 제작환경은 녹록치 않다.
물론 이온은 이제 막 발을 내딛었기 때문에 앞으로 험난한 여정을 상상조차 못했지만.
“우리가 만날 하는 말이 있어.”
“다치지 말자 말입니까?”
“노는 것보다 못 벌어도 현장 나오는 게 행복하고, 놀아도 현장에서 놀자.”
“아, 네.”
이온으로써는 와 닿는 말이 아니다.
몇 년 이 바닥에서 굴러야 저 말이 의미하는 것을 알게 된다랄까.
암튼 이온은 첫 촬영이라고 해서 기대가 컸다.
그런데 야식을 먹을 때까지 박충원과 대화만 나눴다.
물론 사소한 것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하는 입장에서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긴 하다만.
스턴트맨이 아니라 드라마 촬영장에 놀러 온 사람들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래도 되나 싶은 것이다.
드르르.
박충원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예. 감독님.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박충원이 급하게 차의 시동을 켰다.
다짜고짜 차를 몰아 렉카씬 촬영 대기장소를 떠났다.
그리고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 안쪽의 한적한 도로에 차를 세웠다.
한적한 도로에는 이미 액션아카데미 F1팀이 와 있었다.
이온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박충원만 졸졸 따라다녔다.
“야, 막내!”
“옛!”
이온이 얼른 달려갔다.
정지융 무술감독이 지붕이 오픈된 스포츠카에서 내리며, 대뜸 물었다.
“운전 할 줄 알아?”
“면허는 있는데, 장롱면허입니다.”
이온은 솔직하게 말했다.
정지융 감독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뭔가 난감해 하는 모습이다.
“전혀 못해?”
“주차는 많이 안 해 봐서 모르겠고. 도로 주행은 어찌어찌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어찌어찌는 또 무슨 말이야! 된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
왠지 고가의 스포츠카 운전을 맡길 것 같다.
따라서 이온은 호기를 부릴 수가 없다.
자칫 운전대를 잡았다가 사고라도 나면.
‘첫날부터 스턴트맨 인생 종치는 거지.’
이온에게서 관심을 거둔 정지융 감독이 누군가에게 열심히 전화를 돌렸다.
박충원이 슬그머니 이온의 소맷자락을 끌어 잡아당겼다.
“감독님들이 불러주면 토 달지 말고 무조건 하겠다고 해.”
“그러다 사고 나면요......?”
“막내한테 위험 부담이 조금이라도 있는 걸 시키겠냐? 상식적으로?”
“......”
정직하게 대답하는 것만 생각했지 미처 그 부분은 고려하지 못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고.
대기를 빙자한 방치 상태에 놓여 있다 보니 사고회로 자체가 멈춰버린 것 같았다.
“넌 특채도 아닌데 운 좋게 1년도 안 돼서 현장 나온 거야. 네 동기들은 아마도 1년은 거의 채워야 작품에 출연할 걸. 자신의 상품가치...... 좋게 포장해서 실력이 있고, 충분히 준비된 친구들만 무술감독에게 선택돼. 기수 마다 한 두 명은 도태되는 애들도 있고, 물론 도태되는 애들 대부분이 근성도 있고 성실하지만 재능이 없는 경우지만. 암튼 막내 생활 잘 이겨냈어도 재능이 없거나 기회를 제대로 못 살리면 결국 못 버티는 게 이 직업이야.”
이온은 박충원이 왜 자신에게 이렇게 잘 대해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액션캠프에서는 이렇게 막내까지 살뜰히 챙기고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못 버티고 언제 떠날지 몰라 정은커녕 관심도 잘 주지 않던 선배들이었다.
심지어 이온은 바로 위 기수 선배들에게 싸가지 없는 걸로 찍힌 상태.
일단 그 부분은 접어두기로 했다.
눈앞에 닥친 사안이 급선무다.
이온은 눈 딱 감고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아니, 도전해보기로 했다.
“저...... 감독님.”
“왜? 정신 사나워 죽겠구만, 뭐?”
정지융 감독은 상당히 예민해져 있었다.
뭔가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어떤 걸 찍으실지 모르지만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장롱 면허라며?”
“군복무 기간 전후로 운전대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장롱 면허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이 스포츠카 얼마짜린 줄 알아? 네 몸값보다 몇 배는 비싸. 괜히 호기부리지 마.”
“......네.”
이온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F1팀이 머리를 맞대고 자동차 체이싱 장면을 궁리했다.
이온과 박충원은 그들과 떨어진 곳에서 멀뚱히 지켜봤다.
자동차와 관련된 액션은 F1팀의 몫이다.
정지융 감독이 스포츠카를 몰고 차량 한 대 없는 한적한 도로를 달렸다.
스포츠카가 갈지자를 그리는 것처럼 어딘지 불안해 보인다.
일부러 불안정하게 몬 것이다.
국내 카 체이싱 드라이브 일인자의 운전실력이 저렇게 엉터리일 리가 없다.
‘음주운전 하는 장면인가 보구나.’
그렇다면 더더욱 이온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저런 드라이브는 드리프트 기술 못지않게 전문가가 해야 안전하다.
또한 전문가가 해야 그림도 잘 나온다.
액션아카데미 스턴트팀은 상암동 한적한 도로에서 음주운전 드라이빙 연습과 돌발 상황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촬영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또야? 또 이렇게 오늘 촬영 쫑 하는 거야!”
F1팀 소속의 스턴트맨이 짜증 섞인 푸념을 했다.
어제 오후 5시에 상암동 촬영현장에 도착해 새벽 3시 현재까지 이온이 한 거라고는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야식 먹고, 박충원과 수다를 떤 것 밖에 없다.
숨이 턱 막힌다.
아무리 드라마나 영화 촬영이 기다림의 예술이라지만.
몇 커트 되지도 않는 분량을 촬영하기 위해 9시간 가까이 대기만 하고 있어야 한다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다들 마지막 점검 해! 촬영팀 넘어온단다!”
다행히 오늘 촬영은 공치지는 않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