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나와 면담 좀 해.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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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 1년 미룰까 생각 중이야.”
“복학을 미뤄, 왜?”
이슬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동생의 입에서 나오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정해진 건 아니야. 어떻게 될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렇게 될 수도 있어.”
“등록금 때문에? 고민하지 말라고 했잖아. 얼마나 부족한데?”
“사실 누나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어.”
“뭔데? 코인 가격 많이 떨어졌던데...... 혹시 코인 투자했어? 아님 주식? 보이스피싱 사기 당한 건 아니지?”
이슬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
“아니야.”
“뭔데? 빨리 말 해.“
“단비하고 운동 다니는 거 말이야.”
“그게 뭐?”
“사실 단순한 운동이 아니야.”
“트랙터인지 트릭커인지 아니었어? 또 다른 운동 배워?”
“스턴트 배우러 다니고 있어.”
“스턴트맨할 때 그 스턴트?”
“응.”
“그거 배우는 것하고 복학이 무슨 상관인데?”
“내가 페루에서 워크캠프할 때 단비가 내 것까지 지원서를 냈는데 붙었어. 여섯 달 동안 캠프에서 무료로 훈련 받았거든. 정식 스턴트맨 기수가 되면 다시 6개월짜리 심화교육을 받아야 돼.”
“복학 하고 여유 있게 강의 시간표를 짜면 되잖아.”
“그게 안 돼. 기수가 된다는 것은 액션아카데미 소속이 된다는 거야. 매일 10시에 출근해서 6시 퇴근을 하게 돼.”
“다시 말해봐. 뭐라고? 취직을 한다는 거야? 학교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학교를 때려치우겠다는 게 아니고. 다음 학기 복학은 힘들다는 거야.”
“이 미친놈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난 지금 한국어로 말 하고 있어. 영어나 불어나 스페인어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퍽.
양반다리를 하고 소파 앞에 앉아 있던 이온의 어깨에 이슬의 발길질이 작렬했다.
데구루루.
이온이 뒤로 발랑 나자빠져 한 바퀴 굴렀다.
“그렇게 힘들게 한국대에 가놓고, 외국어를 무려 세 개씩이나 할 줄 알 때까지 그렇게 노력을 해놓고.”
“......”
“겨우 하겠다는 게, 겨우 스턴트맨이야?”
“스턴트맨이 어때서. 한국대 복학이야 언제든 할 수 있고, 외국어는 혹시 알아 외국에서 일할 때 요긴하게 사용될지. 나중에 진짜로 할리우드 진출할 수도 있지 뭘.”
“네 주제에 무슨......!”
이슬이 말 같지도 않은 동생에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폴 아저씨가 현직 할리우드 스턴트 코디네이터야. 누나 몰랐어?”
“스턴트가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는 거야?”
이슬은 스턴트에 대해 쥐뿔도 모른다.
아는 게 없으니 질문이 고루할 수밖에.
“내가 공부만 하느라 영화도 잘 안 보고, 비보이와 트릭커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서 잘 몰랐는데. 폴 아저씨가 할리우드에서 꽤 잘나가더라고.”
“......?”
“AC코믹스 실사 영화 중에 <자살 특공대>라고 알아?”
“여주인공이 미친년으로 나오는 영화?”
“미친년인지는 모르겠고, 조커 여친이라나 뭐라나. 암튼 그 시리즈 스턴트를 폴 아저씨 팀이 했다봐.”
“차라리 미국에 가서 공부할래? UC계열 대학에 편입하든가 해서 트랙터인지 트럭킹인지......”
“트릭킹. 티 알 아이 씨 케이......”
“암튼! 그거 마음대로 하면 되잖아. 굳이 험하고 위험한 스턴트맨을 해야겠어?”
“UC 대학은 뭐 막 개나 소나 다 편입 받아주나?”
“내가 널 개나 소로 키웠냐!”
이슬이 발길질을 하려고 하자, 한 발 앞서 피하는 이온이다.
“명색이 최고명문 한국대잖아. 학점도 나쁘지 않고. 남미 어지간한 나라에서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고. 한국대에 추천서 써줄 교수 없어? 누나가 우리 병원 교수님께 부탁해 볼까?”
“엄나, 동생 일이라고 덮어놓고 싸고돌지 말고 냉정하게 현실을 봐. 아무리 아빠하고 폴 아저씨하고 친구였고, 나도......”
이온이 슬쩍 누나의 눈치를 살폈다.
모든 것을 다 이실직고해야할 것인지 갈등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휴! 나이만 먹었지 어찌 이리 순진한지. 어디 가서 눈탱이 맞고 질질 짜기 십상이다. 누나가 네가 방학마다 폴 아저씨 체육관 가서 트릭킹인지 뭔지 배우는 걸 모를 줄 알았어? 어린 네가 혼자 미국 가는 걸 왜 내버려뒀는데. 폴 아저씨하고 로비 삼촌이 챙겨줄 걸 아니까 안심하고 보냈지. 이 멍청아!”
“그런가? 폴 아저씨하고 다 내통했겠지? 아무래도 그랬겠지.......”
이온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얼버무렸다.
솔직히 그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안했다는 것이 맞다.
당시에는 누나가 미국에 순순히 보내는 주는 것이 너무나 기뻤고, 카나한 체육관에서 본토 트릭킹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되었으니까.
“그렇다고 치고. 폴 아저씨가 내가 뭘 할 줄 알고 일을 시켜줘. 거기 가서도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건 마찬가지야.”
“그래도 할리우드는 다를 거 아냐. 수입적인 부분도 비교가 안 될 것이고.”
“LA 지역 물가는 생각 안 해? 할리우드에서 일해서 번 돈 가지고 LA에서 생활한다? 모르긴 몰라도 만만하지 않을 걸? 차라리 한국에서 충분히 트레이닝도 받고 커리어 쌓은 다음에 폴 아저씨팀에 오디션을 보든가...... 어? 엄나! 내가 스턴트맨 하는 거 찬성하는 거야?”
“......!”
이슬은 대답하지 않았다.
“난 누나가 스턴트맨 한다고 하면 무턱대고 화를 내거나 반대할 줄 알았어. 그래서 누나를 설득할 수 있는 수십 가지 논리를 준비했어.”
“내가 왜 반대해? 네 인생인데.”
“진짜? 진심?”
이온이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빤히 누나를 쳐다봤다.
“하지 말란다고 안 할 거야? 이젠 머리 커져서 누나 말도 안 듣잖아.”
“누나 말을 안 듣는 게 아니지.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 맞는 거지.”
“진짜 뒤지게 맞는 수가 있다. 자꾸 깐족깐족 토 달래?”
“넵. 진지하게!”
“온아.”
“.......응?”
“누나는 그냥 누나지 엄마가 아니잖아. 중학교 이후로 이거해라 저거해라 누나가 강요하거나 일방적으로 명령한 적 있었어?”
이온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 누나는 잔소리가 무척 심했다.
당시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삐뚤어지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말 그대로 잔소리였다.
양말 벗어서 아무데나 던져 놓지 마라.
땀 난 옷은 그때그때 빨아라.
세탁기에 청바지 넣고 돌리지마 등등.
주로 일상생활과 관련해서 흔히 할 수 있는 잔소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 말라는 건 많아도 하란 건 없었네 뭐.”
“이 게! 확!”
이번에는 누나의 발길질을 순순히 받아줄 생각이었다.
헌데 누나는 발만 들어 올릴 뿐, 차지는 않았다.
대신 어딘지 씁쓸한 어조로 마을 이었다.
“앞으로의 세상이 얼마나 살기 팍팍해 질는지. 최상위권 대학의 이름도 그저 이력서의 한 줄을 채우기 위한 용도로 전락하고, 쓰지도 않을 외국어를 위해 현지인도 모르는 단어를 외우고, 비정규직의 서러움을 꾹꾹 눌러 참아도 정규직이 될 수 없다는 현실에 비참한 통곡을 하다가, 결국 꿈이란 게 얼마나 허무한 단어인가를 실감하고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게 되는, 그런 삶보다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온도 동의하는 바다.
이온이 생각하는 꿈의 실체란 더없이 모호했다.
누구나 꿈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늘 포기에 대한 유혹을 느낀다.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은 언제 어디서든 험난한 법.
그럴 때는 의지력보다 인내가 필요하다.
그런 인내야말로 진정한 인내다.
문제는 사람들은 꿈과 목표를 혼동한다는 사실이다.
꿈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자신의 모든 걸 쥐어짜서 겨우겨우 해낼 수 있는 것이 목표다.
이온은 현실주의자에 가깝다.
꿈처럼 애매모한 것에 매달리기보다 자신이 간신히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할 때까지 인내하고 노력하는 타입이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맞아. 두 번 사는 인생은 없지. 근데 누나?”
“왜?”
“회귀야 환생이야 빙의야?”
“......?”
“혹시 인생 2회차야?”
“자꾸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 할래?”
“마치 다 통달한 것처럼 말하기에. 한 번 살아봤나 해서.”
“......”
“누나는 웹소설도 안 읽고 넷튜브도 안하고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냐?”
“스팀플렉스 보는 재미로 산다 왜!”
“솔직히 누나도 간호대 졸업하고 곧장 대형병원에 들어가서 세상 물정 깜깜한 건 나와 도긴개긴 아닌가?”
“내가 세상 물정 모를 수도 있겠지. 근데 이 누나는 지혜가 있어.”
잠시 남매 사이에 말이 없었다.
그렇게 약간의 정적이 거실에 내려앉았다.
“대신 졸업 못하면 난 결사반대야. 내가 죽는 걸 보고 스턴트를 하던지 트럭 운전수가 되든지 마음대로 해.”
“엄마 아니라며? 그런 말은 엄마들이나 하는 멘트같은데?”
“이 걸 그냥! 확!”
이슬이 깐죽거리는 동생이 너무 얄미워 한 대 쥐어박으려 했다.
장난은 여기까지.
이온이 깐죽거리는 걸 멈추고 진지한 자세로 돌아왔다.
“액션아카데미 소속 스턴트맨이 된다는 보장은 없어. 테스트를 거쳐야 하니까. 다만 그 테스트에 합격하게 되면 적어도 1년은 더 스턴트맨에 집중할까 해. 그 이후에 학업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지 어떻게 될지 당장 약속은 못해.”
“서양사학과 지원하려고 할 때 대기업의 유럽 주재원이 목표라고 했잖아.”
“여러 가지 계획 중에 하나였어. 누나도 알지만 나는 공부로 성공할 생각은 없어. 솔직히 말해 그럴 머리도 안 되는 것 같고. 다만 한국대에 다니면서 준비한 것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해줄 거라는 건 알아. 액션아카데미에 다니는 것도 그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해.”
“지금 네 나이 때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데......”
“어차피 복학하면 남들 하는 취업준비나 하고 있을 텐데 뭐. 일찌감치 적성에 맞는 일 찾아서 시작하는 게 현명한 거 아닐까 싶어.”
적성에 맞는다는 말에 안심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이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온이 목에 걸고 있는 토끼발 목걸이로 향했다.
저 부적에게 간절히 빌고 싶다.
제발 동생이 험한 꼴 당하지 않고, 상처도 받지 말고, 다치지도 말고, 결국 자신의 자리를 잘 찾아가길.
아빠와 해리 아저씨 그리고 토끼발의 가호가 동생을 지켜주길.
“아점 뭐 먹을까? 간단하게 먹을까 아니면 보쌈 때릴까?”
“아무거나 시켜.”
이온이 음식배달앱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야옹~
이슬은 클로이를 품에 안고 거실 창문으로 걸어갔다.
아파트 단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방금 전 나눈 동생과의 대화를 되돌아봤다.
말리지 않은 것에 미련 따위 없다.
동생의 선택은 이미 한참 전에 끝냈을 것이다.
한번 목표를 정하면 무섭게 몰두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대부분 이뤄냈다.
스턴트맨이 동생의 최종 목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을 통해 또 다른 길을 찾아갈 수도 있다.
동생의 말대로 자신도 모르고 본인도 모르는 적성을 찾아가는 과정일수도 있는 것이다.
동생이 자신처럼 틀에 박힌 지도 속에서 헤맬 필요는 없다.
규격대로 짜여진 삶 밖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만류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는 접어두는 것이 옳다.
‘온이는 똑똑하니까. 지금까지 자기 앞가림도 충분히 잘해냈고.’
✻ ✻ ✻
10여 년에 무술감독을 꿈꾸는 스턴트우먼과 까칠한 백화점 사장 김주원이 서로 영혼이 바뀌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가 크게 화제를 일으킨 바가 있다.
그 드라마에서 스턴트우먼 여주인공과 액션아카데미 식구들이 모두 함께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선배 스턴트맨의 제사를 지내러 가는 장면이 나온다.
없는 이야기를 드라마에 넣은 것이 아니다.
실제로 액션아카데미 소속 70여 명의 스턴트맨들은 매년 두 차례 파주시의 벽제납골당으로 향한다.
벽제납골당에는 스턴트를 하다 97년에 사망한 대선배와 2007년 중국 로케이션을 떠났다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뜬 무술감독 두 분의 납골이 안치돼 있다.
매년 두 차례 그곳의 잠들어 있는 선배님들께 후배들이 인사드리러 간다.
특히 신입기수들은 6개월 과정이 끝나는 달에 벽제납골당으로 가서 막내로서 선배들에게 첫 신고를 하고, 스턴트맨으로써 의지와 각오를 다진다.
이온과 형민 역시 다른 신입들과 함께 벽제납골당에 참배를 드렸다.
두 사람 다 무난하게 테스트를 통과했다.
임대한의 수작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액션아카데미의 주요 수뇌부들이 이미 교육캠프부터 이온을 눈여겨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비는 본래의 뮤지컬 지망생으로 돌아갔다.
전 여자청소년국가대표 출신의 이민경은 무릎수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식 신입기수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단비와 민경을 제외하고 7명 모두가 테스트에 합격해 액션아카데미 막내 기수가 됐다.
“앞으로 너희들은 대선배님들께 참배 드린 오늘의 그 마음가짐으로 현장에서 일한다. 알겠나!”
“옙!”
벽제납골당을 다녀온 다음날부터 막내 기수 심화교육에 돌입했다.
기초체력훈련은 당연히 빠지지 않았다.
액션캠프에서 맛보기로 경험했던 다양한 스턴트 기술을 자세하게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인지라.
친구 따라 강남 갔다가 아예 눌러앉은 것도 모자라서.
제비가 아니라 매가 되어 하늘 높이 비상할 줄, 이온 본인은 물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직은 먼 훗날의 이야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