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인연은 집을 나서야만 마주친다.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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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서 페루 수도 리마의 호르헤 차베스 공항까지 무려 12시간을 날아왔다.
이온이 한국으로 가지 않고 페루로 온 이유가 있었다.
국제워크캠프를 통한 근로봉사와 여행을 함께 하는 패키지 프로그램을 수행할 예정이다.
때문에 페루에서 한 달 간 머물 예정이다.
이온은 고등학교 때부터 카나한 게더링에 참여한 후 멕시코, 칠레, 페루, 볼리비아 등 스페인어 국가들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현지인들과의 소통을 통해 스페인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 애썼다.
대학입시를 대비해 봉사점수도 따고, 언어 능력도 키우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렸다고 할까.
두툼한 등산배낭을 짊어진 이온이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잠시 공항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가 스마트폰을 꺼내 톡을 보냈다.
곧바로 답신이 달렸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 네 번 알림이 빠른 속도로 울려댔다.
이온은 쏟아지는 톡을 무시하고 공항의 체크인카운터 구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한 쌍의 한국인 남녀를 발견했다.
이온은 빠른 걸음으로 쭈그리고 앉아 태블릿을 보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영지야!”
“어? 왔어?”
“쟤는 왜 뻗었냐? 멀미라도 했어?”
여학생의 옆에서 스포츠머리 스타일의 청년이 새우잠을 자고 있다.
“공항 노숙자도 아니고 꼴 봐라....... 야! 일어나!”
이온이 청년의 엉덩이를 발로 툭툭 찼다.
부스스 일어난 청년이 짜증을 부렸다.
“......빨리 좀 오지. 새꺄!”
“비행기가 무슨 택시냐?”
“심심해서 뒈지는 줄 알았잖아!”
“비행기 타고 오는데 빨리 오고 싶다고 빨리 와져?”
“오전 비행기를 탔으면 됐잖아!”
“돈 아끼려고 그랬다 왜!”
두 사람이 다투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화를 내는 청년은 이온의 둘도 없는 친구 이영재다.
제법 사내답게 인상,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군대를 제대한지 이제 막 열흘이 되어 간다.
먼저 인사를 했던 여자는 영재의 네 살 터울 여동생 이영지.
영재는 이온에게 형제 같은 사이라고 할 수 있고, 영지 역시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친여동생이나 마찬가지다.
“영지는 비행기 멀미 안했어?”
“말도 마. 오빠! 페루가 이렇게 멀 줄을 정말 생각도 못했어. 환승 대기 타는데 아주 죽는 줄 알았다니깐.”
한국에서 페루까지 직항이 없다.
때문에 인천국제공항에서 리마까지 미국을 경유해 하루 반나절 이상 걸린다.
이온의 어투는 친구인 영재에게 하던 것과 완전 딴판이다.
“그러게 좀 쉬운 동남아로 가라니까. 뭐 하려고 따라와.”
“솔직히 취업할 때 자기소개서에 적으려고 봉사 활동 하는 건데, 가장 힘들었던 일 항목에 동남아 봉사는 좀 약할 것 같아서. 개나 소나 다 가는 곳이기도 하고.”
“스펙 쌓기 좋은 해외봉사도 찾아보면 많다니까.”
“오빠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나는 대기업이 주관하는 해외봉사 프로그램도 가봤어.”
“그런 게 취업에 더 도움 되지 않아?”
“아휴. 오빠는 고등학교 때부터 겁 없이 막 혼자 해외봉사 다녀서 몰라. 그런 해외봉사활동에서 제일 우선하는 게 뭔 줄 알아?”
“모험심, 성실, 겸손?”
“사진하고 영상이야. 팀별로 사진·영상 제출 의무가 있거든. 봉사활동 하는 내내 계속해서 사진하고 영상 찍었어. 주관한 기업 관계자들이고 학교 관계자고 간에 현장에서 봉사단원들 배치할 때 소위 그림 되는 곳을 권유한다고.”
대학생들 사이에서 봉사의 가치에서 벗어나 해외봉사가 스펙 쌓기용이라고 변질되었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해외봉사가 너무 인기가 많다보니 해외봉사를 사업 아이템으로 삼아 이익을 창출하는 회사까지 영업 중인 것이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오빠와 다녀야 뭔가 생 리얼 버라이어티를 체험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봉사도 하고, 스펙도 쌓고, 투어도 하고, 추억도 쌓고, 모험도 하고.
영지는 그런 꿈에 젖어있었다.
어림도 없다.
집 나가면 무조건 고생이다.
“꽤 빡셀 거야. 각오 단단히 해 둬.”
“내 과동기는 네팔에서 하는 봉사활동이 약해보여서 히말라야 등반하고 온다던데, 겨우 2900m 고산지대쯤이야.”
“나중에 내 원망이나 하지 마라.”
대화에서 소외된 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영재가 끼어들었다.
“기대 만땅인 얘한테 초장부터 초를 치고 그러냐. 쫄지 마. 오빠가 있잖아.”
“워크캠프에서 사람을 많이 모집했다는 건, 일이 많고 노동 강도가 세다는 거야.”
“그래봤자.”
이온의 냉철한 진단과 달리 영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근데 이온 오빠, 왜 비행기를 또 타? 돈 아껴야 하지 않나? 버스 타면 안 되는 거야?”
“아야쿠초까지 로컬 버스를? 한국에서 비행기 타고 온 건 어린애 장난 수준일 걸?”
이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치를 떨었다.
“여행의 낭만은커녕 생존이 걱정될 정도였으니 말 다한 거지.”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페루에서 봉사활동을 했을 때였다.
배낭여행의 낭만을 떠올리며 무작정 시외버스를 탄 적이 있었다.
고산지대인 아야쿠초까지 버스를 타고 쉬지 않고 13시간을 갔던 경험은 실로 끔찍했다.
굽이굽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비포장 산악도로와 기본적으로 해발고도가 3000m를 넘나드는 산악지역을 수십 개 넘어가며 평소에는 하지 않던 멀미를 하게 되고, 쿠션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는 버스 시트로 인해 온몸에 타박상을 입는 기분을 절감했으며, 오로지 외지인만 노리는 이름 모를 벌레들의 공격에 시달리고, 아찔한 절벽에 서서 수백 미터 절벽 아래로 물을 버리는 스릴과 창피함을 무릅써야 하는, 돈 내고 하는 생고생이 따로 없었다.
물론 12시간 이상 현지인들과 버스 여행을 하다보면 승객 모두가 친구, 식구가 되는 정겨운 정서를 느낄 수도 있다.
물론 저가항공 티켓값에 맞먹는 초특급 크루즈 버스가 있긴 하다.
그럼에도 이온 입장에서는 외국인이 함부로 시도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 번 타보고 싶었는데......”
“남미에서 로컬 시외버스 타고 장거리 이동하는 건 핵비추.”
물론 사람마다 다르다.
페루 현지의 로컬 분위기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일부러 장거리 시외버스를 타는 사람도 있다.
이온에게 있어서 페루의 로컬 시외버스를 이용하는 것은 근로봉사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전에 이미 진을 다 빼놓고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선택사항에서 제외했다.
때문에 워크캠프지로의 이동을 위해 페루의 저가항공을 예약해 두었다.
이온과 친구 남매의 최종목적지는 수도 리마가 아니었다.
중남부내륙 지역의 유서 깊은 도시 아야쿠초였다.
비행시간은 대략 50분 안팎.
출발하기까지 시간 여유가 꽤나 넉넉했다.
“저녁 먹고 갈까?”
“벌써? 너무 이르지 않냐?”
“아야쿠초는 고산지대야. 고산증 때문에 가자마자 휴식을 취해야 할 수도 있고, 그곳에서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음식을 먹게 되면 소화불량을 겪을 수도 있고.”
남매는 일리가 있다고 판단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밥 먹으려면 시내까지 나가야 되냐?”
“2층에 푸드코트가 있을 거야.”
“페루 음식은 어때? 먹을 만 해?“
영지가 여행용 백팩을 짊어지며 이온에게 물었다.
“한국인 입맛에 꽤 잘 맞는 것 같더라. 영재는 아무 거나 잘 먹으니까 문제없고, 너도 크게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고추장하고 밑반찬 많이 가지고 왔어. 걱정 마. 라면도 넉넉히 싸왔다.”
영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슈퍼마켓 같은 데서 한국라면하고 참치통조림 같은 거 팔았던 것 같아.”
“고산지대라며?”
“해외 나오면서 리서치도 안 하고 오냐?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명색이 17만 명이 사는 와망가 지역의 주도야. 무슨 오지 가는 줄 알았냐?”
“킥. 내가 이온 오빠한테 혼날 줄 알았다니까.”
영지가 쌤통이라는 듯 제 오빠를 놀렸다.
“Cierra el pico(주둥이 닥쳐) 영지. 너도 지금부터 힘들다고 해봐. 즉시 한국으로 돌려보낼 거니까.”
“눼에~”
일행은 쉴새 없이 티격태격하는 것으로 친분을 과시하며 공항 청사 2층으로 올라갔다.
이온은 미국계 패스트푸드점이 아닌 현지 음식점으로 남매를 이끌었다.
- 디스꿀뻬(실례합니다).
- 메뉴판 좀 보겠습니다. 쿠스케냐 맥주 세 병 먼저 주세요. 그리고 와이파이 비밀번호 좀 알려주시구요.
이온은 종업원과의 대화를 스페인어로 했다.
썩 괜찮은 수준이다.
참고로 이온은 한국대학 서양사학과 2학년 2학기에 복학할 예정이다.
한국대학교는 설명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학.
한국대 서양사학과는 사적강독, 영문사적강독을 필수로 그 외 독문사적강독, 불문사적강독, 노문사적강독 중 하나를 필수로 수강해야 한다.
때문에 영어는 기본이고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중 하나를 더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한국어 포함 3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보통 서양사학과 학생들은 그 정도에 만족하지 않는다.
졸업할 때가 되면 3개 이상의 외국어를 일정 수준 이상 구사한다.
이온의 경우 영어, 스페인어 외에 불어까지 제법 구사할 수가 있다.
맥주가 테이블에 서빙이 되자마자 영재는 맥주를 한 모금 목 뒤로 넘겼다.
꿀꺽.
“......크. 본토 쿠스케냐!”
맥주를 마신 영재는 마치 죽었던 고목이 생기를 회복한 것 같다.
우거지상에서 해맑은 표정으로 변신한 영재가 이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스페인어는 어때? 비전이 보이냐?”
취업 스펙으로 쓸 만한가를 묻는 것이다.
“전 세계 5억 명이 사용하는 언어라고 해서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영어는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언어이니 논외로 치고, 프랑스어를 쓰는 인구는 대략 3억 명, 스페인어는 5억 명의 가까운 인구가 모국어 또는 제 2외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스페인어의 경우 단독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국가는 모두 21개국.
스페인 본토와 아프리카의 적도기니를 제외하면 나머지 19개국이 중남미에 몰려 있다.
“이게 참 만만하지 않더라. 스페인어는 스페인어인데 중남미 나라마다 다 자기 식으로 변형해서 사용하더라고. 멕시코 애들은 슬랭 비슷한 말들이 일상생활에 많이 쓰이고, 다른 남미 국가들도 사투린지 뭔지 하여간 말은 얼추 통하는데 깊이 들어가면 표현이나 그런 게 골 때려, 이놈에 스페인어가.”
“불어는?”
“아직 DELF나 FLEX 볼 정도는 아니고, 복학하게 되면 죽어라 파야지.”
DELF는 공인 인증 프랑스어 능력시험이고 FLEX는 한국외대가 주관하는 시험으로 국내 기업이나 공공 기관 등의 승진시험 혹은 일부 대학원 진학에 사용되곤 한다.
“넌?”
어느새 맥주의 절반을 마셔버린 이온이 물었다.
“형들이 영어 외에 마인어 추천하더라.”
“동남아에서 뜨는 시장이이니까?”
“한국 기업 진출도 활발하고 한류도 인기가 많다고 하고 그렇다고 하는데...... 단군 이래 최대 스펙이라는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언어능력만 가지고 될까 모르겠다. 어차피 뭘 해도 지방대 문과생이라서......”
“술 퍼마시고 클럽 다닐 생각 말고 학점 관리나 잘 해. 국립대학 중에서 우리 학교 다음으로 취업률이 높다며.”
몇 년까지만 해도 취업 5종 세트라고 해서 봉사활동·인턴경력·공모전·자격증·토익을 준비했다.
그런데 얼만 안가 학벌, 학점, 토익, 어학연수, 자격증, 공모전 입상, 인턴 경력을 뜻하던 취업 7종 세트가 등장하더니 또 다시 해외봉사와 성형수술까지 추가된 취업 9종 세트까지 등장했다.
“이온 오빠는 학벌 좋지, 언어 능력자에 또 비보잉까지 잘 해. 심지어 연예인에 비빌 정도는 못 되도 일반인치고는 꽤나 봐줄만한 외모까지. 그런데도 취업걱정을 한다는 게 말이 돼?”
짜증이 난 영지가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나도 문과야.”
“그래도 오빠는 우리와 달리 서류전형에서부터 탈락하진 않잖아.”
극심한 취업난과 무한 취업경쟁 시대에서 최고명문이라는 한국대 졸업장도 취업을 100퍼센트 보장해 주지 않는다.
이공계나 상경계열이라면 혹시 모를까.
“페루까지 와서 취업걱정이냐? 영지 넌 좀 더 놀아도 돼.”
“쳇! 놀고 싶어도 놀 사람이 없네요. 다들 얼마나 치열하다구......”
“남친 없어?”
“후배 소개 좀 시켜주고 그런 말 하시지!”
“기다려 봐 인마. 오빠가 너 하나 시집 못 보내주겠냐?”
“영지 시집을 왜 네가 보네?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지랄 까불대지 말고, 넌 학점이나 좀 신경 써. 만날 놀러 다닐 생각만 하지 말고.”
“한국대라고 아주 자신감 쩌는 것 좀 봐라......!”
“중학교 때부터 PC방 그만 좀 처가시고 내가 같이 공부하자고 할 때 말을 들었어야지.”
“그래서 학교 다닐 때 어땠더라? 넌 아싸! 난 인싸!”
“난 아싸였지만 한국대! 넌 인싸였지만 지방대.”
“아오! 나이롱 빤스! 잘났다~ 새꺄.”
“별명을 불러도 그게 뭐냐? 초딩이냐?”
“내 맘이야. 맥주 하나 더 할 거야 말 거야?”
“콜!”
식당 종업원이 회무침 비스름한 현지 음식을 이온의 테이블로 가져왔다.
- 부엔 프로베초(맛있게 드세요).
- 그라시아스(고맙습니다).
이온과 남매는 남미의 대표 음식이랄 수 있는 세비체로 이른 저녁을 해결했다.
그리고 두 시간 정도 차베스 공항에서 빈둥거리다가 저가항공사 항공편으로 아야쿠초로 날아갔다.
취업 스펙을 위해서이든 순수한 나눔의 실천이든.
졸업하기 전에 미리미리 다양한 경험을 해두어 나쁠 것이 전혀 없다.
비록 자기소개서에 몇 줄 들어갈 에피소드를 만들기 위해 방학 때만 되면 동남아 또는 중남미, 아프리카를 싸돌아다니며 청춘의 소중한 시간을 쓰게 될 테지만, 그 또한 삶의 일부다.
단순한 스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가 있고.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훌륭한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은 언제나 집을 떠나서야 마주하게 된다.
좋은 인연이든 혹은 그 반대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