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슬슬 점심시간이네
할아버지 댁에 도착한 강현은 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창고에 보관했던 천 옷과 가죽 갑옷.
검까지 드니 그럴듯한 모습이 되었다.
‘…이걸 집부터 입고 올 순 없으니.’
누가 봐도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그리고 반질반질하게 닦아서 소독까지 끝낸 투구를 목에 걸쳤다.
그러자 어깨 위에 있던 토리가 투구 속으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곧 고개를 내미는 토리.
“미안해. 깜빡했네.”
강현은 투구 안에 쿠션을 넣었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몸을 비비는 토리.
강현은 그런 토리를 보다가 이동장을 살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루리.
이상이 생긴 게 아니었다.
올 때까지 토리와 놀다 보니 지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는 설기가 있었다.
힘껏 솟은 귀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꼬리.
말을 하지 않아도 뜻이 전해져 왔다.
놀러 가는 거야?
강현은 웃으며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컹! 컹!”
기분 좋게 짖은 설기가 이동장 손잡이를 입에 물었다.
갑자기 흔들린 탓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루리가 눈을 떴다.
“…설기가 들겠다고?”
끄덕끄덕.
머리가 움직이자 같이 흔들리는 이동장.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들게. 설기는 보자기만 부탁해.”
강현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설기가 등에 메고 있던 보자기를 힐끗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그런 설기를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흘렸다.
마음은 고맙지만 설기에게 맡길 순 없었다.
‘설기가 물고 다니면 안이 엉망이 되겠지.’
흔들리는 꼬리와 한 번씩 움찔거리는 다리가 그걸 증명했다.
벌써 몸이 반응하는 것이었다.
‘다녀온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그러나 그 기분이 이해되었다.
캠핑과는 달랐다.
설렘을 느끼는 건 강현도 마찬가지였다.
* * *
샤르르, 샤르르.
이세계로 넘어가자 인사를 건네오듯 나뭇잎이 흔들렸다.
후덥지근한 열기가 단번에 날아갔다.
힐끗 옆을 돌아보자 설기가 반짝이는 눈으로 강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뛰쳐나가는 설기.
“컹! 컹!”
순식간에 사라지는 설기를 보며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러면서 뭘 들겠다는지.’
만일 이동장을 설기가 들고 있었다면 진작에 엉망이 되었을 거다.
거기까지 생각한 강현은 설기가 메고 있는 보자기를 떠올렸다.
“….”
강현은 다시 설기가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괜찮겠지?”
고개를 돌려 토리를 바라보았지만, 토리는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결국, 설기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루리는 숲이 신기한지 이동장 밖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살며시 미소를 지은 강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설기가 돌아온 건 한 시간쯤 걸었을 때였다.
평소보다 산책 시간이 길었다.
강현은 돌아온 설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설기의 등이 허전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설기야, 너….”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
아무것도 모른다는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짐은?”
강현의 물음에 슬그머니 자신의 뒤를 확인하는 설기.
“끼잉?”
놀라서 눈이 커졌다.
짐이 사라진 걸 이제야 알게 된 것이었다.
대체 얼마나 신났으면.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찾으러 가자.”
짐이 어떤 꼴이 되었을까.
다행이라면 설기의 짐 안에 식자재는 없었다.
‘이럴 것 같긴 했지.’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끼잉, 끼이잉.”
강현은 앓는 소리를 내며 눈치를 보고 있는 설기의 머리를 두드렸다.
“다음부터 조심해.”
고개를 끄덕이는 설기.
늘 그렇지만, 대답은 잘했다.
그렇게 고개를 돌린 강현은 숲을 바라보았다.
‘…한 시간이라.’
설기의 이동속도라면 숲 전체를 뒤지고 다녔을 거다.
당연히 짐이 어디에 떨어졌을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설기가 있으니.’
설기의 후각이라면 금세 찾아낼 거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설기의 귀가 쫑긋 올라갔다.
“컹! 컹!”
반갑게 짖는 설기.
짖을 뿐만 아니라 제 자리에서 돌기까지 했다.
그러한 설기의 모습에 강현의 눈이 커졌다.
설기가 먹을 것 이외에 이렇게 반기는 건 처음이었다.
‘에밀리야 씨에게도 이렇지 않았는데.’
대체 뭘까.
가족이라도 내려온 걸까?
강현의 머릿속에 설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설탕이 내려왔다면 설기가 도망쳤을 거다.
저리 즐거워하진 않았을 거다.
‘그러고 보니 설기네 가족에게도 한 번 가야지.’
전에 갔을 때는 너무 경황이 없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해야 했다.
‘부탁해서 소라도 잡아야겠어.’
하지만 한 마리로 될까?
걱정이 올라왔다.
곧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설기네 가족이 아니었다.
궁금증에 강현도 설기의 시선을 따라갔다.
곧 수풀을 흔들리고 그림자가 나타났다.
“노아 씨?”
의외의 인물.
그러나 곧 설기가 반기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노아의 손에 익숙한 짐이 들려 있었다.
“어떻게.”
“오다 주웠다.”
강현의 말에 짧게 대꾸하는 노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짐을 건넸다.
그런 노아의 모습에 강현이 웃음을 삼켰다.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어서 한 번에 강현의 짐이란 걸 알아챘다.
애당초 이 숲에 다닐 사람이 몇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짐을 건넨 노아가 강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평소랑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가려는 건가?”
“예.”
강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요정들의 영역인가?”
“아뇨.”
강현이 고개를 젓자 노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또 인간인가?”
어딘가 불편한 듯 보이는 노아.
강현은 고개를 갸웃하고 입을 열었다.
“예. 이걸 고치기 위해서 잠깐 다녀올 생각입니다.”
강현은 이동장을 들어 올렸다.
고치는 게 아니라 충전을 하는 것이었지만 뜻은 통했다.
그제야 이동장을 발견했는지 노아의 눈이 커졌다.
이동장 안에 있던 루리가 귀엽게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반가움에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차마 이야기할 순 없었다.
‘관심받는 게 싫어서 도망쳤다고 할 순 없으니.’
강현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강현에겐 중요한 이유였다.
“걔는…. 그렇군. 정령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이 풀어지는 노아.
강현은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작은 그림자 하나가 수풀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강현을 향해 쏘아지는 그림자.
하지만 노아는 예상했다는 듯이 그림자를 낚아챘다.
“캬! 캬아악!”
성난 살쾡이처럼 발버둥 치는 그림자는 모나였다.
하지만 노아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포기한 모나는 다시 강현과 설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바압!”
모나의 인사에 강현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대롱대롱 매달린 모나.
전보다 팔다리가 길쭉해졌다.
그리고 근육도 제법 붙은 모습.
정말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었다.
노아가 그런 모나를 짐짝처럼 어깨에 걸쳤다.
“그럼 난 이만 가 보지.”
“벌써요?”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가는 건가?
강현의 말에 노아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모나의 교육 때문에 나온 거다.”
교육?
강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노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냥엔 익숙하지만, 아직 전사들과의 싸움은 서툴더군.”
잘 이해할 수 없지만,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족만의 교육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최근에 보지 못한 이유가 저것 때문인가.’
아무래도 모나에게 중요한 순간인 것 같았다.
“갸! 캭! 캭!”
그렇게 노아가 몸을 돌리자 모나가 발버둥 쳤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발톱.
기껏 강현을 만났는데 아무것도 못 먹고 갈 순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아의 손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분풀이로 노아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는 모나.
강현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저 고통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노아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수인족의 머리카락은 더 질긴가?’
그렇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참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의 모나는 그때보다 더 성장했다.
그때, 걸음을 옮기던 노아가 멈춰 섰다.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던 걸까, 아니면 역시나 고통스러웠던 걸까?
고개를 돌린 노아가 진지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다음 여행은 수인족의 마을로 해라.”
“예?”
강현이 눈을 껌뻑였으나 이미 노아는 사라진 뒤였다.
멍하니 있던 강현은 뒤늦게 노아의 반응을 떠올렸다.
“…설마, 인간들 마을만 가서 섭섭한 건가?”
지금까지의 일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강현은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영역에 돌아다니는 게 안전했다.
‘…다음에는 고양이 귀라도 사야 하나.’
인터넷을 찾아보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착용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소름이 올라왔다.
그런 강현의 모습에 설기와 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강현이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일행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컹! 컹!”
설기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니 새 두 마리가 날고 있었다.
정령인 소나와 소피였다.
그렇게 자리에서 잠시 기다리자 수풀 사이로 요정 둘이 내려왔다.
“정말 강현 씨였군요!”
에밀리야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아우라는 여전히 뿌루퉁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전처럼 적의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시기에는 아직 일러서 혹시나 했거든요.”
고작 삼 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강현도 미리 말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그렇게 반가움을 표하던 에밀리야도 강현의 옷차림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그 모습은?”
곧 무언가를 알아챈 에밀리야의 눈이 급히 움직였다.
그리고 강현의 손에 들린 이동장에서 멈췄다.
“설마.”
“예.”
강현은 웃으며 이동장을 건넸다.
그렇게 이동장을 받아 든 에밀리야가 곧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나.”
안에 루리를 봤기 때문이었다.
솜사탕 같은 구름을 만들어서 두둥실 떠 있는 루리.
에밀리야와 눈이 마주치자 날개를 퍼덕거렸다.
“그래, 나도 반가워.”
이동장에 손바닥을 대는 에밀리야.
놀랍게도 바닥에 내려온 루리가 이동장에 머리를 비볐다.
‘역시 요정인가.’
강현이 감탄했다. 노아나 모나 때와는 다른 반응.
에밀리야뿐만이 아니라 뒤에 있던 아우라도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루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강현의 시선을 깨닫고 애써 표정을 굳혔지만, 조금씩 올라가는 입꼬리와 귀는 숨길 수가 없었다.
수인만큼이나 감정에 충실했다.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에밀리야가 아쉬움을 토했다.
문을 열 순 있지만, 이동장 밖으로 나올 순 없었다.
“제가 한번 방법을 찾아볼게요.”
“저도 돕겠습니다.”
에밀리야의 말에 아우라 역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둘을 보며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사실 강현도 답답해할까 걱정했지만.
강현의 시선이 이동장으로 향했다.
루리는 놀이동산에 온 아이처럼 이동장을 즐기고 있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고, 햇살이 강현의 눈을 간지럽혔다.
‘슬슬 점심시간이네.’
강현은 배낭에 싸 온 도시락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