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이것도 운치가 있네
“오신 김에 같이 식사나 하시겠어요?”
강현의 권유에 에밀리야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나가 강현 씨를 발견해서 급히 온 거예요. 금방 돌아가야 해요.”
일정이 있단 소리였다.
“아, 그럼.”
에밀리야의 말에 강현은 급히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통 하나를 꺼냈다.
도시락통.
“이걸 가져가서 드세요.”
강현의 말에 에밀리야와 아우라의 눈이 커졌다.
“강현 씨랑 설기가 먹으려던 것 아니에요? 이걸 주시면….”
“어차피 많아요.”
강현은 배낭 안을 슬쩍 보여줬다. 에밀리아에게 건네준 것 말고도 다른 통이 들려 있었다.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넉넉하게 준비했다.
‘남으면 마을 사람들 나눠 줄 생각이었으니.’
저녁은 인간의 마을에서 먹을 예정이었다.
그러자 잠시 망설이던 에밀리야가 도시락을 받았다.
“잘 먹을게요.”
뒤에서 보고 있던 아우라의 표정도 밝아졌다.
상기된 표정으로 있던 아우라가 강현과 눈을 마주치고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도시락을 챙긴 에밀리야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그럼 가 볼게요.”
“예. 여러 가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강현이 이동장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안에 있던 루리가 인사를 건네듯이 날갯짓했다.
그러자 에밀리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흰 친구잖아요? 친구끼리 돕는 게 당연하죠.”
에밀리야의 말에 강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낯간지럽긴 하지만 가슴이 따뜻해지는 말이었다.
“루리도 만나서 반가웠어. 나중에 또 보자.”
루리에게까지 인사를 건네는 에밀리야.
그렇게 떠나가려던 에밀리야가 다시 멈춰 섰다.
그 모습에 강현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최근.
‘아니, 좀 전에도 비슷한 걸 봤던 기분이….’
의아하다는 강현의 시선과 마주치자 에밀리야가 입을 열었다.
“다음 여행은 요정의 나라는 어떠세요? 제가 같이 갈 테니 문제도 안 생길 거예요.”
“…예?”
눈을 껌뻑이는 강현을 보며 에밀리야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다음번에 들려주시면 기쁠 것 같다는 말이랍니다.”
그게 그 말이 아닌가.
싱긋 웃은 에밀리야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에밀리야와 아우라가 떠난 자리.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음.”
결국, 노아가 했던 말과 같았다.
곤란한 듯 한숨을 내쉰 강현은 옆을 돌아보았다.
도시락통을 꺼냈을 때부터 반짝이는 눈으로 강현을 바라보고 있는 설기.
강현은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도 밥부터 먹을까?”
“컹!”
강현의 말에 설기가 힘차게 짖었다.
* * *
도시락통을 열자 알록달록한 김밥이 나왔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다른 통에는 가지런히 정리된 유부초밥이 있었고, 또 다른 통에는 미리 잘라 온 돈가스와 소시지가 들어 있었다.
미리 잘라 왔기에 조금 딱딱해졌지만 상관없었다.
‘도시락이 원래 그런 거지.’
이런 것조차 하나의 매력이었다.
설기는 열 때마다 나오는 새로운 요리들에 신나서 꼬리를 흔들었다.
“컹! 컹!”
빙그르르 도는 설기.
그 모습에 토리와 루리도 따라서 돌았다.
웃음을 흘린 강현은 다른 통을 꺼냈다.
또 뭐가 있을까.
눈을 반짝이는 설기.
하지만 강현이 도시락통을 열자 그 빛은 빠르게 사라졌다.
샐러드와 과일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바로 고개를 돌려 버리는 설기.
알기 쉬운 반응에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 먹자.”
따로 가져온 앞접시에 설기의 몫을 덜어줬다.
김밥과 유부초밥, 돈가스, 소시지, 그리고 샐러드까지.
한 가지도 빠짐없이 공평하게 덜어 줬다.
“다 먹고 부족하면 말해 줘.”
강현은 배낭에 남아있는 통들을 보며 말했다.
넉넉하게 싸 왔기에 양은 충분했다.
강현의 말에 설기가 힘차게 짖었다.
“컹! 컹!”
그리고 먹기 시작하는 설기.
그 모습을 보며 강현은 방울토마토 두 개를 꺼내서 토리와 루리에게 건넸다.
방울토마토를 한입 베어 먹으려던 토리가 멈춰서 루리와 강현을 번갈아 보았다.
강현은 토리가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지 알아챘다.
“안에서 같이 먹을래?”
끄덕끄덕.
강현의 물음에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는 토리.
강현은 그런 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배려심이 많은 아이였다.
강현은 토리와 방울토마토를 들어서 이동장 안에 넣어줬다.
방울토마토를 가지고 장난치던 루리가 토리를 발견하고 반갑게 날개를 흔들었다.
기분이 좋을 때나 흥분할 때, 저런 식으로 날개를 흔들고 있었다.
토리는 가지고 온 방울토마토를 놔두고 루리가 먹던 걸 사이좋게 나눠 먹기 시작했다.
흐뭇한 광경.
하지만 계속 지켜볼 순 없었다.
옆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설기가 강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더 달라는 눈빛.
강현의 시선이 설기의 접시로 향했다.
역시나 샐러드만 남아있는 접시.
강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더 먹고 싶으면 샐러드도 먹어야 해.”
“컹?”
눈을 껌뻑이는 설기.
그러나 곧 다급하게 짖었다.
“컹! 컹! 컹!”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는 모습이었다.
‘아까는 그런 말 없었잖아! 대충 그런 뜻인가?’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아. 다 먹고 부족하면 이라고.”
넉넉하게 싸 온 도시락.
당연히 샐러드도 마찬가지였다.
강현의 말에 설기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눈을 꼭 감더니 남은 샐러드를 입에 넣기 시작했다.
결국, 샐러드까지 다 비운 후에나 강현은 새롭게 음식들을 올려 줬다.
언제 실망했냐는 듯이 신나게 먹기 시작하는 설기.
그 모습을 보며 강현도 김밥 하나를 입에 넣었다.
단맛과 신맛.
여러 재료의 맛이 입안에서 뒤섞였다.
바람이 불어오자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이게 휴식이지.’
지금은 매장도, 방송일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는 시간.
강현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 * *
바람이 강현의 뺨을 간지럽혔다.
눈을 뜬 강현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점심을 먹고 잠깐 쉰다는 게 깜빡 잠이 든 것이었다.
‘너무 풀어졌네.’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그리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코까지 골고 있는 설기가 보였다.
토리와 루리도 사이좋게 껴안고 자고 있었다.
볼록 튀어나온 배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입가에 당근과 시금치가 붙어 있었다.
강현은 그런 설기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일어나. 이제 가야지.”
허우적거리는 설기.
강현이 엉덩이를 한 번 더 치자 그제야 눈을 떴다.
“끼잉?”
퉁퉁 부은 얼굴로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설기.
그러자 이동장 안에 있던 토리와 루리도 눈을 떴다.
그렇게 셋은 동시에 기지개를 켰다.
각자의 생김새는 다르지만 행동은 점점 닮아 가고 있었다.
‘가족이란 거지.’
고개를 끄덕인 강현도 기지개를 켰다.
“늦었으니 서두르자.”
마을에는 숙박 시설이 따로 없었다.
여관에서 자려면 성까지 가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노숙해야 할 수도 있었다.
강현의 말에 설기가 힘차게 짖었다.
* * *
서두른 덕분인지 저녁 무렵에는 마을에 닿았다.
“어? 저번 그 총각이네.”
“요리사 양반?”
마을 사람들은 강현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해 줬다.
그중에는 제니퍼도 있었다.
란돌프의 아내.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앞치마를 맨 상태였다.
“말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뒤따라온 헤나도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일이 있어서요. 란돌프 씨는요?”
“아직 성에 있어요. 그이는 오늘 좀 늦는다고 했어요.”
제니퍼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점점 몸이기 시작하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봤다.
다들 반가운 기색이 가득했다.
‘…바로 떠나긴 힘들겠네.’
그러한 강현의 표정을 읽었는지 제니퍼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모처럼 오셨으니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그리고….”
그리고?
강현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제니퍼가 조심스레 입을 이었다.
“지금 성으로 가기에는 힘들 거예요.”
“…혹시 성에 무슨 일이 있나요?”
란돌프가 아직까지 성에 남아 있는 것과 관련된 건가.
그렇다면 여행 날짜를 다시 잡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자 제니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 올해는 좀 일찍 시작해서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강현이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집으로 가죠.”
빗줄기가 점점 강해지자 사람들도 인사를 건네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강현 제니퍼의 뒤를 따랐다.
* * *
전에도 와 본 적이 있는 제니퍼의 집.
집에 들어오자마자 빗줄기가 더욱 강렬해졌다.
쏴아아아.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으니 제니퍼가 천과 따뜻한 물을 건네줬다.
“아, 감사합니다.”
한 모금 마시자 온기가 올라왔다.
하얗게 올라오는 김.
옆에 있던 토리가 그 모습을 보더니 꼼지락거리며 올라오려고 했다.
웃음을 흘린 강현이 물잔을 토리 옆에 놓았다.
그러자 물잔을 껴안은 토리.
부르르.
한 번 떨더니 표정이 나른해졌다.
루리는 비가 신기한지 창문을 보기 위해 계속 날아오르고 있었다.
‘…루리는 처음이겠네.’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이동장을 창가 앞에 놓자 신기하다는 듯이 창문 너머를 보았다.
“아, 아기 새.”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돌리자 헤나가 루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헤나가 먼저 나선 게 신기한지, 이쪽을 바라본 제니퍼의 입에서도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머나, 귀여워라.”
강현은 둘의 반응에 웃음을 흘렸다.
지구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토리와 달리 비행 모드가 아닐 때는 사람 눈에도 보였다.
“루리야. 가까이 와서 봐도 돼.”
강현이 슬쩍 자리를 피해주자 잠시 망설이던 헤나가 다가왔다.
그러고는 이동장 안에 있는 루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비를 구경하고 있던 루리도 시선을 느꼈는지 몸을 돌렸다.
헤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는 루리.
그러나 곧 반갑다고 날갯짓했다.
“우와.”
작은 루리의 움직임에 감탄하는 헤나.
둘을 놔두고 강현은 제니퍼에게 입을 열었다.
“언제쯤 비가 그칠까요?”
강현의 물음에 제니퍼가 곤란한 듯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두세 달 정도는 계속 올 거예요.”
그제야 올해는 일찍 시작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우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작년에도 이맘때였지.’
강현은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이건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운치가 있네.’
뭐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
지금이야 비를 피했지만, 어릴 적에는 빗속에서 자주 놀았다.
공기가 깨끗한 이곳의 비라면, 맞아도 나쁠 건 없었다.
“모처럼 오셨으니 같이 식사나 해요. 안 그래도 그이가 늦게 온다고 해서 적적했거든요.”
제니퍼의 권유에 강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싸 온 게 있으니 같이 먹어요. 먹다 남은 거긴 한데.”
강현이 멋쩍게 말하자 제니퍼가 싱긋 웃었다.
“정말요? 기대되네요.”
그렇게 강현은 거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