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깜짝 놀랐잖아.
다음 경기는 줄다리기였다.
각각의 종족마다 두 사람씩 앞으로 나왔다.
앞으로 나온 이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투지를 올리고 있었다.
방금까지 평화로웠던 곳에 긴장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지만, 좀 아쉽네.’
그 모습을 본 강현이 입맛을 다셨다.
그때, 요정의 장로가 일어났다.
“잠시만 드릴 말씀이 있소.”
장로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장로의 눈짓을 받은 란돌프와 카샨, 노아가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란돌프가 문뜩 뒤를 돌아보았다.
넌 왜 안 오냐는 눈빛.
강현은 머쓱한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일행들이 모이자 장로가 입을 열었다.
“종족의 투기를 겨루는 것도 좋지만 모처럼이니 다른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어떤가 싶소.”
“다른 방식이라면….”
란돌프가 되물었다.
장로와 함께 있던 에밀리야와 로멘은 이미 이야기를 들었는지 담담한 표정이었다.
장로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그렇게 장로의 이야기가 끝나자 일행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탄식을 뱉는 이도 있었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쓸어내리는 이도 있었다.
장로의 말은 간단했다.
종족으로 팀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마침 각 종족이 둘씩이니 서로 팀을 나누자는 제안.
백팀과 청팀을 나누는 것처럼.
장로는 그들의 얼굴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물론 이런 상황이라 오해를 부를 수도 있으니 참고 정도만 해 주시길 바라오.”
이런 상황.
강현은 그 뜻을 이해했다.
지금 요정이 우승 두 개로 앞서고 있었다.
‘정작 우승한 본인은 기뻐하지 않는 것 같지만.’
아직도 뒤통수가 따가웠다.
설기가 아닌 강현에게 투쟁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게다가 줄다리기를 제외하면, 남은 두 경기 중 하나는 요정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일명 보물찾기.
숨바꼭질이나 사냥. 방식은 비슷했지만, 어느 한쪽의 이름을 택하기 어려워서 그리 붙였다.
“상관없어. 안 그래도 너무 쉽게 끝날까 봐 걱정했거든.”
카샨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술잔이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노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오전이라도 참은 게 대단한 일이었다.
카샨의 말에 란돌프와 에밀리야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근력 자체만 비교하면 수인족을 넘을 수 없었다.
그들과 힘을 겨룰 수 있는 건 난쟁이 정도일 거다.
“그리고 다음 경기도 마냥 요정에게만 유리하진 않을걸?”
도발이었다.
카샨인 장로를 보며 씩 웃고 있었다.
카샨의 부족들은 다른 수인들과 다르게 들보다 산에 익숙했다.
장로는 그런 카샨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물론,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소이다.”
그러나 말과 달리 여유가 넘쳤다.
곧 둘의 시선이 란돌프에게 향했다.
“…이쪽도 상관없습니다.”
란돌프가 대답하자 카샨이 박수를 쳤다.
“좋아. 결정이네.”
“아.”
그때, 무언가를 떠올린 강현이 탄성을 뱉었다.
일행들의 시선이 향하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그럼 손님이나 구경꾼분들도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게 어떨까요? 물론, 희망자에 한해서요.”
이어지는 강현의 말에 일행들이 눈이 커졌다.
그들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쁜 반응은 아니었다.
“확실히 팀을 나누게 되면 인원 제한도 의미가 사라지는군요.”
“재미있겠네.”
에밀리야에 이어서 란돌프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쓸어내리던 카샨이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겠어. 그럼 이긴 녀석들이 너희와 겨루는 건 어때?”
카샨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란돌프와 에밀리야, 노아가 있었다.
“세 경기가 하나로 준 거잖아? 한 번으로 끝나면 섭섭하지. 게다가 너희도 밑에 녀석들 신경 쓰느라 제대로 나서지도 못하고 있잖아.”
카샨의 말에 셋이 입을 다물었다.
정곡이었기 때문이었다.
부하와 후배들이 활약할 수 있게 경기를 양보하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인원이 너무 적지 않을까요? 얼마나 나올지도 모르는데.”
이쪽은 고작 셋이었다.
그러자 카샨도 미처 생각을 못 했는지 고개를 갸웃하다가 탄성과 함께 강현을 돌아보았다.
“그때는 이 녀석을 붙여 주지.”
“…저요?”
갑작스러운 호명에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자 카샨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만든 거잖아. 너도 참가는 해 봐야지.”
다른 이들도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떨결에 참가가 결정된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아니지. 인원이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으니.’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강현의 생각과 달리 반응은 뜨거웠다.
“직접 상대를 노리진 않지만, 힘을 겨루는 만큼 위험할 수 있어요.”
“예.”
“결과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에밀리야와 노아의 경고에도 사람들이 너도나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마슈의 모습도 보였다.
잔뜩 들뜬 모습.
강현은 그들을 보다가 볼을 긁적였다.
‘…천벌이란 게 생각보다 가벼운 건가?’
“그렇진 않아. 저들이 이상한 거지.”
화들짝 놀란 강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앤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평소와 같은 심드렁한 눈빛이었다.
“천벌은 절대적이야. 하지만 백 년이란 세월은 그 기준이 어떤지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지.”
강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옆에 있던 아나가 입을 열었다.
“이거는 잘못돼도 이 정도만 아프겠다. 이런 말이다. 맹약이 떨어지고 모두가 신의 뜻을 따른 건 아니다.”
졸지에 할 말을 빼앗긴 앤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아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꼬맹이 말이 맞다.”
“꼬맹이라니!”
아나가 발끈했지만, 앤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가지 시도하다 보니 그 정도를 알 수 있었지.”
“…시도라니.”
그걸 직접 시험하는 이들이 있었단 걸까.
강현이 어이없어하자 앤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이 자발적으로 벌어지는 것만은 아니지.”
화들짝 놀란 강현이 앤을 돌아보자 앤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앤뿐만 아니라 아나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표정을 본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알아서 좋을 게 없다는 이야기겠지.’
강현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을 애써 지웠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앤이 다시 사람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런 건 나도 처음이라 확신할 수 없지만, 기껏해야 며칠 앓아눕는 정도겠지. 일반인들에겐 그조차도 큰일이겠지만, 저 정도 수련한 이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강현은 놀라운 눈으로 저들을 보았다.
다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건가. 줄다리기가 뭐라고.
마침 강현과 눈이 마주친 마슈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마슈 씨도?”
“아니, 저 녀석은 아무 생각이 없을 뿐이다.”
아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호위도 아닌 저 녀석이었다.
친오빠한테 평이 박했다. 그러나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저 녀석들은 팔 한 짝이나 다리 한 짝이 날아가는 게 아니면 신경 안 쓸 거다.”
담담히 말하는 앤의 모습에 강현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때, 강현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구석 자리.
들떠 있는 이들과 달리 홀로 앉아 있는 이가 있었다.
긴 귀와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얼굴.
‘요정?’
그러나 다른 요정들과 달랐다.
홀로 동떨어진 느낌.
저런 요정이 있었던 걸까?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대체 언제 온 걸까?
축제 때도 보지 못했었다.
모든 요정을 기억하는 건 아니었지만, 쉽게 잊을 수 있는 요정이 아니었다.
곧 요정과 강현이 눈이 마주쳤다.
부드럽게 웃는 요정.
그와 동시에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각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린 강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껌뻑였다.
“컥.”
인간, 수인, 요정이 뒤섞인 경기장.
그사이에 익숙한 털 뭉치가 섞여 있었다.
밧줄 끝을 물고 있는 설기.
“또 언제 갔어.”
설기만이 아니었다. 반대쪽에는 모나가 밧줄을 당기고 있었다.
“힘내라! 힘!”
“당겨! 지지 마라!”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
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끝났네.’
그러나 그런 강현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강현은 의외란 듯이 설기를 보았다.
‘설기가 참가하면 밀릴 줄 알았는데.’
조금씩 설기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시 반대쪽으로 끌려가는 설기.
꼬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승부가, 되잖아?’
반대쪽에서 이를 악물고 밧줄을 가져오고 있었다.
강현은 짧게 감탄했다.
‘마을 운동회 때는 사기나 다름이 없었는데.’
역시나 이세계였다.
하지만 설기도 밀리기만 하지 않았다.
작은 몸이 이리저리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뒤로 옮겨가는 밧줄.
팽팽한 힘겨루기.
균형은 쉽게 무너졌다.
“엇?”
“억.”
한쪽에서 발이 엉킨 것이었다.
화들짝 놀란 설기와 사람들이 버텨 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좋아! 넘어온다!”
“지금이야!”
반대편에 있는 이들 역시 전사들.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등바등하는 설기.
“끼잉, 낑.”
설기의 앓는 소리와 함께 밧줄이 완전히 넘어갔다.
“와아아아아!”
“이겼다아아!”
한쪽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요정, 인간, 수인.
누구 할 것 없이 서로를 앉고 뛰고 있었다.
그 속에는 아우라도 섞여 있었다.
반대로 진 팀은 쓸쓸한 얼굴로 넘어진 이들을 일으켰다.
“미안합니다. 제가 밑을 확인 못 해서.”
“아닙니다. 저도 너무 붙어 있었습니다.”
발이 엉킨 이들이 서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들은 줄다리기가 처음이지.’
요령이 부족했다. 발이 엉키는 게 당연했다.
그때, 강현의 눈에 몸을 둥글게만 설기가 보였다.
뭔가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걱정이 올라온 강현이 설기에게 다가갔다. 환호하던 이들도 걱정스러운 눈길로 설기를 보고 있었다.
“설기야. 괜찮아?”
“끼이잉.”
강현의 물음에 설기가 앓는 소리를 냈다.
강현은 곧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바닥에 무언가가 보였다.
“…이빨?”
강현의 말에 설기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입 한쪽이 허전했다.
“괘, 괜찮아?”
고개를 젓는 설기.
동시에 주르륵하고 핏물이 흘러나왔다.
“…!”
강현이 화들짝 놀라자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카샨이었다.
설기의 입안을 확인한 카샨이 고개를 흔들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유치가 빠진 것뿐이야. 보통은 송곳니가 나중에 빠지긴 하는데, 큰 상관은 없어. 어차피 하얀 늑대들은 성년이 되어도 이가 새로 자라니.”
그 말이 강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깜짝 놀랐잖아.”
설기 역시 카샨의 말을 들었는지, 조금은 안정되어 보였다.
그리고는 혓바닥으로 이빨이 빠진 자리를 핥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피가 멈췄다.
“다행이네요.”
옆을 보니 어느새 다가온 에밀리야와 로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뒤로는 란돌프와 노아의 모습도 보였다.
다들 걱정돼서 온 것이었다.
시선이 모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늠름하게 짖는 설기.
“컹! 컹!”
꼬리 역시 살랑거렸다.
그 모습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마침 잘 되었어.”
갑작스러운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카샨에게 향했다. 뭐가 잘 되었다는 걸까?
카샨은 설기의 이빨을 들고 웃고 있었다.
“하얀 늑대의 이빨에는 특별한 힘이 깃들지. 이걸 우승 상품에 같이 넣는 게 어때?”
강현은 물론이고 세 종족이 상품을 가져왔다.
고가의 물건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즐기는 자리였다.
과한 상은 역효과였다.
여러 명에게 골고루 나눠 줄 수 있을 양.
거기에 설기의 이빨이 추가된다고 해서 나쁠 게 없었다.
카샨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전사들의 눈빛이 변했다.
‘…정말 귀한가 보네.’
강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설기를 보았다.
배시시 웃는 설기.
이빨의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